진리와 관용

청년 성인을 위한 교회 교육 기구 영적 모임 •2011년 9월 11일 •브리검 영 대학교


 

사랑하는 청년 형제 자매 여러분, 크리스틴과 저는 이 특별한 모임에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우리가 모인 오늘 9월 11일은 우리 삶과 생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사건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쌍둥이 빌딩을 기억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저녁 또 다른 쌍둥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와 관용이라는 서로 짝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은 몇 년 전 이 모임에서 제가 설명했던 데이트와 어울려 다니기와 결혼이라는 주제처럼 청년 여러분에게만 특별히 관련된 내용이라서가 아닙니다. 진리와 관용에 관한 제 말씀을 듣고 이 두 개념을 깊이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아주 중요한 내용이며, 여러분이 바로 그 세대의 부모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적 진리를 믿습니다

먼저, 진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옳고 그름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포함한 절대적 진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천지 다 무너지고 또한 멸해도
진리만이 모든 것 이기고
영원히 영원히 빛나리1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주제에 관한 것이든 모든 진리를 믿습니다. 세상의 종교나 종파 가운데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부하는 진리가 하나라도 있는 곳은 없습니다. 진리는 우뚝 서며 변치 않을 것이기에, 우리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든 모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2

진리의 존재와 본질은 현세의 가장 중대한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믿지 않는 자는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습니다.(요한복음 18:37~38 참조) 그 일이 있기 전에 구주께서는 이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라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또한 현대의 계시에서 그분은 “진리는 사물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교리와 성약 93:24)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뭇사람들이 그 진리를 믿든 안 믿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확고부동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악이 존재함도 알며 어떤 일들은 단순히, 심각하게, 그리고 영원히 그릇된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악을 피하고 진리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의 의로운 행위와 의로운 소망에 경의를 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저는 믿음과 믿지 않음, 선과 악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세상에서 여러분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지난 두 달간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대규모 절도 및 사기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보도를 듣고 있노라면 이 사회가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는 도덕적 진공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달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폭동과 약탈과 조지아 주 애틀랜타의 초,중등 학교에서 교사들이 자행한 추악하고 광범위한 기만 행위는 서구 사회가 유대교와 기독교적 유산으로부터 받은 도덕적 토대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3

도덕적 상대주의를 조심하십시오

도덕적 토대를 염려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 옳고 그름이란 없다는 믿음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행위에 대한 모든 규칙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의 선택권이 하나님의 계명보다도 우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있는지조차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각 사람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도덕적 상대주의 철학은 미국과 여러 서구 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비공식적 신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과거에는 특정 지역에 제한적으로 일어났고 치부로 여겨 덮으려 했던 악행들이 이제는 합법화되고 대형 광고처럼 당당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인 청소년과 청년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철학에 설복되어 자기 만족적인 쾌락을 쫓고, 몸의 일부분에 문신과 피어싱을 하거나,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고, 살갗을 노출시키는 옷, 외설물, 부정직, 추잡한 성적 탐닉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근본적 믿음에 관해 구세대와 신세대는 깜짝 놀랄 만큼 대조적으로 생각합니다. 20년 전에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성인의 79퍼센트가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선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4 반면에 최근 대학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는 “4분의 3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옳고 그름의 차이는 상대적이라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5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최고의 입법자로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어떤 행위는 절대적으로 옳고 참이며, 특정 행위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행위임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6 성경과 몰몬경의 선지자들은 이 시대를 예견하여, 사람들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디모데후서 3:4)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유다서 1:4; 니파이후서 28:5; 모로나이서 7:17; 교리와 성약 29:22 참조)

이토록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이에 수반되는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진리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점점 도덕관념이 허물어져가는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도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특히 자라나는 세대인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이 주신 계명으로 확립된 확고부동한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고 분명하게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후기 성도들은 앞서 인용한 찬송가에서 노래하는 진리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진리의 기둥 끝까지 견디리니
굳은 뿌리 세찬 바람 이기고
잔인한 폭군 넘어지리7

오늘 이렇게 듬직한 청년들을 보니, 여러분 중에는 이 주제에 대해 이미 명백한 답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텐데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는지 의문이 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아까 언급한 설문 조사에서 대학 졸업반 학생들의 4분이 3이 옳고 그름의 차이는 상대적이라고 답변한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제가 진리에 대해 말씀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중고등학교와 전문대학, 종합대학에 재직하는 교사들이 상대적 도덕성을 가르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미국 젊은이들의 가치관을 형성시키고, 이들이 사회에 나가 우리 자녀들의 교사가 되고 언론과 대중 매체를 통해 여론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이 도덕적 상대주의 철학은 믿음을 지키는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과 유대교도 및 이슬람교도들이 확고한 근간으로 여기는 것들을 부인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 믿는 자들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가 바로 제 말씀에서 짝을 이루는 두 번째 주제, 바로 관용입니다.

관용

관용이란 친숙하지 않은 의견이나 관행에 대해 또는 그런 의견을 취하거나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 친절하고 온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의 교통 및 의사소통 기술로 다양한 민족과 서로 다른 생각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관용은 더욱 필요한 덕목이 되었습니다. 60년쯤 전에 제가 청년이던 시절에는 대부분 미국인들이 그렇게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과 민족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책이나 잡지에서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또는 여행을 통해, 그리고 종종 이웃과의 개인적인 관계나 시장에서의 교류를 통해서도 그러한 다양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양성에 더 많이 노출되면서 우리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복잡해졌습니다. 또한 다양한 민족과의 교류로 삶이 더 풍성해짐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각기 다르다는 훌륭한 원리를 기억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화와 가치관의 다양성은 그 중에 어떤 것이 우리 복음 문화 및 가치관과 일치하며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 분간해내야 하는 어려운 문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성은 갈등을 빚는 잠재적 원인이 되고, 따라서 우리는 관용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관용이란 무엇이고, 관용을 보여야 할 때는 언제이며, 그렇지 않은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절대적 진리가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도덕적 상대주의 사상을 띤 사람보다 이 질문에 답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과 절대적 도덕 기준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무신론자는 신성모독이나 불경스러운 말 중에 어떤 것이 들어 넘길 만하며 어떤 것이 용납해서는 안 되는 말인지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도덕적 문제에 대해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매우 폭넓은 아량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 용인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의 말은 대중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신념이 있으면 거의 모든 행동, 모든 사람에 대해 관용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덕적 상대주의를 믿는 사람 중에 몇몇은 인간에게는 경외해야 할 하나님이 계시며 지켜야 할 명백하고 절대적인 도덕 기준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기를 꺼려하기도 합니다.

관용을 위한 세 가지 절대적 진리

믿지 않는 이들의 관용과 불관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은 하나님과 절대적 진리를 믿는 후기 성도 여러분입니다. 우리에게, 혹은 우리가 아니라도 믿는 자들에게 관용은 어떤 의미입니까? 관용을 보이는 일은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 특히 어렵습니까?

세 가지 절대적 진리에서 출발해 봅시다. 저는 이것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말씀드리지만, 믿는 자들 대부분이 이런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모든 사람은 하나님 품 아래 형제와 자매이며, 사람들이 속한 다양한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은 후기 성도에게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다양한 종파에 속해 있는] 우리는 설혹 하나님에 대해 각기 다르게 해석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각자는 인류라는 거대한 가족의 구성원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믿는 교리나 철학에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존중심과 넓은 아량, 관용의 태도를 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8

힝클리 회장님이 관용과 더불어 “상호 존중”에 대해서도 말씀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인도네시아의 한 이슬람교 학자인 알위 시합 박사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무언가에 관용을 보인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명백한 악이라 할지라도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 이 세상에서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관용 이상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합 박사는 코란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씀을 이어갑니다. “우리는 신께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하신 이러한 존엄성을 존중합니다. 설령 적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관계이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이든 협력과 상호 존중이 모든 인간 관계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9

서로 간의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사는 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하나의 도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두 번째 절대적 진리를 말씀드리건대, 서로간의 차이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누룩과도 같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13:33 참조) 누룩, 즉 효모는 전체가 발효되어 부풀기 전까지는 커다란 덩어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발효는 그 자체의 영향력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구주는 또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며, 그 수가 적고 그들의 다스림이 작을 것이요(니파이전서 14:12 참조), 세상에 속하지 않음으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요한복음 17:14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같은 믿음이나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과, 또 우리가 받아들인 성약의 의무를 받아들이지 않은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 함께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구주께서 지상 성역을 마치며 아버지께 간구하셨던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요한복음 17:15)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거하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속에 머물며 누룩이 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즉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하여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관용을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종교 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에 도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하는 헌법상의 권리에 기초해 이를 주장합니다. 현재 미국 대법원 법정에서 루터 교도의 한 학교를 변호하도록 선임된 변호사가 설명한 것처럼, 중요한 문제는 “모든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정부의 감시나 간섭을 받지 않고 각자 하나님과, 또한 서로 간에 관계를 쌓아나갈 수 있는가”10 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 때, 여기 계신 여러분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존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쳤듯이, 기독교인들은 “화평[을] 세우는 일을 힘쓰[며]”(로마서 14:19)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로마서 12:18)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과 견해와 관습을 접할 때 그 안에 있는 선한 것들을 보고 또 존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몰몬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선한 일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 그러므로 무릇 선을 행하도록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기도록 이끌며 권유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 선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악마에게 속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모로나이서 7:12~14)

다양성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관용과 존중을 낳습니다.

다른 사람과 그들의 믿음에 대해 관용과 존중심을 보인다고 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향한 결심과 우리가 맺은 성약을 저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세 번째 절대적 진리입니다. 즉, 우리는 진리와 성약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와 거짓된 것 사이의 전쟁에서 싸워야 할 용사로 선발되었습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다른 믿음이나 견해에 대해, 그리고 그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에 대해 관용과 존중심을 보이는 가운데 우리의 진리를 수호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그들의 믿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옹호할 헌법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마땅히 관용과 존중심을 보여야 하지만,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의무를 지닌 우리는 그릇된 행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대부분이 입을 모아 잘못된 행동이라며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런 극단적인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이나 테러 행위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 극단주의자의 소행이라 해도 모두가 어김없이 규탄합니다. 폭력과 절도 행위도 모든 사람이 반대합니다.

관용과 진리라는 동전의 양면

그런데 그보다 덜 극단적인 행위, 즉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잘못된 행동인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한 그런 행위들은 어떤 성향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관용을 보여야 하는지 규정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한 사려 깊은 후기 성도 여성은 다음과 같은 염려가 담긴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관용’이라는 말을 사악한 생활 방식을 용인한다는 뜻과 점점 더 연관 지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관용’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11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님은 이 주제에 관해 영감에 찬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3년 전 종교 교육원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관용이 그 자체로서 미덕이 되려면 베푸는 대상과 그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 관용을 요구받을 때는 많지만 되돌려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관용이라는 단어를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미덕입니다.”12

이 영감에 찬 경고는 절대적 진리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행동에 대해 관용을 보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점을 떠올리게 합니다. 관용 또는 존중이 동전의 한 면이라면, 다른 한 면에는 항상 진리가 있습니다. 이 양면을 모두 의식하지 않고는 관용이라는 동전을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구주께서는 이 원리를 적용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위안의 말씀으로 관용을 베푸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 여인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진리의 말씀을 명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11) 우리 모두는, 대화할 때는 친절하게 그러나 진리는 단호히 선언함으로써 관용과 진리를 동시에 말한 이 예를 통해 교화되고 강화되어야 합니다.

신성모독, 동거, 안식일을 어기는 것을 진리와 관용으로 맞서십시오

이 예를 다른 행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또 다른 사려 깊은 후기 성도 한 분이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앨마는 모사이야서 18장 9절에서, 침례를 받을 때 ‘너희가 있게 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증인”이’ 되겠다는 성약을 맺는다고 말했습니다. …… 이 구절은 오늘날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후기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저는 선교 임지에서 생활하면서 주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것을 자주 듣고, 아는 사람들 중에는 남자 친구와 동거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쓸모 없는 과거의 관습이 되어 버린 것을 봅니다. 어떻게 하면 성약을 지켜 증인으로서 굳건히 생활하면서도 이 사람들이 불쾌해 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13

신성모독, 동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 이것들은 후기 성도들이 생활하면서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 어떻게 진리와 관용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의무를 조화롭게 이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들입니다.

먼저, 자녀를 가르치는 일과 같은 개인적인 실천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행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황에 때로 상호 대립되는 진리와 관용의 요구를 적용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관대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진리의 요구에 따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계명과 성약을 지켜야 하며, 잘못에 빠질 때에는 회개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자신이 선지자로 지지받은 연차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젊은 친구 여러분, 강해지십시오. …… 오늘날, 죄의 얼굴은 종종 관용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 이면에는 마음의 고통과 불행, 아픔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으며, 아무리 그럴싸해 보이는 위장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범법의 특성은 항상 똑같습니다. 소위 친구라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을 하도록 강요할 때, 비록 혼자일지언정, 여러분은 의를 수호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4

우리는 자녀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부름 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원리를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의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론 가르침은 오직 상대방의 선택의지를 통해서만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가르침은 늘 사랑과 인내와 설득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신성모독 발언을 하는 사람이나,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는 사람, 또는 안식일을 합당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과 개인적인 관계를 쌓을 때 우리가 이행해야 할 진리와 관용의 의무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대화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용의 의무란 이와 같은 행위들, 또는 진리에서 벗어난 다른 행동들 가운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증오하는 말을 내뱉는다거나 불친절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의무는 우리에게 몇 가지 요구 사항과 축복을 제시합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우리가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할]”(에베소서 4:25) 때, 또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에베소서 4:15) 할 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우리 편에 서고 주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영을 보내사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민감한 문제에 부딪힐 때 우리는 먼저 그들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참되다고 알고 있는 것을 말할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 말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것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를 앞에서 신성모독을 계속 일삼는다면, 그런 말이 듣기 불편하다는 의사를 표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가 없는 곳에서 신성모독을 하는 경우에는 꼭 그들에게 맞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동거는 상황이 어떻든 후기 성도가 해서는 안 되는 심각한 죄입니다. 주위에 동거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것은 사적인 일일 수도 있고 우리가 용인하고 돌봐주거나 편의를 봐주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진리와 관용의 균형을 유지하려 할 때, 그 행위가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때에는 관용을 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동거 행위에 직접 관여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진리에 대한 의무로 우리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즉, 그것이 사적인 일일 때는 심각한 죄라 해도 무시할 수 있지만, 당사자들이 동거할 수 있도록 집을 제공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원조를 부탁받거나 그러한 관계를 암묵적으로라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안식일 준수에 대해, 아시다시피 후기 성도들은 많은 기독교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이 안식일에 밀집된 쇼핑몰과 기타 상업 활동 때문에 곤란을 겪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성찬을 취하는 일을 비롯해 안식일을 지켜야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한 주 동안 더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다는 우리의 믿음을 설명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후에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에게, 비록 이런 기본적인 믿음들에 대해 다르게 정의하고 있더라도 하나님과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을 표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분쟁을 피해야 하며(제3니파이 11:29~30 참조) 우리의 모범과 전도가 “부드럽고 온유한 경고의 음성이”(교리와 성약 38:41) 되어야 한다는 구주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할 때, 이웃이나 동료가 그런 일에 관여했다고 해서 그 궁극적 결과를 지레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은 주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주님조차도 간음한 여인에 대해 현세에서의 최종적 심판을 삼가셨습니다. 이처럼 관용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를 삼가야 합니다.

정부 조치를 구할 때 진리와 관용의 네 가지 원리

우리 자신의 행위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진리와 관용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좀 다른 그리고 더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믿는 자들이 공개 토론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토대로 법의 제정과 집행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때는 다른 원리들을 적용해야 합니다.

아직 젊은 나이인 여러분에게 제가 왜 입법 기관에서 하는 일과 같은 정부 조치를 구할 때 따라야 할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건 더 나이 많은 교회 역원들이 다루어야 할 문제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러한 원리를 청년인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 있고 미래의 지도자이며, 이런 문제들에 대해 직접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공개 토론 석상에서 우리의 노력이 진리와 관용 사이에 확립한 균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초해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하도록 만들거나 영향을 미칠 법률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도 될지 혹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지 하는 문제는 몇 분 되지 않는 제 말씀의 결론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거대한 주제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노력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제한하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공개 토론 석상에서 언급할 때에는 주님께 영감을 구하여 어떤 원리들이 법이나 행정 조치로 장려되도록 해야 할지 신중하고 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법이나 행정 조치를 이용해 믿는 자들에게만 특유한 믿음을 장려하는 일, 예를 들어 예배 활동을 법으로 시행한다든지 하는 일은 혹 암묵적으로라고 해도 삼가야 합니다. 믿는 자들은 공중 보건, 치안, 도덕 등에 관련된 법률로 단순히 그들의 믿음을 실천하게 만드는 것은 삼가야 하지만, 더 넓은 의미의 원리를 따르기 위한 것이라면 정부의 조치를 추구하는 것이 가당할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믿는 자들은 신앙의 수호자로서 종교적 자유를 보전하기 위한 법을 추구할 수 있으며 추구해야 합니다. 도덕적 상대주의라는 지배적 물결과 더불어 미국은 전반적으로 종교에 대한 대중의 신념이 불안하게 쇠퇴하는 판국을 맞고 있습니다. 한때 미국인에게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던 종교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종교가 대중의 삶의 일부로서 스스로 그 타당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향력 있는 목소리들은 심지어 종교 원리를 실천하고 전파할 권리를 비롯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어느 정도까지 헌법으로 보호해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확립하신 절대자를 믿는 우리가 단합하여 오랫동안 이어져 온 헌법상의 종교 활동의 권리를 주장하고, 공적 문제에 관해 우리의 의식을 투표로 발언하고, 선거에 참여하고 공개 토론회와 정의의 전당에서 견해를 피력해야 할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 일을 하는 중에 천사들이 우리 편에 설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어떠한 믿음이든 우리의 종교적 믿음을 옹호하고 실천할 자유를 굳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지향하며, 우리는 우리의 특유한 믿음에 의거해 그것이 필수적인 일이라면, 우리 각각의 특유한 길을 추구할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이 의로운 대의를 추구할 때 하늘의 인도를 받아 우리가 하는 말들은 경쾌한 소리로 울려 많은 이들의 가슴에 심어질 것입니다.

둘째, 믿는 자들이 공개 토론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려 할 때, 그 방법과 변론에 있어 같은 믿음을 공유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견해와 입장에 대해 항상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를 분열시키는 극단주의자에게 동조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늘 사랑을 지니고 말하며 대립되는 입장에 대해 인내심과 이해심과 동정심을 보여야 합니다. 기독교 믿음을 지닌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누가복음 10:27), 용서하며(마태복음 18:21~35),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마태복음 5:44)는 명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는 구주의 가르침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믿는 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주장과 입장을 표명할 때 다원주의 사회의 민주적 절차에서 필수 요소인 질서 정연한 토론과 협의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시민 사회를 보전하기 위해 필수적인 시민 의식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셋째,, 믿는 자들은 도덕성을 법률화하려 하고 있다는 귀에 익은 비난 때문에 단념해서는 안 됩니다. 법률의 많은 영역이 유대교와 기독교적 도덕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수세기 동안 그래 왔습니다. 우리 시민 사회는 도덕성에 근간을 두며 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존 애덤스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헌법은 오직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을 위해 제정되었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다스리기에는 전적으로 부적합하다.”15

넷째, 믿는 자들은 자신의 종교가 요구하는 일들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공적 조항이나 정책을 유지시키는 법률을 추구하는 일에서 위축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조항과 정책들은 공중 보건, 치안, 시민 윤리에도 유익합니다. 예를 들어 형법 중 많은 부분과 가족법 중 일부가 종교적 믿음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런 법들은 민주 사회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그 타당성을 입증해 왔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이 다수를 이루는 곳에서는 항상 소수의 의견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 후기 성도들은 때때로 독선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보이지 않는다며 비난을 받습니다. 특히 우리가 다수를 이룰 때 또는 다른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우리가 우리 믿음에 근거해 그들을 반대할 때 그런 경향이 큰 것 같습니다. 분명 후기 성도들은 우리의 관점을 설명하고 추구하는 데 있어, 그리고 우리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때 그것을 행사하는 데 있어 더 현명해지고 능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와 관용이라는 양면의 동전에 담긴 기본 원리입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이 두 가지 짝을 이루는 미덕을 실천하는 데 훌륭한 모범을 보여 왔습니다. 그분은 평생에 걸쳐 타 종교와 공통된 유익에 관해 협력하고 종파의 경계 없이 기독교적 우정과 관심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른 종교의 회원들과 지도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협력하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16

마지막으로, 진리와 관용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지역 사회에서 타 종교 사람들에게 다가갑시다. 선한 이웃, 친절하고 관대하며 자애로운 이웃이 됩시다. 지역 사회에서 하는 훌륭한 활동에 참여합시다. 심각한 도덕적 문제가 관련되어 있어 특정 원리에 대해 우리 뜻을 굽힐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며, 또 분명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무례하지 않게, 공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진지함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 인격의 문제보다는 원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17

아는 은사와 믿는 은사

다음과 같은 약속과 간증을 남기며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선지자의 역할 중 하나가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파수꾼”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에스겔 3:17; 33:7 참조) 주님께서는 현대의 시온을 위해 계시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추가하셨습니다. “망대 위[에] 파수꾼[을 세우라.]”, 그 파수꾼이 “원수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원수를 [볼 것이며,] 미리 경고하여 “멸하는 자의 손에서 나의 포도원을 구할 수 있[으리라.]”(교리와 성약 101:45, 54)

저는 그 파수꾼 가운데 한 명으로서 영이 명하신 주제에 관해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이 메시지가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의심이 가신다거나 이 원리들을 어떻게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신다면, 제가 인도를 받은 동일한 원천에서 인도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무신론자들로부터 널리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이보다 더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저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저의 지식을 선포합니다! 만물이 그분의 존재를 증거하며, 그분의 종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선포합니다. 현대의 계시에 따르면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아는 은사가 주어지며,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말을 믿게 해 주십니다.(교리와 성약 46:13~14) 그것을 아는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제 말을 믿으라고 권유합니다.

저는 포도원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분은 우리 구주이시며,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손을 내밀어 그분에게서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그분이 주는 화평을 받으라고 권유하십니다.(교리와 성약 19:23 참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1:28~30)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참조 보이기

  1.   1.

    “말해 보아라 무엇이 진리냐?” 찬송가, 1557장

  2.   2.

    Joseph F. Smith, Gospel Doctrine, 5th ed. (1939), 1.

  3.   3.

    “Anarchy in the UK,” The Economist, Aug. 13, 2011, 14; Patrick Jonsson, “Is the US a Nation of Liars?”참조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July 25, 2011, 20.

  4.   4.

    Stephen L. Carter, The Culture of Disbelief: How American Law and Politics Trivialize Religious Devotion (1993), 225.

  5.   5.

    “Campus Confidential,” The Wall Street Journal, July 5, 2002, W11.

  6.   6.

    예: John Paul II: The Encyclicals in Everyday Language, 3rd ed., ed. Joseph G. Donders (2005), 210–13; Harold Kushner, Who Needs God (1989), 83–84 참조.

  7.   7.

    “말해 보아라 무엇이 진리냐?” 찬송가, 155장

  8.   8.

    Gordon B. Hinckley, Teachings of Gordon B. Hinckley (1997), 665.

  9.   9.

    Alwi Shihab, Building Bridges to Harmony Through Understanding(2006년 10월 10일,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전한 포럼 연설), http://speeches.byu.edu/reader/reader.php?id=11324.

  10.   10.

    Eric Rassbach, quoted in William McGurn, “Religion and the Cult of Tolerance,” The Wall Street Journal, Aug. 16, 2011, A11.

  11.   11.

    댈린 에이치 옥스에게 온 편지, 1998년 5월 14일자.

  12.   12.

    Boyd K. Packer, “Be Not Afraid”(2008년 11월 16일에 옥든 종교 교육원에서 전한 말씀), 5; 또한 Bruce D. Porter, “Defending the Family in a Troubled World,” Ensign, June 2011, 12–18 참조.

  13.   13.

    댈린 에이치 옥스에게 온 편지, 1987년 12월 22일자.

  14.   14.

    토마스에스 몬슨,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65쪽.

  15.   15.

    John Adams, from an address to officers of the militia of Massachusetts, Oct. 11, 1798, The Works of John Adams, Second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ed. Charles Francis Adams, 10 vols. (1856), 9:229.

  16.   16.

    Heidi S. Swinton, To the Rescue: The Biography of Thomas S. Monson (2010), 특히 25장과 28장 및 462, 463쪽 참조.

  17.   17.

    Gordon B. Hinckley, Teachings of Gordon B. Hinckley, 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