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교회의 설계도는 무엇일까요?

교회 교육 기구 청년 독신 성인을 위한 영적 모임 • 2014년 1월 12일 • 브리검 영 대학교


 

오늘 저녁, 이 교회의 장래 지도자와 부모가 될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이 그런 역할을 맡게 될 것이기에, 저는 이 교회의 미래가 밝고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여러분이 언젠가 감리하게 될 이 교회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리와 성약 1편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분명하고도 중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온 지면 위에서 유일한 참되고 살아 있는 교회[이니라.]”(교리와 성약 1:30)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다른 교회에는 진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진리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교회에서는 선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많은 선을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교회가 여태까지 이 경륜의 시대에 계시된 모든 진리를 갖고 있는 유일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즉, 승영하는 데 필요한 의식들이 있는 유일한 교회이며, 그러한 의식들을 집행하고 거룩한 효력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신권이 있는 유일한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단언할 만한 어떤 증거가 우리에게 있을까요?

여러 해 전,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더 큰 집이 필요하게 된 저희 가족은 집을 지을 땅 한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커가는 자녀들의 필요 사항을 가장 잘 충족시켜줄 설계도를 작성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을 들였습니다. 제 아내는 가족실과 거실을 터서 친척들과 청소년 활동용으로 개방할 수 있도록 그 사이에 설치할 접이식 문을 설계했습니다. 차고에 약간의 여유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 자녀들이 건전한 활동들을 할 수 있는 활동실을 설계했습니다. 차고 뒤쪽에는 식품과 그 밖의 저장용품을 넣을 수 있는 작은 저장실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설계 요소들이 짜여서 하나의 설계도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다음, 그 계획에 따라 집이 지어졌습니다.

집이 지어지는 동안, 우리는 이따금 건축자에게 변경 요청을 했고, 그렇게 해서 설계도가 수정되었습니다. 마침내 완성된 집은 우리가 이따금 변경한 설계도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희 집 설계도를 가지고 세상에 있는 집집마다 다니며 그 설계도와 비교해 본다면, 과연 몇 집이나 그 설계도와 정확히 일치하겠습니까? 저희 집만 유일하게 일치할 것입니다. 물론, 방 하나가 크기가 같다거나, 창문 몇 개가 비슷하다거나 여기저기 이따금 닮은 점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토대, 방, 지붕 모양 등을 하나하나 비교해서 설계도대로 정확히 일치하는 집은 저희 집이 유일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영적 필요 사항을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집을 한 채 지으셨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영적 설계도는 신약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따금 구주께서는 그 설계도에 “변경 요청”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영적 변경 요청은 계시의 형태로 왔습니다. 예를 들어, 구주께서는 처음에 사도들에게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5~6 참조) 그러나 구주께서 승천하신 후에 그분은 일종의 계시인 시현을 통해 베드로에게 이제는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는 영적 변경 요청을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0장 참조) 베드로의 이 경험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최소한 두 가지의 중요한 통치 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설계도가 변경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계시가 있을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러한 계시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변자인 선지자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교회는 성스러운 계시와 위계질서에 따라 통치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찾아내고자 한다면, 그는 신약전서에 나오는 영적 설계도를 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교 교회에 대해 조직, 가르침, 의식, 열매, 계시, 등을 하나하나 비교해 가며 그 설계도와 일치하는 교회를 찾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한두 가지 중복되는 가르침, 똑같은 의식 하나, 명칭이 같은 몇몇 직분 등과 같이 몇 가지 사항이 유사한 몇몇 교회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모든 필수적인 면에서 그 설계도에 일치하는 교회는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주장을 검증해 보겠습니다.

그 설계도의 첫 페이지를 펴서 거기에 계시된 그리스도 교회의 “조직”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첫째, 그리스도 교회의 토대는 사도와 선지자였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몇몇 신회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들이 이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으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에베소서 2:20, 강조체 추가)고 말했습니다.

당시 사도들은 십이사도 정원회를 그대로 유지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유다와 같은 사도 한 명이 죽어서 토대의 일부분이 “깎여 나갔을” 때, 나머지 열한 명의 사도가 함께 모여서 그 토대가 다시 완전해 질 수 있도록 후임자를 선택했습니다.(사도행전 1:22~25 참조)

이 방식은 십이사도 정원회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입증했습니다. 이런 사도들이 교회의 복지에 매우 중요했기에 바울은 우리에게 사도들이 언제까지 필요한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믿는 것[에] ……하나가 [될] …… [때]까지”(에베소서 4:13)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이유를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에베소서 4:14)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교리를 순수하게 간직하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잠시, 제가 앞쪽 첫 번째 줄에서 한쪽 끝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그 사람은 그 이야기를 옆 사람에게 해주며, 그런 식으로 줄줄이 내려가서 맨 끝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그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이야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바뀔 것입니다. 이야기는 늘 바뀌게 되는데,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여러 도시와 마을로 다니면서 가르친 교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리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지면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서신이나 개인적인 설교를 통해 교리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없어지자 견제 및 균형 체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바로잡을 수 있는 권능도 없어졌으며, 교리는 이내 왜곡되거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 설계도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토대를 형성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신약전서에 그 설계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는 변경 요청, 즉 사도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언급하는 계시가 나옵니까? 제가 알기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는 그 토대로써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구주께서는 그분과 사도들이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 길을 예비할 칠십인이라고 하는 이들을 택하셨습니다. 이 칠십인에 대한 기록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오늘날 이 설계도와 일치하여 칠십인 직분이 있는 교회가 있습니까?

신약전서의 그 설계도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조직 중 일부분을 구성했던 다른 직분들, 즉 감독(디모데전서 3장; 디도서 1:7 참조), 장로(사도행전 14:23; 디도서 1:5 참조), 집사(빌립보서 1:1 참조), 복음 전하는 자(에베소서 4:11 참조; 축복사를 의미함1), 목사(에베소서 4:11 참조; 감독 및 스테이크 회장과 같이 회중을 감리하는 사람을 의미함2)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개조 제6조에는 다음 설계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조직 즉 사도, 선지자, 감독, 교사, 축복사 등을 믿는다.”(신앙개조 제6조, 강조체 추가) 다시 말해, 우리는 현재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조직과 더불어, 계시된 변경 사항만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각각의 직분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기타 역원들은 어떻게 선택되었을까요? 구주께서 당시에 최고의 명문 신학교에 가서 성적이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부인 베드로와 세금 징수원인 마태, 그리고 이후에는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던 바울을 선택하셨다고 그 설계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각 사도는 평민 중에서 선택되었으며, 본질적으로 그것은 평신도 성직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교회에는 그와 같이 교회의 평민 중에서 선택된 십이사도가 있습니다. 한 명은 교사, 다른 한 명은 기술자, 또 다른 한 명은 변호사, 등등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기타 역원들은 성직 직분에 지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설계도에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분의 역원들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한복음 15:16, 강조체 추가)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성임하시면서 그들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마태와 누가는 그분이 “권능을 주[셨다]”(마태복음 10:1; 또한 누가 복음 9:1 참조)고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신권 권능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설계도에 “[인자가] ……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었다]”(마가복음 13:34)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분의 승인을 받아 그분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신권을 소유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권 권세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권세와 권능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되므로,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승인, 즉 그 설계도에 필요한 그분의 승인 도장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조직하신 교회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분 교회의 설립자이자 모퉁잇돌이라면 그분 교회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구주께서는 몰몬경 시대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교회를 그분의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근원적인 이유를 가르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지 아니할진대 어찌 나의 교회이겠느냐?만일 어떠한 교회가 모세의 이름으로 일컬어질진대 그것은 모세의 교회일 것이요, 만일 교회가 어떠한 자의 이름으로 일컬어질진대 그것은 어떠한 자의 교회일 것이라. 그러나 만일 교회가 내 이름으로 일컬어질진대 그것은 내 교회니, 만일 그들이 내 복음 위에 세워졌으면 그러하리로다.”(제3니파이 27:8, 강조체 추가)

그 때문에 바울은 교회의 초기 회원 중 몇 사람을 질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특정한 제자들의 이름을 따라 자신들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고린도전서 1:12~13)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이름도 취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설계도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분의 이름을 지녀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조셉 스미스의 시대에 앞서 종교 개혁이 300년 이상 동안 이어졌는데 어느 누구도 교회의 명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저에게는 늘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물론, 조셉 스미스 시대 이후로 다른 이들이 그 전례를 따르긴 했지만, 주님께서는 조셉 스미스의 시대가 되어 그리스도의 교회가 회복될 때까지 그분의 이름이 사용되지 못하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그 설계도의 두 번째 페이지를 펴봅시다. 그리스도 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몇 가지를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은 단지 하나의 영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그분에게 살과 뼈로 된 몸이 있습니까? 그 설계도에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들은 그분을 단순히 영으로 잘못 생각했습니다.(누가복음 24:37 참조) 그분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39, 강조체 추가)

그분의 부활체가 육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분은 제자들에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누가복음 24:41)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런 후 경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누가복음 24:42~43)

그리스도께서는 살과 뼈로 된 그 영화로운 부활체로 승천하시어(사도행전 1:9 참조), 3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경전에 나오는 것처럼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브리서 1:3) 이는 조셉 스미스가 그리스도 교회의 회복의 일환으로 가르친 다음 진리에 정확히 일치합니다. “아버지는 사람의 것과 같은 만져 볼 수 있는 살과 뼈의 몸을 가지셨으며, 아들도 그러하시니라.”(교리와 성약 130:22)

많은 기독교계에서 가르치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한 존재입니까 아니면 서로 분리된 두 분의 존재입니까? 그 설계도에는 뭐라고 나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별개의 존재이며 역할도 다르다는 점에 대해 언급된 성경 구절은 아주 많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구주께서는 곧 겪게 될 어마어마한 고통을 인식하시며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태껏 세상에 알려진 것 중에 가장 위대한 복종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복종할 수 있는 다른 존재가 없다면,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고 동일한 존재라면 어떤 복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 구주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시거나 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34)라고 외치셨습니까? 그분을 버리실 다른 별개의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그분이 버림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분들이 두 분의 개체가 아니라면 스데반은 어떻게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겠습니까?(사도행전 7:55~56 참조)

조셉 스미스는 그 숲 속에서 나오면서 그 진리를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란히 서 계신 모습을 보았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곁에 계신 분을 “사랑하는 아들”(조셉 스미스-역사 1:17)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하늘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 인간이 만든 과거의 신화를 산산이 부수고 그 설계도에서 처음 가르쳐졌듯이 그 단순한 진리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목적과 뜻에 있어서 하나이나 서로 별개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공평한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그 설계도에는 뭐라고 나옵니까? 그들이 저주받습니까? 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습니까?

이는 무수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질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점에 관해 말씀하셨으며 참으로 그러하셨습니다. 그 설계도에 답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4:6)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죽은 후에 배도에 이르면서 상실되었지만,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되었습니다.

세 개의 천국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의 천국이 있습니까? 수년 동안 기독교계에서는 하나의 천국과 하나의 지옥이 있다고 가르쳤으나, 그 최초의 설계도에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바울은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르다]”(고린도전서 15:41)고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고린도후서 12:2) 사람에 관한 시현을 자세히 이야기함으로써 천국이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 진리를 확증해 주었습니다. 둘째나 첫째 하늘이 없다면 셋째 하늘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다시금,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된 이 교리는 최초의 설계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결혼 생활은 영원히 지속됩니까 아니면 죽으면 끝납니까? 그 설계도에는 어떻게 나옵니까?

사도들이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는 권능(마태복음 18:18 참조)을 받음에 따라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린도전서 11:11) 이 말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면전에서 영원히 함께 매이는 것이 이상적임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이 진리를 확증했습니다. 그는 남편과 아내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베드로전서 3:7)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로따로 또는 개별적으로가 아닌, 영생의 상속자로서 함께 그 길을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설계도에서 가르치는 교리이며,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그 설계도의 세 번째 페이지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의식”이 나옵니다. 그 설계도는 이것에 대해 매우 구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유아와 어린 아이에게 축복을 줍니까 아니면 침례를 줍니까? 그 설계도에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구주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명확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경전에는 어린 아이에 관해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마가복음 10:16, 강조체 추가) 마태도 어린 아이에 관해 구주께서 “그들에게 안수하[셨다]”(마태복음 19:15)고 확증해 주었습니다. 그 설계도에서는 유아와 어린 아이들이 침례가 아닌 축복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신약전서 전체의 어디에서도 유아 침례에 관한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의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찾는 사람은 유아에게 침례가 아닌, 축복을 주는 교회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침례는 구원에 반드시 필요합니까? 그 설계도에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신 후에 “사람이 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강조체 추가)라고 명확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비슷하게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사도행전 2:38, 강조체 추가) 그 설계도에서 가르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침례는 물을 뿌리거나 부음으로써 행해집니까 아니면 침수로 행해집니까? 그 설계도에는 침례가 침수로 행해져야 한다는 증거가 적어도 네 개 나옵니다.

첫째, 우리의 위대한 모범자이신 구주께서는 “곧 물에서”(마태복음 3:16) 올라오셨는데, 이는 그분이 먼저 물속으로 내려가셨음을 나타냅니다.

둘째, 침례 요한은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았기]”(요한복음 3:23, 강조체 추가) 때문입니다.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이 침례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면 그가 왜 “물이 많[은]” 곳으로 갔겠습니까?

셋째, 바울은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과 매장 및 부활을 상징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로마서 6:3~5 참조) 침례의 물속에 서 있는 새로운 개종자는 이제 막 죽으려는 옛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가 물속에 잠길 때, 그의 죄는 “매장되어” 깨끗하게 하는 물의 상징적 권능으로 용서받게 됩니다. 그런 후 물에서 올라올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 곧 부활된 사람을 상징합니다. 침례의 기저를 이루는 그 모든 상징은 침수로써의 침례와 일치하지만, 물을 뿌리는 것과 붓는 것에는 그 상징이 완전히 상실되어 있습니다.

넷째, 침례로 번역되는 그리스어의 어원은 물에 담그거나 던져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역사가인 윌 듀런트는 그 설계도에 나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9세기 무렵에 완전히 물에 잠기는 초기 기독교도의 침례 방식은 북방 지역에서 건강에 덜 해로운 …… 물 뿌리기 방식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4

조셉 스미스가 침례 방식에 관해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설계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입니다.(교리와 성약 20:73~74 참조)

죽은 자를 위한 침례는 원래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의식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들은 죽은 자를 위한 침례로 알려진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의 실재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바가 그들의 믿음과는 모순된다는 점을 파악한 바울은 그들이 죽은 자를 위한 침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부활의 올바른 교리를 입증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느냐”(고린도전서 15:29)

누군가가 일단 참된 교리를 받아들여 침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의식임을 인정하게 되면, 논리상 그는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믿게 되며 그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침례 받을 기회도 없이 죽은 사람들은 어떡합니까?”라는 어려운 질문에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직면한 사람들은 다음 네 가지 항목 중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첫째,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답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며]”(사도행전 10:3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디모데전서 2:4) 원하신다는 경전상의 진리와 모순됩니다.

둘째,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하신 말에 실제로 의미를 두지는 않으셨기에 침례는 구원에 꼭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 주가 말한 것은 내가 말한 것이요, 나는 나 자신을 변명하지 아니하나니”(교리와 성약 1:38; 또한 모사이야서 2:24 참조)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에 항상 의미를 두시기 때문에 이 답은 비현실적입니다.

셋째, 일부 사람들은 “소망에 의한 침례”라고 하는 새로운 조건이 물에 의한 침례를 대체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지만 필멸의 삶 동안 침례를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그의 합당한 소망은 물의 침례 대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선택 항목이 지닌 문제는 경전상의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경전에는 “소망으로 난 자는 제외하고”라는 말은 없으며, 그보다는 “사람이 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강조체 추가)라고 나옵니다.

네 번째 선택 항목은 하나님께서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침례를 받으라고 명하신 말씀에 실제로 의미를 두셨으며, 그 때문에 그분께서는 자비롭게도 모든 사람, 필멸의 삶 동안 기회가 없었던 사람까지도 침례를 받도록 길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은 자를 위한 침례입니다. 그것은 그 설계도와 일치하는 선택 항목입니다.

그 설계도에는 어떤 사람이 침례를 받은 후에 그에게 주어지는 성신의 은사, 즉 일시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인 선물인 그 은사의 방식에 관해 뭐라고 나옵니까? 그것이 침례를 받은 후에 그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내려옵니까? 바람이 몰아치듯이 옵니까 아니면 그 은사를 받기 위해 따라야 하는 어떤 성스러운 의식과 절차가 있습니까? 그 설계도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몇몇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침례를 베푼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 후 경전에는 그 의식이 행해진 방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매성[신]을 받는지라”(사도행전 8:17, 강조체 추가)

바울이 에베소에서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침례를 베푼 후에도 이 동일한 절차가 행해졌습니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성[신]이 그들에게 임하시[니라]”(사도행전 19:5~6, 강조체 추가)

다시금 그 설계도와 그리스도의 회복된 교회는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 설계도의 다음 페이지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열매”가 나옵니다. 구주께서는 진리를 시험해 보는 방법에 대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설계도에 입증된 그리스도 교회의 열매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초기 성도들은 건강한 백성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우리의 육신이 우리의 영이 거하는 “성전”이므로 우리 몸을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 또한 고린도전서 6:19 참조) 이 때문에 그리스도 회복된 교회의 회원들은 에베소서 5장과 디모데전서 3장에 술에 대한 제한이 나오듯이 일정한 건강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조셉 스미스는 우리 몸을 성전처럼 다루는 신성한 율법과 일치하는 것으로, 주님께서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들에게 주신 지혜의 말씀으로 알려진 건강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 건강의 율법에 따라 생활한 결과, 반복적으로 시행된 연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원들은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들 중에 속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건강의 율법에 따라 생활함으로써 거둔 열매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두 번째 열매는 기적들과 영의 은사였습니다. 그런 내용은 신약전서의 페이지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권능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었음을 증거했습니다.(히브리서 2:4 참조)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도의 도래와 함께 기적들은 줄어들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 사실을 쉽사리 인정했으며, 개혁가들도 그것을 시인했습니다. 저명한 역사가인 폴 존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어도 제국시대[콘스탄티누스 시대를 의미함] 이후로 기독교 지도자들이 더 이상 사도들처럼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기적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인정되었다.” 5

더 이상 기적과 영의 은사가 없는 시기가 왜 오게 되었습니까? 왜냐하면 그 열매를 맺게 한 나무, 즉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 이상 지상에 없었으며 사람들의 신앙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웨슬리는 그의 시대에 이런 영의 은사가 교회에 없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2~3세기 이상 동안 교회에서 흔히 있었던 이 놀라운 성신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6

여러분 중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저는 이 시대가 그분의 최초의 교회에서 그랬듯이 그리스도의 회복된 교회에서 기적과 영의 은사가 쏟아지는 시대임을 간증드립니다.

세 번째 열매로,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그 설계도에는 천사와 시현에 관한 기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오늘날 천사와 시현을 공언하는 교회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함으로써 천사와 시현이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의 핵심이었음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천사; 변형의 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온 천사들;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준 천사; 고넬료에게 말한 천사; 바울에게 임박한 배의 조난을 알려준 천사; 계시자 요한에게 온 천사;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스데반의 시현; 요한의 마지막 시대에 대한 시현;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물어야 할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근거도 없이 천사와 시현을 주장하면서 어떻게 참된 교회입니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가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에서 그랬듯이, 그리고 그분의 설계도에 나타나 있듯이 천사와 시현이 있지 않으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와 일치하는 다른 많은 열매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의 교회로, 사도들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태복음 28:19)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는 8만 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적 교회로, 그 설계도에서는 그리스도 교회의 초기 성도들이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혼전 관계를 삼가는 명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 도덕 표준뿐만 아니라 그 표준에 따라 생활하도록 가르치는 교회가 몇 개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는 가족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충실하라는 명을 받았고(에베소서 5:23~25 참조),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명을 받았으며(에베소서 6:1 참조), 감독은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습니다.(디모데전서 3:4~5 참조) 오늘날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와 마찬가지로 가족 중심의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열매들은 신중하게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각 열매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회복된 교회와 일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으나, 그 설계도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 교회가 하늘과 연결되어 신성한 계시를 받는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연결이 없으면 교회는 단지 이성의 힘으로 다스려지는, 인간이 운영하는 조직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모스 3:7)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계시가 그리스도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지속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 주의 [시현]과 계시를 말하리라”(고린도후서 12:1; 또한 사도행전 1:2 참조)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는 그 기본적인 교리와 일치하기에 지속적인 계시를 통해 하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 신앙개조 제9조로 알려진 우리 교회의 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계시하신 모든 것과, 현재 계시하시는 모든 것을 믿으며, 앞으로도 그분이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많은 위대하고도 중대한 것들을 계시하실 것을 믿는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의 설계도를 오늘날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와 비교해 본다면, 그는 각 항목, 조직, 가르침, 의식, 열매, 계시를 하나하나 맞추어볼 것이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만이 일치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 설계도를 연구한 후에 이 교회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교회로 인해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주에게서 “너희도 가려느냐”(요한복음 6:67)라는 질문을 받은 베드로와 같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모든 마음에 새겨지고 모든 가정에서 간직해야 할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한복음 6:68)

누군가가 이 교회에서 돌아선다면, 그는 성스러운 숲에서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본성, 몰몬경에서 가르치듯이 더 완전한 속죄의 충만함,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 영광의 세 등급, 영원한 가족에 관한 회복된 진리를 배우기 위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신을 구원하고 승영하게 해줄 의식을 받기 위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아내 및 자녀들과 영원히 인봉되기 위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족 구성원을 위해 위안이나 치유의 신권 축복을 받고자 할 때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기 위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한 교리와 의식과 권능과 선지자를 헛되이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헛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만 유일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회복의 기초가 되는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조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된 교리와 의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고,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열매는 좋지만 나무는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주께서는 오래 전에 그 진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태복음 7:18) 따라서, 오늘 저녁에 말씀드린 교리적 열매가 좋다면 그 열매를 열리게 하는 나무, 즉 조셉 스미스와 더불어 그러한 계시된 진리에 관한 기초가 되는 역사도 마찬가지로 좋은 것입니다. 둘 중 하나를 배제하고 다른 하나만 취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연차 대회에서 비 에이치 로버츠는 조셉 스미스의 업적에 관해 말씀한 후, 조셉의 비난자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 손을 입술에 갖다 대고 침묵을 지키십시오.” 7

일부 사람들이 근거 없이 주장된 교리상의 과학적 불일치에 대해 역사적 또는 사회적으로 관심을 보일 수도 있으나, 이런 불일치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중심 무대는 교리와 의식, 신권 권능, 기타 우리 교회의 열매들, 그리고 오늘 저녁에 말씀드린 많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비난자들과 그들이 던지는 구체적인 질문에 어떻게 응대할까요?”

변호사라면 검사가 주된 증인을 내세우고 나면 피고인에 대한 소송 사건은 나쁜 면이 최대한 강조되는 상황에 던져졌음을 압니다. 그 시점에서 누군가는 재빠르게 그 피고인이 유죄라고 결정할 수도 있는 판결을 언도하지만, 그때 법정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피고측은 그 동일한 증인에게 반대 심문을 시작하게 되고, 그럴 때 자주 벌어지는 상황은 그 증인의 결정적인 대답이 반대 심문의 압박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더할 나위 없어 보였던 그 증인은 이제 모순된 발언을 하고, 그 사건에 대한 증언에 명백한 결함이 나타나기까지 합니다. 얼핏 보기엔 확고했던 그 증인의 이야기가 새로운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깨어지고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그 증인은 그의 검사가 던지는 쉬운 질문을 다룰 수 있었지만, 어려운 반대 질문을 받으면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질문의 특성상 그것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반대 심문이 끝나면 그 증인의 신용이 크게 훼손됩니다. 그러면 앞서 그 피고인에게 금방이라도 유죄를 선언할 것 같았던 그 참관자는 이제 시각이 달라져서 그 사람을 완전히 무죄라고 여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비난자들은 이 교회를 나쁜 면이 최대한 강조되는 상황에 던져 넣으려는 의도로 교회에 대한 일방적인 질문들을 던집니다. 하지만 질문은 양방향으로 갑니다.8 검사의 주된 증인들은 반대 심문을 면제받은 것이 아니며, 가장 집요한 교회의 비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다음 질문들로 “반대 심문”을 했을 때 저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는 비방자들을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첫째, 전세에 대한 교리, 하나님의 참된 본성, 복음이 죽은 자들에게 전파되는 것, 죽은 자를 위한 침례, 그리고 오늘 저녁에 말씀드린 그 밖의 많은 것들 등의 교리와 의식들은 조셉 스미스의 시대에 다른 교회들이 가르치지 않은 것들이었는데 어떻게 조셉은 성경에 나오는 그런 교리와 의식들을 회복할 줄 알았습니까? 왜 조셉 스미스는 그것들을 알아내고 회복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까? 조셉이 신학적 천재라고 여긴다 하더라도 1800년대에 구주의 성역을 따라 그 설계도를 정확히 똑같이 따를 수 있는 그와 같은 다른 천재들은 없었습니까?

둘째, 만일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면 왜 이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와 똑같은 열매, 즉 기적과 영의 은사, 사도와 선지자를 통해 오는 현재의 계시, 천사와 시현, 건강한 백성, 도덕적인 백성, 선교사로 봉사하고자 하는 백성, 매우 가족 중심적인 백성이 있습니까? 구주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20).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확실히, 더 많은 질문으로 반대 심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성 면에서 다른 모든 질문들을 능가하는 확실한 질문들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문제의 핵심을 이룹니다. 진리를 알아내는 데 있어 몇몇 질문들은 다른 질문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조셉 스미스가 성경의 가르침과 위에서 언급한 의식들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최초 교회와 동일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게 된다면, 또는 몰몬경이 성스러운 기원에서 나온 것임을 여러분이 안다면, 여러분은 조셉 스미스가 선지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셉 스미스가 선지자라면, 이 교회는 온 지상에 세워진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있는 교회이므로, 나머지 모든 질문은 무색해집니다. 그것은 쟁점에 관해 판결하는 대법원과도 같습니다. 그 점에서 그와 반대되는 하위 법정의 모든 결정, 비방자들의 질문이 아무리 신랄하거나 복잡하거나 재밋거리일지라도 그 모든 질문은 진리의 방정식에서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은 진리를 아는 데 대들보가 되는 주요한 질문들, 그 결정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선지자일지라도 인간이 지닌 몇몇 불완전성을 용납할 수 있으며, 그런 결점은 필멸의 존재로서 예상되는 것입니다. 저는 몰몬경에 반대되는 몇몇 근거 없는 과학적인 발견을 용납할 수 있으며, 그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입니다. 저는 또한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를 용납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진리 전체를 놓고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셉 스미스에 의해 회복된 교리적 진리와 의식 없이는 살 수 없으며, 제 가족을 축복할 하나님의 신권 없이는 살 수 없고, 아내와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영원히 인봉되는 지식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답을 하지 못한 몇 가지 질문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무수한 교리적 확실성과 하나님의 권능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리고 바라건대 여러분에게는 그 선택이 쉽고 이성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젠가 감리하게 될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음을 간증드립니다. 이 교회에는 그분이 승인한 조직과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의식, 그분의 권능, 그분의 열매, 그분의 지속적인 계시가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은 그분의 신성한 설계도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설계도와 오늘날 그리스도의 회복된 교회 사이에서 필연적인 결과를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실을 증거하고 간구합니다. 아멘.

© 2014 Intellectual Reserve, Inc. 판권 소유. 영어 승인: 9/13. 번역 승인: 9/13. What Is the Blueprint of Christ’s Church?의 번역. Korean. PD50051805 320.

  1.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복음 전하는 자는] 축복사입니다”(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 [2007년], 140쪽)

  2. 목사는 특정한 용어가 아니라 무리를 지켜보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다.

  3. 혹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필멸의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 잠시 육신의 형태로 나타나신 것이며 그분께서 승천하실 때 그분의 육신은 지상에 두시어 육신이 지니는 “한계”라는 속성을 버리시려 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는 현재 하늘에서 영의 상태로 계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육신이 원래 일시적인 것인지 혹은 육신을 지상에 두고 가셨는지에 대한 증거는 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논쟁을 예상했던 사도 바울이 그런 주장을 비난했음은 자명하다. 그는 그리스도가 부활한 육신을 두고 가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로마서 6:9; 강조체 추가) 경전에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 죽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죽음은 육체와 영을 갈라놓기 때문에(야고보서 2:26 참조) 경전에서는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기 전에 육신을 두고 가실 수 없다고 가르친다. 만약 그랬다면 그분은 승천 당시 두 번째 사망을 겪으셨다는 말인데 바울은 이를 두고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4. Will Durrant, The Story of Civilization: The Age of Faith (1950), 738.

  5. Paul Johnson, A History of Christianity (1976), 162; italics added.

  6. John Wesley, The Works of John Wesley, 3rd ed., 14 vols. (reprinted 1986 from the 1872 edition), 7:26.

  7. B. H. Roberts, quoted in Truman G. Madsen, Defender of the Faith: The B. H. Roberts Story (1980), 351.

  8. 여러분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 가르치기 위해 다시 돌아오신 구주께 비방자들이 다가가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질문했음을 기억할 것이다. 질문이 양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이해하신 구주께서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희가 먼저 나의 질문에 답하면 나도 너희 질문에 답하겠노라.]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비방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구주께서는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1:23~27 참조)고 응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