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부르시네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

십이사도 정원회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

어느 곳에 계시든 이 크고 훌륭한 세계적인 교회에 속하여 이 영적 모임 방송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제 고향에 있는, 이곳 딕시 주립 대학에 모인 여러분을 비롯해서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바벨론을 떠나라는 많은 요청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도록 “애통하는 이스라엘”을 개회 찬송으로 부르자고 제가 요청했습니다. 이 찬송가는 회복을 노래한 고전 명곡으로, 오늘 밤 제가 전할 말씀에 대한 골격을 이룹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 이스라엘 장로는”을 이어서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오 바빌론 오 바빌론 이제 떠나서 에브라임의 땅을 찾아가겠네”라고 전 세계 선교사들이 우렁차게 노래하는 모습을 좋아합니다.1 이 두 찬송가에 담긴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곳으로 언제나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부르시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애통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부르시네
바빌론도 무너지고
모든 탑도 헐리리
주의 진노 있기 전에
시온에 모두 오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시온에 모두 오라
찬송 소리 울리리니2

사실 이런 일은 온 시대를 통해 반복되어온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세상이 사악하거나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세속화되거나 또는 이방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도덕적 표준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파괴될 때면, 성약의 자녀들은 광야로 도피하여 시온을 다시 세우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약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문자 그대로 바벨론에 속해 있던 갈대아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피하여 우리가 지금은 성지라고 부르는 가나안으로 와서 충실한 생활을 해나갔습니다.3 여러 세대가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이제는 번성하여 이스라엘인이라는 민족을 형성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은 시온을 잃어버리고 머나먼 이교도의 나라 애굽에서 속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4 따라서 모세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약속의 자녀들을 이끌고 다시 광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누룩으로 떡 반죽을 부풀릴 겨를도 없이 한밤중에 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길을 가면서 “구조자의 소리 듣뇨”라고 노래했을 것입니다.5

또 여러 세기가 지나지 않아 이들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리하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이끄는 한 가족이 정든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슬프게도 그 이유는 바벨론에 정복당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6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대륙으로 가서 새로운 개념의 시온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7 그렇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렛인이라고 하는 그들의 선조들도 한때는 그들과 같은 처지였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8

언급했듯이 이 방송은 날로 성장하는 국제적인 교회로 전파되는 세계적인 방송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배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온 한 무리가 아메리카 대륙에 살기 시작했다는 점은 복음의 회복을 기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미국에 온 청교도 정착민들 중 한 저명한 학자는 그 경험을 광야로 가는 기독교인들의 “사명”, 즉 구세계의 불경스런 상황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천국의 방식을 새로운 땅에서 구현하려는 현대 이스라엘인들의 노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9

오늘 밤 저는 과거에 있었던 탈출, 즉 오늘 밤 우리가 부른 찬송가에 실제로 언급되어 있는 탈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탈출의 주인공은 우리 선지자들의 인도에 따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이끈 우리 교회입니다. 뉴욕 주에서 시작하여 펜실베이니아 주, 오하이오 주, 미주리 주까지 쫓기다가 마침내 일리노이 주에서 살해당한 조셉 스미스의 경우에서 우리는 다시 은둔처를 찾아 나선 이스라엘 자손이 후기에 재현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모세로 칭하는 브리검 영이 성도들을 이끌고 산악 지대에 있는 계곡으로 왔습니다. 성도들은 지친 발걸음을 떼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준비한
그 땅에 가리니
그 누구도 해하지 못하리
성도들 복된 곳10

시온. 약속의 땅. 새 예루살렘. 그곳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는 찾을 것입니다. 4,000년이 넘게 성약의 역사가 이어지면서 탈출하고 새로운 곳을 찾고, 도망하고 정착하고, 바벨론을 떠나고 시온의 방벽을 쌓는 일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오늘 밤까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랬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시온을 건설하도록 요청받았습니다

모든 경륜의 시대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시대로 우리가 사는 때가 찬 경륜의 시대에 나타나는 많은 독특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경륜의 시대에 관해 정말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매우 빠르게 변하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바뀐 점은 하나님의 교회가 결코 다시는 도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떠나고, 가나안을 떠나고, 예루살렘을 떠나고, 영국을 떠나고, 커틀랜드를 떠나고, 나부를 떠나고,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일이 결코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브리검 영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프라이팬 밖의 불 속으로 내던져졌고, 그런 후 불 속에서 나와 바닥 한가운데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곳에 있으며, 여기에서 계속 머무를 것입니다.”11

물론 이 말은 전체적으로 봐서 비단 솔트레이크밸리나 와사치 프론트를 콕 집어서 한 말이라기 보다는 세계 곳곳의 교회 회원들에게 주는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경륜의 시대인 이 후기에 우리는 도망치지 않아도 될 만큼 성장할 것입니다.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 사이에서 영구히 자리 잡고 우리 가족과 토대를 굳건히 할 만큼 성장할 것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시온이 있을 것입니다. 후기에 일어나는 이런 커다란 변화에 따라 우리는 이제 시온을 우리가 살려고 하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방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 가지 교훈을 얻게 된 세 가지 사건

이런 새로운 개념을 좀 더 정리하기 위해 홀런드 자매와 제가 비교적 근래에 했던 세 가지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시간이 더 있다면 더 많은 예를 들 수도 있으며,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예를 들겠습니다. 젊은 귀환 선교사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그는 유타 주 대학농구 선발팀의 선수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젊은이였고 농구 실력도 꽤 좋았지만 자신이 바라는 만큼 잘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특기와 기술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 팀에게 꼭 필요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감독과 동료들이 도와주고 성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 친구는 자신이 좀 더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운이 좋게도 새로운 학교에서 일이 잘 풀려나갔고, 그 친구는 이내 선발 출전 선수가 되었습니다. 다음에 어떤 일이 전개되었을까요? (이런 시합이 있기 수년 전에 이미 확정된) 일정에 따라 이 젊은이는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가 델타 센터에서 예전 소속 팀을 상대로 경기를 벌여야 했습니다.

오늘까지도 저를 안타깝게 하는 일이 그 경기 중에 일어났는데,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예사롭지 않은 순간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후기 성도이며 귀환 선교사이자, 신혼 살림에 십일조를 내며 장로 정원회에서 봉사하고,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청소년들에게 봉사활동도 하고,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이 젊은이에게 그날 밤 아주 심한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 젊은이와 그 아내, 그의 가족들에게 관중들이 퍼부은 말들은 그가 어떤 운동을 하든 또 어느 대학교에 다니든, 그가 개인적으로 자신에 관해 어떤 결정을 했든 관계 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가히 사람이 들을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농구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이 원정팀의 감독은 훌륭한 경기를 펼친 후 그 친구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이 고장 출신인 자네가 잘나가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들이 자네 고향 사람들이고 자네 친구들이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악몽적인 것은 그 감독이 완전히 혼란스러워하며 “저 사람들이 대부분 자네가 다니는 교회의 회원들이 아니던가?”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 스테이크에서 독신 성인을 위한 영적 모임에 연사로 초대받았습니다. 만 18세 이상의 독신들이 참석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스테이크 센터의 뒷문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한 30대 여성도 거의 동시에 그 건물로 들어왔습니다. 예배당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그 여성은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녀는 문신도 하고 귀걸이와 코걸이를 요란하게 하고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을 고슴도치처럼 세우고, 치마는 아주 짧고 웃옷은 매우 천박했습니다.

세 가지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여성이 비회원이고 복음을 통해 삶에서 필요한 평안과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노력으로 누군가가 주님의 인도 아래 권유했거나 동행하여 이 영적 모임을 찾아온 방황하는 영혼일까? 아니면 교회 회원인데 교회가 회원들에게 바라고 권장하는 표준에서 멀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떤 끈이 남아 있어서 오늘 밤 교회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이 스테이크의 상호부조회 회장님이신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세 번째 경우는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몇 달 전에 홀런드 자매와 저는 미주리 캔자스시티 성전 헌납식에 참석하는 동안, 아이작 프리스톤 형제님의 집에 묵었습니다. 그는 경찰관으로, 미주리 리버티 스테이크에서 훌륭한 대제사였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자신이 어느 날 늦은 저녁에 그 도시의 아주 위험한 지역에서 접수된 신고를 조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대마초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그가 도착했을 때 한 여성과 몇몇 남성이 함께 술을 마시며 불경스런 말을 내뱉고 있었으며, 어른들이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는 가운데 두 살에서 여덟 살에 이르는 어린아이 다섯 명이 다른 방에서 침대나 매트리스, 베개 등 아무런 침구도 없는 더러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프리스톤 형제님은 먹을 것을 조금이나마 찾아보려고 주방 찬장과 냉장고를 여기저기 들여다 보았으나 정말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뒷마당에서 짖고 있는 개가 그 어린이들보다 먹을 것이 더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프리스톤 형제님은 아이들의 엄마 침실에서 시트도 없는 매트리스를 하나 찾았는데, 그 집에 있는 유일한 매트리스였습니다. 그는 여기저기 뒤져서 차마 침대 시트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을 찾아서 매트리스에 씌우고는 다섯 아이를 그 형편없는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는 눈에 눈물이 고인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이 아이들을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고, 아이들에게 잘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가자 한 여섯 살쯤 되는 아이가 침대에서 뛰어 내려 그에게로 달려오더니 손을 잡고는 “제발 저를 입양해 주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는 눈물을 머금으며 아이를 다시 침대에 눕혀 주었고, 약물에 취한 아이들 엄마를 발견했을 때는 같이 있던 남자들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습니다. 프리스톤 형제는 그 여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 제가 다시 와서 이 문으로 들어올 때는 어떤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약속합니다.”12

이 세 가지 이야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비교적 근래에 홀런드 자매와 제게 일어난 일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들은 사소하고, 서로 매우 다르며, 실제 생활에서 일어난 바벨론에 관한 예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농구장에서 일어난 부끄럽고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며, 둘째 이야기는 우리와 다르게 생활하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히는 개인적 차원의 어려움으로 문화적 취향과 관련이 있으며, 셋째 이야기는 법률적 문제와 가정사가 관련되어 있는 아주 크고 심각한 문제로 너무 복잡해서 우리 개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벅찬 문제입니다.

이런 세 가지 어려움을 제시하면서 저는 성적 범법이나 물리적 폭력, 외설물 중독과 같은 선정적인 사례들이 제가 거론한 사례들보다 여러분과 더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그런 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잘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교훈 1: “문을 들어설 때 여러분의 종교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먼저, 농구장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경기 다음 날, 사람들의 관전평이 있었고 그 사건에 대해 사죄하라는 요청에 한 젊은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일학교가 아니라 농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관중들의 함성을 견뎌낼 수 없다면 운동 경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경기를 보려고 상당히 많은 돈을 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기장 문을 들어설 때는 우리 종교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경기장 문을 들어설 때 우리 종교를 잊어버립니까 ?” 21세기에 시온을 세우기 위한 첫 번째 교훈은 “문을 들어설 때 여러분의 종교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말입니다.

젊은 친구 여러분, 그런 제자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선지자 앨마가 가르쳤듯이, 교회 청녀들이 매주 청녀 주제로 암송하듯이, 우리는 필요한 때에만 몇몇 장소에서 또는 우리 팀이 크게 이기고 있을 때에 만이 아닌 “어느 때에나 무슨 일에나, [여러분이] 있게 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13 합니다.

“문을 들어설 때는 종교를 잊어버려라!” 저는 이 말에 몹시 화가 납니다.

교훈 2: 애정을 보이십시오. 하지만 계명에는 충실하십시오.

여기에 또 하나의 교훈이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좀 더 다루겠습니다. 시온을 세우는 것에 관해 오늘 밤에 전하는 두 번째 교훈은 (적어도 우리가 이런 경우에 의로운 것이라고 말하기에) 저는 의로운 분노를 느끼면서 이 젊은 농구 팬에 대해 제가 책망한 행동, 다시 말해 흥분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자제력을 잃고 고함치며, 멱살이라도 잡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문에 들어설 때 제 종교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21세기에 누군가는 이런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종교에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도덕적으로 하찮게 행동하는 바보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이 평온하고 인생이 잘 나가고 매사가 잘 풀릴 때는 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쉽습니다. 시험은 실제로 시련이나 유혹이 있을 때, 힘들고 피곤할 때, 분노하고 두려울 때, 또는 진짜 범법할 가능성이 있을 때 옵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충실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고결성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14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대히 대하는 것은 세상의 구주에 비해 아직 완전하지 못한 사람이 하기를 바라게 될 마지막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야 하며, 강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도발, 문제에 처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문에 들어설 때 자신의 종교를 잊지” 않습니다.

다음은 무지개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화려한 고리를 많이 달고 있던 그 여성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그 젊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관계없이, 우리의 종교적 믿음과 복음에 대한 결심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대응하는 방식은 상황을 악화시키기 보다는 개선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 그 여성에게 상처를 주어 우리 죄가 더 커지는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도 없고, 표준도 없고, 신성하게 규정된 “하라는 계명”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생활 속에서 완전히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런 표준에 따라 생활하고 “하라는 계명”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의로운 방법으로, 그것도 최선을 다해 구주께서 생활하신 방식과 옹호하신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진리를 가르치고, 죄인을 용서하고,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등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일을 올바른 방법으로 할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사입니다.

유별난 옷과 차림을 한 낯선 여성을 보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녀가 하나님의 딸이며 또 영원한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녀가 이곳 지상에서 누군가의 딸이며, 어쩌면 여건만 바뀌었다면 내 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그녀가 교회 모임을 피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교회에 있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도우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용히 이런 기도를 합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 최종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 상황과 그녀를 개선하게 될까요? 이런 질문을 하고 구주께서 하실 만한 일을 하려고 실제로 노력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15는 말씀의 참된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의로운 판단을 하십시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저는 우리가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서 돌아오도록 도와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대해서도 막중한 책임이 있으며, 그것이 목자의 바람이자 염원이라는 점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립니다. 양우리가 있고, 우리 모두는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에 있으면 안전과 축복이 따릅니다. 젊은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교회는 사회적 친선이나 정치적 편의나 그 밖의 어떤 것에 따라 교회 교리를 바꾸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가 힘들어하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을 돕기 위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은 계시된 진리라는 안전한 발판뿐입니다. 우리 기독교 정신의 기본적 특성과 요건인 동정심과 사랑이 계명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해석되는 일이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 훌륭한 조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을 모두 말해야 할 책임은 없지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게 할 책임은 있습니다.”16

의로운 판단을 내리십시오

동정심을 지니면서 또한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떤 것도 판단해서는 안 되고, 어떤 형태의 가치 판단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오해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아마도 여러분 연령이나 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서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17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판단해야 하고 또 판단할 책임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면에서 서로 도와야 합니다. 저는 구주께서 하신 그 말씀이 하나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에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 이론에서 강력히 주장하듯이 영원히 참된 것이나 특히 성스러운 것은 결국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쟁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판단을 반영하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훌륭하게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님은 이런 종류의 판단을 “중간 판단”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 종종 이런 판단을 해야 하며, 이런 판단은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사실을 아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최종 판단”과는 다릅니다.18 (앞서 인용한 성구에서 구주께서는 이런 중간 판단이 “의로운 판단”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자칭 의로운 판단이 아니며, 이 둘은 매우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매일 자녀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판단을 잘 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나, 차들이 쌩쌩 달리는 거리로 아이가 뛰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부모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이 좀 더 자랐을 때 밤 몇 시에 귀가하는지, 자녀 친구들이 어떤 도덕 표준과 행동 표준을 지키는지, 몇 살에 데이트해야 하는지, 약물 또는 외설물을 접하거나 성적 범법을 저지르는지 등에 관심을 갖는 부모가 비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입장을 취하며, 우리 가치관을 재차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간 결정”을 항시 내리고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일부 문제들과 율법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릅니다

민주 사회에서 복잡한 사회적 쟁점과 관련된 상황에 직면하면 대처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입장에 대해 또는 교회가 취했거나 정한 정책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런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우리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생활하거나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판단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믿음을 강요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왜 어떤 원리를 지켜야 하고 어떤 죄를 반대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관련된 여러 쟁점과 법률이 비단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 결과 면에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경전에 “너희에게 율법을 주신 이를 노하시게 하지 않기 위함이라”19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중대한 도덕적 율법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요점을 정리하기 위해 조금 덜 중요한 율법을 예로 들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청소년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난 이제 운전할 수 있어요. 신호등이 빨간색일 때 차를 세워야 해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판단을 내려서 빨간색 신호등일 때 다른 모든 사람에게 차를 세우도록 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동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택의지가 있지 않나요? 그들은 반드시 우리처럼 행동해야만 하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들이 빨간색 신호등에서 모두 차를 세우기를 바라는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범법하거나 또는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하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도덕적 선택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친구 여러분, 이 세상에는 다양한 믿음이 있고, 모든 사람에게는 도덕적 선택의지가 있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이런 주제에 관해 침묵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는 그런 것에 대해 대중의 합의가 있는 경우에만 계명이 중요하다는 듯이 행동할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더 이상 도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특권을 허용하는 법률과 상황과 환경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 거하되 바벨론에 속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우리가 도망칠 수는 없고 조심스럽게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과 그분이 주신 율법에 따라 도덕적 입장을 취하되 이해심과 큰 사랑을 지니고 온정 어린 마음으로 행하면서 우리 능력과 고결성을 몸소 보여주는 것보다 중요하고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죄와 죄인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구별하거나 딱 부러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 별로 없을 정도이지만 우리는 애정을 기울여 정확하게 구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제 말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생활하는 세상에서 그런 힘을 발휘하고, 그런 용기를 보이고, 그런 동정심을 보일 기회를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의 머리 형태나 코걸이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훈 3: 지역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기 위해 복음 가치를 활용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캔자스시티에서 있었던 딱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중에는 경찰관이나 사회단체 요원이나 사법부 판사가 많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의 복지와 넓은 의미에서 지역 사회의 도덕적 안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쿠엔틴 엘 쿡 장로님은 2년 전 연차 대회에서 모든 말씀 시간을 이 주제에 할애했습니다. 장로님은 우리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보호하는 동시에 지역 사회를 보호하는 일에서 빛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갈수록 사악해져 가는 세상에서 종교 신념에 기초한 가치관에 대해 대중이 서로 이야기하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

종교적 신념은 빛과 지식과 지혜의 보고[이며]. … 놀라운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합니다.”20

우리가 지역 사회와 국가에 복음의 축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도덕적 행위를 법률로 집행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시행할 아이작 프리스톤과 같은 경찰관은 많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음식이나 옷도 없이 그 집에 있던 아이들도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나이가 더 많아서 죄과도 더 크고 책임도 더 많이 져야 할 그 어머니도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식적이고 적법한 방법으로 더 지속적인 사랑이 필요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때와 장소에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책임하고 한심하게 행동하더라도, 우리는 문에 들어설 때 우리 종교를 잊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개인 또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밤이 지나도 우리의 이웃들과 도시와 나라에는 빈곤과 무지와 범법, 실업과 학대, 폭력과 번민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오래된 속담처럼, 뭔가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스라엘 자녀들은 이 시대에 바벨론에서 도피하지 않고 바벨론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순진하거나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 종교를 폭넓고 확실하게 실천하며 모든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서로와 가족을 돕고, 이웃을 축복하고, 또 자라나는 세대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도록 삶을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즉시 흰 셔츠와 이름표를 떠올릴까 염려하여 선교사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에만 국한하지 말고 넓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전임 선교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복음을 나눠야 할 필요성은 아주 큽니다. 후기 성도는 떡에 넣은 누룩, 결코 맛을 잃지 않는 소금, 말 아래에 두지 않고 언덕 위에 세워진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18~30세 사이입니다. 여러분 연령대는 인생에서 지인들이 복음을 접하게 되면 받아들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시기입니다. 교회에서 실시한 여러 조사에서도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복음을 나눕시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하고 올바르게 말하며 관대한 말 행동으로 다가간다면, 구주께서 그분의 일을 의 안에서 단축시키시고 이 위대한 마지막 경륜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씀하시며 영광 중에 오셔서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해 복음대로 생활하고, 우리 생활과 교회와 사회를 최선을 다해 발전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저는 복음대로 생활하는 모습을 정말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신앙을 널리 전하고 선행을 하는 모습으로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모두 아시므로 저에게 “제프리” 하고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너의 직함이 아니라 너의 삶, 너의 생활 방식과 네가 지키려고 노력하는 표준으로 너를 인정한단다. 너의 마음은 고결하구나. 너는 네 자신이 먼저 나은 사람이 되고, 그런 다음에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온정 어린 방법으로 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고, 내 복음을 수호하여 무엇보다도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 죄나 다른 사람의 여건 때문에 네가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지만 네가 정직하게 노력했다는 것을 믿는단다. 나는 정말로 네가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사랑했다고 믿는단다.”

저는 이 필멸의 삶에서 무엇보다도 그런 일이 언젠가는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큰 면에서나 작은 면에서나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생활하고, 그런 다음 우리와는 다르게 보이거나 옷차림을 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또한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지역 사회에서 봉사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도록 돕기 위해 저는 오늘 밤 제 간증과 함께 사도의 축복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해 드립니다. 제가 받은 신권 권능과 직권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모든 것이 빨라지고 점점 더 많은 것이 요구되는 이 위대한 마지막 경륜의 시대에 그분께서 여러분을 필요로 하신다는 점을 여러분이 알도록 축복합니다. 사도의 권세로 여러분의 기도와 의로움이 응답되고, 여러분의 개인적 두려움이 사라지며, 여러분의 등과 어깨와 마음이 강해져서 거기에 놓인 짐을 감당하도록 축복합니다. 이 후기에 여러분이 계시는 모든 곳에서 시온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손에 든 도구로써 자신을 헌신하며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도록 축복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집단에 속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마땅히 다가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축복합니다. 또한 구주의 친구가 되어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고 그분의 왕국에서 신임을 얻도록 축복합니다.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의 종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분께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실 정도로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 은사와 관련해서 이 후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가 그 부름에 응답하여 복음대로 생활하고 시온을 세우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우리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고 더 거룩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참된 제자가 되기를 간구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힘 거룩함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이 사업은 신성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충만하고 위대하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가장 작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무한하다는 점을 간증드립니다. 오늘 밤과 내일과 영원토록 이런 행복과 거룩함을 소망하도록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 2012 Intellectual Reserve, Inc. 판권 소유. 영어 승인: 5/12. 번역 승인: 5/12. Israel, Israel, God Is Calling의 번역. Korean. PD50039052 320

참조 보이기

  1.  

    1 “너 이스라엘 장로는”, 찬송가 200장.

  2.  

    2 “애통하는 이스라엘”, 찬송가 10장.

  3.  

    3  아브라함서 2:3 참조.

  4.  

    4  출애굽기 1:7~14 참조.

  5.  

    5 “애통하는 이스라엘”, 찬송가 10장.

  6.  

    6  니파이전서 2:2 참조.

  7.  

    7  니파이전서 18:22~24 참조.

  8.  

    8  이더서 6:5~13 참조.

  9.  

    9 Perry Miller, Errand into the Wilderness (1984), 2–3쪽 참조.

  10.  

    10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 찬송가 16장.

  11.  

    11 Brigham Young, quoted in James S. Brown, Life of a Pioneer (1971), 121.

  12.  

    12 Isaac Freestone, experience shared with the author on May 5, 2012.

  13.  

    13  모사이야서 18:9.

  14.  

    14  누가복음 23:34.

  15.  

    15  요한복음 7:24.

  16.  

    16 George MacDonald, The Unspoken Sermons (2011), 264.

  17.  

    17  마태복음 7:6.

  18.  

    18 Dallin H. Oaks, “‘Judge Not’ and Judging,” Ensign, Aug. 1999, 6–13 참조.

  19.  

    19  교리와 성약 64:13.

  20.  

    20 쿠엔틴 엘 쿡, “빛이 있으라”, 리아호나, 2010년 11월호, 28~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