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영적 모임
목적이 있는 삶: “진정한 의도”의 중요성


목적이 있는 삶: “진정한 의도”의 중요성

랜들 엘 리드 형제님과 함께하는 밤 청년 성인을 위한 전 세계 영적 모임, 2015년 1월 11일, 브리검 영 대학교- 아이다호

오늘 밤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와 함께 오늘 저녁에 이곳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제 휴대전화가 제가 오늘 렉스버그에 왔다는 일정을 인식하고 있다는 게 참 재미있었습니다. 오늘 날씨와 주변의 호텔 및 식당 목록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이번 주말에 렉스버그에서 가볼 만한 여러 명소도 알려 주었지요.

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목록에 제 말씀은 포함되지 않더군요. 아시다시피 스마트폰이란 게 이렇습니다!

오늘 밤 여러분은 스마트폰이 추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가량 제 말씀을 듣겠다고 선택하셨습니다. 이 시간은 절대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가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중대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제 말씀은 영이 여러분에게 전하는 가르침만큼은 중요하지 못하며, 그리고 그 가르침은 오직 여러분이 영의 음성에 따라 행하겠다고 다짐할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이 놀라운 시대라는 것에 여러분도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우리 세대를 베이비붐 세대라 불렀는데 지금은 그 말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다음 세대는 X세대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세대는 Y세대, 즉 밀레니얼 세대라 불렀습니다. 기술을 쉽게 다루고 소셜미디어를 십분 활용하는 여러분은 예전 세대보다 더 똑똑하고 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런 특성으로 여러분은 오늘날 사회뿐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서도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선택과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인생의 많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축복이자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쁜 결정을 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종종 “판단 마비”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세대가 당면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예전보다 집중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기술이 워낙 발전하다 보니 상점에서 뭔가 사고 나오자마자 그 물건이 쓸모 없어질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조금만 더 가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결심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수동적인 상태에서 그들은 쉽게 한눈을 팝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밤 저는 그렇게 되지 않는 방법을, 목적이 있는 삶: 진정한 의도의 중요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I. 목적

바다에서 구명선을 타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방을 둘러봐도 물결치는 파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배에는 노가 있는데, 여러분은 어느 방향으로 노를 젓겠습니까? 이제 육지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 그 육지가 동기와 목적을 부여합니까? 분명한 목적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표류하게 됩니다. 세상의 물결이 정하는 대로 휩쓸려 갑니다.

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전쟁과 평화의 저자인 레프 톨스토이의 삶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유년 시절은 파란만장했습니다. 13살 때 부모를 여의고 형들에게서 술과 도박, 여성 편력을 배웠으며 학업과는 담을 쌓았습니다. 그러다 22살 때 자신의 삶에 진정한 목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짐승같이 살고 있다.” 2년 후에는 “이제 24살이 되었건만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이런 불만은 톨스토이가 평생 삶의 목적의 이유를 수많은 시련과 오류에 부닥치면서도 찾아 헤매게 만든 원천이 되었습니다.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 전에 그는 일지에 “‘삶의 완전한 의미와 기쁨은’ ……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데 있다.’”1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또한 덧붙이고 싶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두 개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날과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된 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2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기에, 그렇게 평생을 삶의 목적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저는 우리 모두에게 본능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수를 하기에 대부분은 온전해진다는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속죄가 없다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구주께서 희생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모든 경건하지 아니한 것을 거부하라. 너희가 만일 모든 경건하지 아니한 것을 거부하고, 너희의 능력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의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니, 그의 은혜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될지라.”(모로나이서 10:32; 강조체 추가)

구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레프 톨스토이가 발견한 것처럼, 여러분은 온전하게 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의 뜻을 추구하며 따를 때 여러분은 삶에서 위대한 목적을 찾게 될 것입니다.

테드 알 콜리스터 장로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경전과 다른 증인들이 그토록 분명하게 간증하는, 하나님이 주신 이 신성한 운명을 정확한 비전으로 바라보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그것은 비전이 커질수록 동기도 커지기 때문입니다.”3

선교 사업

젊었을 때 저는 선교 사업을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어느 정도 굳힌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1년 다니고 군대에서 1년 복무한 후, 지역 병원의 방사선 기사라는 꽤 괜찮은 직업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병원 외과의인 제임스 핑그리 박사님이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대화 중에 핑그리 박사님은 제가 선교 사업을 안 하기로 결심한 것을 아셨고, 그 이유를 물으셨습니다. 저는 선교 사업을 가기엔 나이가 많고 어쩌면 시기가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그건 전혀 타당한 이유가 아니라며 자신은 의대를 졸업한 후 선교 사업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 선교 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간증하셨습니다.

그분의 간증은 제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 후 저는 예전과는 정반대로, 진정한 의도를 지니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교 사업을 가지 않아야 할 여러 이유를 생각해냈습니다.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성찬식 때 작별 말씀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또 직업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게다가 장학금을 받을 가능성도 있었는데 선교 사업을 다녀오면 아마 그 기회는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군에 복무할 동안 저를 기다려 준 여자친구였습니다. 저는 그녀가 2년을 더 기다려 주지는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제 이유가 타당하고 제 결정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실망스럽게도 저는 제가 바라던 맞다, 아니다라는 분명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실까?’ 그분이 제가 선교 사업을 하길 바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뜻대로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 모두 자주 자문해 봐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세워야 할, 참으로 중요한 양식이 아닙니까? 대개 우리는 이런 태도를 보입니다. “어느 곳에나 주께서 원하시면 가오리다. 단, 제가 가고 싶은 곳, 제가 원하는 것을 할 때만 그렇게 하겠나이다.”

감사하게도, 저는 선교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고 멕시코 북 선교부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자친구 문제를 걱정하시는 분들께 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여자친구가 저를 기다려 주지는 않았지만, 결국 저는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제 삶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 아버지처럼 되는 것임을 알게 된 저는 결혼을 하고 가족을 갖는 것만큼 그분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위대한 대학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제가 여러분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대학에 들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저는 그 대학의 입학 모집 기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압니다.

II. 진정한 의도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제 아들아이의 호기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아는 몇 안 되는 단어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게 “왜요?”였습니다. 제가 “잘 시간이야.”라고 말하면 아들은 늘 “왜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아빠는 출근할 거란다.”

“왜요?”

“기도하자.”

“왜요?”

“교회에 갈 시간이란다.”

“왜요?”

처음에 500번 정도까지는 정말 귀여웠습니다. 하지만 그 귀여움이 점점 사라지고 슬슬 짜증을 느끼게 된 이후에도 저는 (말 그대로) “왜?”라는 물음을 제가 하는 모든 일에 자주 던져볼 수 있게 해 준 그 아이에게 감사해했습니다.

여러분 세대를 칭하는 명칭으로 쓰인 Y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분 자신을 “왜”라는 뜻을 가진 “Why(더블유 에이치 와이)” 세대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의도를 갖고 산다는 것은 그 이유를 이해하고 우리 행동 저변의 동기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4고 했습니다. 자신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생각해보고 정기적으로 “왜?”라고 자문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 순간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커집니다. 앞을 내다보고 스스로 “왜 내가 그걸 하려는가?”라고 묻는 편이 과거를 돌아보며 “이런, 왜 내가 그걸 했지?”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굳이 이유가 하나 있다면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이유는 충분합니다.

별 스티커

저는 세미나리 학생이었을 때 진정한 의도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교사님은 우리에게 몰몬경을 읽으라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과제 수행 정도를 표시하기 위해 교사님은 표를 하나 만들어 세로에는 우리의 이름을, 가로에는 몰몬경의 책명을 쓰고 매번 각 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의 이름 옆에 별 스티커를 붙여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다지 열심히 읽지 않았는데 곧 다른 친구들보다 제가 점점 뒤처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했고 승부욕도 있던 터라 결국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별 스티커를 받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더 많은 별을 받을 때마다 더 읽어야겠다는 동기부여를 받아 수업 전과 방과 후, 또 시간 날 때마다 몰몬경을 읽었습니다.

우리 반에서 제가 제일 먼저 몰몬경을 다 읽었다고 말씀드리면 대단한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꼴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몰몬경을 읽은 후 저는 어떤 것을 얻었을까요? 아마 간증이라고들 생각하시겠지만, 아니었습니다. 저는 별 스티커만 얻었습니다. 몰몬경을 읽은 목적은 별 스티커를 얻기 위해서였고 그게 제 진짜 의도였습니다.

모로나이는 몰몬경이 참된지 알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또 너희가 이 기록을 받거든, 내가 너희를 권면하거니와, 너희는 혹 이 기록이 참되지 아니한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보라. 너희가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진정한 의도를 지니며, 진실한 마음으로 간구할진대, 그는 성신의 권능으로 너희에게 이것의 참됨을 드러내어 주시리라.”(모로나이서 10:4; 강조체 추가)

돌아보면, 주님은 전적으로 공정하게 저를 대하셨습니다. 제가 찾는 것 이상으로 뭘 더 바랄 수 있었을까요? 저는 잠시 멈춰서 몰몬경을 읽는지 자문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세상적인 동기가 이끄는 대로 표류했을 뿐이고, 결국 참된 그 책을 그릇된 이유로 읽었다는 것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도란 올바른 이유를 위해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선교 사업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저는 진정한 의도를 지니고 몰몬경을 읽었습니다. 2년간 그 책에 대한 간증을 나누려면, 먼저 저에게 간증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몰몬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을 간증하는 신성한 목적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진정한 의도를 지니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오렌지의 비유

제가 “오렌지의 비유”라고 이름 붙인 현대의 비유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이야기에서 진정한 의도의 힘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월급이 많은 일류 기업에 들어가겠다는 야망을 품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력서를 작성해 보냈고 면접을 여러 번 봤습니다. 결국 그는 입사해서 말단 사원에서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야망을 다음 목표, 즉 과장이 되어 더 많은 명망과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하는 방향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맡은 업무를 모두 해냈습니다. 어떤 때는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늦게까지 야근하며 사장에게 자신이 오랜 시간을 일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습니다.

5년 후, 과장 자리에 공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정말 실망스럽게도 입사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새내기 사원이 과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젊은이는 아주 화가 나서 사장을 찾아가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현명한 사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날 좀 도와주겠는가?”

그 직원은 “네, 물론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상점에 가서 오렌지 좀 사다 주겠나? 아내가 필요하다고 하네.”

그 젊은이는 알겠다고 하며 상점에 갔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사장은 “어떤 오렌지를 샀나?”라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렌지를 사오라고 하셨잖아요. 여기 있습니다.”

“얼마가 들었나?” 사장이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30달러를 주셨잖아요. 여기 영수증과 거스름돈 받으세요.”

사장은 “고맙네. 이제 앉아서 주의 깊게 지켜보게.”라고 답했습니다.

그런 후 사장은 과장으로 승진한 직원을 불러서 똑같은 일을 시켰습니다. 그 과장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하며 상점으로 갔습니다.

돌아온 그에게 사장이 물었습니다. “어떤 오렌지를 샀나?”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상점에 가니 여러 종류가 있었어요. 네이블 오렌지, 발렌시아 오렌지, 검붉은 오렌지, 귤, 기타 여러 종류가 있어서 뭘 사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하지만 사모님이 오렌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 전화를 했죠. 사모님은 파티를 할 예정인데 오렌지 주스를 만들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주인에게 어떤 오렌지를 써야 제일 좋은 주스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발렌시아 오렌지가 아주 달고 과즙도 많다고 대답했고 저는 그걸 샀습니다. 그래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께 전해드렸죠. 아주 흡족해하셨습니다.”

이에 사장이 물었습니다. “얼마가 들었나?”

“그것도 좀 문제였죠. 얼마나 사야 할지 몰라서 다시 사모님께 전화했고 손님이 얼마나 올 건지 여쭈어 보았어요. 스무 명이 올 예정이라 하셔서 주인에게 20인분 주스를 만들려면 오렌지가 얼마나 필요한지 물어 보았습니다. 꽤 많은 오렌지가 필요했죠. 그래서 주인에게 많이 사는 거니 좀 깎아달라고 했는데, 정말 깎아 주더라고요! 보통 개당 75센트를 받는데 저는 50센트에 샀습니다. 여기 거스름돈과 영수증입니다.”

사장은 웃으며 “고맙네. 이제 가보게.”라고 말했습니다.

사장은 이 광경을 쭉 지켜보고 있던 그 젊은이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는 일어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사장님의 뜻을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풀이 죽은 채로 사무실을 나갔습니다.

이 두 젊은이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 모두 오렌지를 사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렇게 했습니다. 한 사람은 좀 더 노력을 기울였고, 더 효율적으로 일했으며, 세부적인 것에 더 관심을 쏟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단지 시늉만 하는 것보다 진정한 의도를 지니고 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젊은이는 돈과 지위, 명성에 동기부여를 받았지만, 두 번째 젊은이는 고용주를 만족시키려는 강한 열망과 될 수 있는 한 최고의 직원이 되려는 내적인 결심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비유를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 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추구하려 한다면, 가족, 학교, 직장, 교회에서 들이는 여러분의 노력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III. 적용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 집중의 중요성

여러분은 숙제나 업무 일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최근에 사려고 했던 뭔가에 대한 광고가 갑자기 알림창으로 뜬 일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또 온라인 매장을 검색하다가 친구 몇 명이 온라인상에 있는 것을 보고 채팅을 시작했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또 친구 하나가 페이스북에 뭔가를 게시했다는 알림을 보게 되어 그 게시물을 확인했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애당초 왜 컴퓨터 앞에 앉았는지는 잊어버리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으로 옮겼어야 했을 때 한눈을 팔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다른 것에 주의가 쏠리면 좋은 일을 하는 데 쏟을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한눈을 팔지 않게 해 줍니다.

저는 여러분이 시험 보는 걸 좋아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 밤 간단한 문제를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두 팀이 보이시죠? 한 팀은 흰색, 다른 팀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두 팀이 농구공을 패스 할 텐데 흰색 팀이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 세어보십시오.

[인식 실험 비디오 상영]

몇 번이나 패스를 했습니까?

19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주십시오. 20번 혹은 21번은요? 22번인가요?

정답은 21번입니다.

21번이라 생각하셨던 분은 계속 손을 들어 주십시오. 한 노부인이 걸어가면서 바닥을 미끄러지듯 뒤로 걷는 모습을 본 사람을 계속 손을 든 채 계십시오. 이제 닌자 하나가 검은색 팀 선수 하나 대신 들어간 것을 본 분은 계속 손을 든 채 계십시오. 검은색 팀이 모자를 쓰는 걸 보셨습니까?

이제 다시 한 번 보여드릴 테니 여러분이 처음에 보지 못한 것에 집중해 보십시오.

[인식 실험 비디오 재상영]

이 비디오는 나중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삶에서 집중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 실험이 설명하듯이, 사람은 대개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말로, 경전에서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누가복음 11:9)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 주변의 영적인 세상을 놓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을 이끌고 다른 이들을 축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속삭이는 성신의 간절한 음성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영적인 것과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거나 혹 듣기 좋거나 혹 칭찬할 만한”(신앙개조 제13조) 것에 집중한다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한눈을 파는 일이 적어질 것입니다. 한눈 파는 것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목적에 오롯이 집중하고 훌륭한 대업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 유념하고, 엉뚱한 산을 오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작은 것의 힘

집중하는 대상을 조정해서 선교 사업을 하고 35년이 지난 후, 저는 아들과 함께 멕시코를 방문해 제가 가르쳤던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는 알아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제가 선교 사업을 시작했던 작은 마을에서 성찬식에 아들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한 명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임이 끝난 후, 우리는 감독님께 우리가 가르치고 침례 주었던 사람들 명단에서 아는 사람이 있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감독님은 자신은 침례 받은 지 5년밖에 안 되었으니 27년간 회원이었던 다른 분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목록을 훑어 봤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적혀 있는 리어노어 로페즈 데 엔리케스라는 이름에 이르렀습니다.

그 형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맞아요. 이 가족은 이 건물을 같이 쓰는 다른 와드에 나가고 있어요. 바로 다음이 그 와드의 성찬식이니 이제 곧 올 겁니다.”

10분 남짓 기다리자 리오노어 자매님이 건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이제 70세 중반이 되셨지만 저는 그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자매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부둥켜 안았습니다.

자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이 다시 오기를 지난 35년간 기도해 왔어요. 우리 가족에게 복음을 알려 주셔서 고맙단 말씀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저는 이어서 들어온 다른 가족들과도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넥타이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두 명의 전임 선교사들과 함께 서 있는 제 아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 성찬식에 참석하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 와드의 감독은 리어노어 자매님의 아들이었고, 반주자는 자매님의 손자였으며, 지휘자도 자매님의 손녀였고, 아론 신권회의 청남들 중에도 자매님의 손자들이 있었으며, 자매님의 딸 중 하나는 스테이크 회장단 보좌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딸 하나는 근처 와드의 감독과 결혼했습니다. 리어노어 자매님의 자녀 대부분은 선교 사업을 했고 이제 손자들 역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이 우리보다 더 훌륭한 선교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자매님의 자녀들은 십일조와 성전의 중요성, 경전 공부, 기도, 그것을 신뢰하는 신앙 등,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쉴새 없이 애쓰셨던 자매님의 노력을 기억하고 감사를 돌립니다. 자매님은 자녀들에게 충만하고 의로우며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작은 결정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가르치셨고, 그들 또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훌륭한 가족 덕분에 모두 합치면 500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가 선교 사업을 하기를 원하셨던 많은 이유 중 한 가지였습니다. 이 경험으로 저는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영원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점심을 먹으며 했던 간단한 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종종 핑그리 박사님이 자신의 직업과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더 집중했더라면, 왜 제가 선교 사업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 물어보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주님의 사업을 진전시키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그분은 씨앗 하나를 심으셨고 그 씨앗은 자라서 열매를 맺고 계속해서 놀라울 정도로 퍼져나갔습니다. 영감 받은 생각이 선한 행동을 이끌어내고, 선한 행동은 또 다른 선한 행동을 이끌어내며, 이러한 모형은 영원토록 지속됩니다.

마가복음 4장 20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경전도 작고 단순하지만 목적 있는 행동이 극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충분히 증명합니다. 앨마는 아들 힐라맨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작고 단순한 일로 큰 일이 이루어지며, ……

주께서는 아주 작은 방편으로 현명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많은 영혼의 구원을 이루시느니라.”(앨마서 37:6~7)

인생 초반에 배워야 할 교훈 중에는 우리가 매일 하는 작은 일들이 커다랗고 복합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삶에 존재하는 작고 단순한 것들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수도, 아니면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작고 단순한 것들을 통해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셨듯이 사탄도 작고 단순한 것들을 이용해 여러분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천천히 부지불식간에 여러분을 끌어내어 길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문제는 훌륭한 가족이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 혹은 영적으로 훌륭한 이들을 볼 때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작고 단순한 행동은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볼 때 그들을 챔피언의 자리로 이끌어 준, 다년간 매일 했던 훈련은 보지 못합니다. 상점에 가서 신선한 과일을 살 때 우리는 씨앗을 심고 공들여 가꾸고 수확한 과정을 보지 못합니다. 몬슨 회장님과 다른 총관리 역원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들의 영적인 힘과 선함은 보지만,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단순하지만 매일 했던 훈련은 보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은 쉽게 행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세상에 삽니다. 심자마자 바로 수확하기를 원합니다. 즉각적인 결과를 얻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며 몇 초를 기다리는 것조차 짜증을 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과 희생의 복합체라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앨마가 힐라맨에게 준 권고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적절합니다. 리하이의 가족을 “날마다” 인도했던 리아호나와 “다른 많은 기적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앨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기적들이 작은 방편으로 이루어지는고로 그것이 그들에게 기이한 일을 보였으며, 그들이 게으르고 그들의 신앙과 부지런함을 행할 것을 잊으매 그 기이한 일이 그치고, 그들은 그들의 여행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였더라. ……

오 내 아들아, 길이 쉬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게으르지 말지니, 이는 우리 조상들에게도 그러하였음이라. 이는 그들이 보면 살도록 그렇게 그들을 위해 예비되었음이니, 우리에게도 그러하도다. 길은 예비되어 있으니 우리가 볼진대 영원히 살리로다.

또 이제 내 아들아, 주의하여 너는 이 거룩한 것들을 간수하라. 참으로 주의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하라.”(앨마서37:40~41, 46~47)

세 가지 작고 단순한 것들

우리의 영원한 목적에 계속 집중할 수 있게 해 줄 “하나님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작고 단순한 방법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세 가지 중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은 없으며, 전에 수없이 많이 들었던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계속해서, 그리고 진정한 의도를 지니고 행한다면, 작은 변화가 아니라 커다란 변화가 올 것임을 간증드립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이 단순한 훈련과 수양 이면의 “왜”라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은 인생에서 이것들을 최우선 순위로 삼을 것입니다.

첫째, 성찬을 들 때, 너무나 자주 우리는 그저 시늉만 합니다. 이 비디오를 보며, 기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 “최후의 특별 유월절 만찬이 끝나가는 즈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것을 행하여 …… 나를 기념하라.”

홀런드 장로: “겟세마네와 골고다로 가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있었던 이 일 이래로, 성약의 자녀들은 더 새롭고 높으며 좀더 거룩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겠다는 성약을 맺어오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물 한 잔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 영적인 고통과 고뇌가 얼마나 컸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항상 물보다 앞서서 떼어지고 축복된 떡 조각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찢긴 살과 상한 마음[을] …… 기억하게 됩니다.

젊은 제사들이 드리는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기도문에서 우리가 듣는 주된 단어는 ‘기억하다’인 것 같습니다.

만약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된 과제라면, 그러한 평범하고 귀한 상징물들이 전달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를 너희는 …… 행할지니, 이것이 너희가 항상 나를 기억함을 아버지께 증거하는 것이 되리라. 또 만일 너희가 항상 나를 기억하면 너희는 너희와 함께 할 나의 영을 갖게 되리라.”

화면: 여러분은 그분을 어떻게 “항상 기억”하시겠습니까?5

언제나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때 그분의 영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함으로써 생기는 복합적인 영향력이 우리 삶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매일 내리는 결정과 다른 이들의 필요 사항을 인지하는 데 어떤 영향을 줄지 상상해 보십시오.

하루 일과 중에 구주를 언제나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어떻게 그분을 항상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 “기도와 경전 공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대답이 맞을 수 있습니다. , 진정한 의도로 그렇게 한다면 말입니다.

기도와 경전 공부는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작고 단순한 것들 중 두 번째입니다.

주님은 그냥 습관으로만 하는 기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분명히 이야기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기도하되 마음의 진정한 의도를 가지고 그리하지 아니할진대, 그것 또한 그에게 간악한 것으로 여김이 되며, 그뿐 아니라 그것이 그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는 하나도 받으시지 아니하심이라.”(모로나이서 7:9)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어떤 권고든 따르겠다는 진정한 의도를 지니고 기도할 때, 그분과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열게 됩니다. “너의 행하는 모든 일을 주와 의논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유익하도록 지도하시리라. 참으로 네가 밤에 누울 때 주께로 누워, 그로 네가 자는 동안 너를 지키시게 하고, 네가 아침에 일어날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네 마음이 가득 차게 하라. 이렇게 하면 마지막 날에 네가 들리움을 받으리라.”(앨마서 37:37)

기도와 경전 공부는 자연스레 함께 이루어집니다. 경전과 현대 선지자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개인적인 계시를 받기 위한 마중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모범들과 경고들은 우리가 갖는 소망에 영향을 줍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발전하고 주님의 생각과 뜻을 알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기도와 경전 공부 같은 작고 단순한 것을 하라고 간절히 요청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 한 가지 이유로는 하루 이틀쯤 건너뛰었다 해서 금방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마치 양치질 하는 걸 잊었다 해서 당장 치아가 모두 썩어 빠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과 대부분은 시간이 지난 후에 옵니다. 하지만 올 것입니다.

수년 전에 저는 같은 높이로 자란 같은 종의 나무 두 그루를 뒷마당에 심었습니다. 하나는 매일 햇빛을 약간만 받는 곳에 심었고 다른 하나는 햇빛을 듬뿍 받는 곳에 심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두 나무의 성장에서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내와 함께 3년간 선교 사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귀환 후에 보니 충격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생겨 있었습니다. 매일 조금 더 많이 받은 햇빛이 만든 복합적인 영향력은 나무의 성장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모든 빛의 근원에 더 우리 자신을 노출한다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변화를 인지할 수는 없겠지만 그 변화는 여러분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백해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매일 목적과 진정한 의도를 지니고 단련하는 것이 복합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단순한 생각이 여러분의 삶 전반에 큰 차이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차이점이란 바로 일상생활을 허덕이며 힘들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크게 성공하고 창조된 목적을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가끔 제 삶을 돌아볼 때면 선교 사업을 결정하기가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제가 한눈을 팔아 영원한 목적을 간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소망과 제 뜻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일치했다면, 그 결정을 내리기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왜 제 뜻과 주님의 뜻이 일치하지 않았을까요?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성찬을 취하긴 했지만, 저는 그 의미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대부분 시늉만 냈을 뿐이었습니다. 경전을 읽었지만 진정한 의도없이 가끔 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의 음성에 따라 의도를 갖고 집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느꼈기를 바랍니다. 영의 음성에 따르십시오. 이미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생각으로 낙담하지 마십시오. 과거지사를 청산하는 것은 주님께 맡겨두십시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마다, 그들은 용서를 얻었느니라.”(모로나이서 6:8; 강조체 추가)

지금 시작하십시오. 의도를 갖고 살아가십시오. 매일 하는 단련의 복합적인 힘을 삶의 중요한 면면에 불어넣으십시오. 약속하건대 지금으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여러분은 오늘 시작해서 정말 기뻐할 수 있고, 아니면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후회할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질문을 고려해 보시길 바랍니다. 소셜미디어에 #ldsdevo를 이용해 여러분의 대답을 나누어 보십시오.

첫째,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 가지 작고 단순한 일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항상 그를 기억하[겠다는]”(교리와 성약 20:77, 79) 성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진지하게 기도하고 경전을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

둘째, 효과가 있을까요? 주님의 약속을 정말 믿으십니까? 항상 영을 동반할 때 생겨 나는 복합적인 영향력이 여러분 삶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믿습니까?

셋째,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일까요?

저는 그것이 가치 있으며 모든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그러한 일들을 할 때,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의 이면에 숨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또한 여러분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온전하게 되고자 추구하며 그분의 뜻을 이해하고 행할 때 커다란 기쁨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 아멘.

  1. Leo Tolstoy, in Peter T. White, “The World of Tolstoy,” National Geographic, June 1986, 767, 790.

  2. 마크 트웨인에게 바치는 헌사.

  3. Tad R. Callister, “Our Identity and Our Destiny” (Brigham Young University Campus Education Week devotional, Aug. 14, 2012), 9; speeches.byu.edu.

  4. “Apology,” The Dialogues of Plato, trans. Benjamin Jowett, 38a.

  5. Always Remember Him”; lds.org/media-library에서 각색; 또한 제프리 알 홀런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67~6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