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 대회에서 부름 받은 새로운 총관리 역원 다섯 명을 소개한다

제공: Church News

  • 2015년 4월 13일

4월 4일에 열린 교회의 제185차 연차 대회의 토요일 오후 모임에서 새로운 총관리 역원 다섯 명이 지지받았다. 그들은 칠십인 제일 정원회에서 봉사할 것이다.

교회 회원들은 4월 4일에 열린 제185차 연차 대회의 토요일 오후 모임에서 다섯 명의 새로운 총관리 역원을 지지했다.

칠십인 제일 정원회에서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역원은 아이다호 주 렉스버그의 킴 비 클라크 장로,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의 앨런 디 헤이니 장로,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 폰 지 키치 장로, 멕시코 소노라 에르모시요의 휴고 몬토야 장로, 몬태나 주 칼리스펠의 번 피 스탠필 장로이다.

다음은 새로운 지도자들의 약력이다. 새로운 각 지도자에 대해 더 자세한 기사가 수주일 내에 게재될 예정이다.

킴 비 클라크 장로와 수 로레인 헌트 클라크 자매 사진: 제프리 디 알레드, Deseret News

킴 비 클라크 장로

학생과 교수로 평생 교육계에 몸 담았던 경험은 킴 브라이스 클라크 장로가 칠십인 제일 정원회에서 새로운 임무를 수행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4월 4일 연차 대회에서 지지를 받은 클라크 장로는 브리검 영 대학교 아이다호의 총장 임무를 마치고 몇 주 후에 봉사를 시작하게 된다.

새로 부름 받은 칠십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다섯 살 이후로 계속 학교에 있었습니다. 저는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1949년 3월 20일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멀린 클라크와 헬렌 마 클라크의 세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 부친의 직장 때문에 워싱턴 주 스포캔으로 이사할 때까지 어린 시절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브리검 영 대학교로 진학할 계획이었지만, 그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하버드 대학교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뒤로 그곳에서 30년 넘게 거주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1학년을 마친 클라크 장로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독일 남 선교부에서 봉사했다. 귀환한 후에 그는 브리검 영 대학교에 등록했으며 얼마 안 있어 그가 속한 와드에서 수 로레인 헌트를 만났다. 두 사람은 몇 달 뒤인 1971년 6월 14일 월요일에 결혼했다.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다. 

결혼하고 곧바로 두 사람은 매사추세츠 보스턴으로 이사했고 클라크 장로는 다시 하버드 대학교에 등록했다. 거기서 그는 경제학 전공으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클라크 장로는 1978년에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가 되었으며 1995년에는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2005년에는 브리검 영 대학교 아이다호 총장으로 임명되어 거의 10년 동안 봉사했다.

클라크 장로는 와드 장로 정원회 회장, 와드 집행서기, 감독단 보좌, 감독, 고등평의원, 스테이크 선교 회장의 보좌, 지역 칠십인으로 봉사했다.

앨런 데커 헤이니 장로와 데보라 루스 헤이니 자매 사진: 제프리 디 알레드, Deseret News

앨런 디 헤이니 장로

앨런 데커 헤이니 장로는 4월 4일 연차 대회에서 칠십인 제일 정원회 회원으로 지지를 받았다.

헤이니 장로는 1958년 8월 29일 금요일에 반 로이드 헤이니와 새라 룰루 루이스 헤이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타 주 로건에서 태어났지만, 청소년기의 많은 시간을 북부 유타와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여러 도시에서 보냈다. 그는 서로 다른 초등학교 다섯 곳, 중학교 두 곳을 다녔으며 고등학교는 유타 주 바운티풀에서 한 곳을 다녔다.

이런 다양한 경험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는 법을 깨우치도록 하며 큰 교훈을 가르쳐주었는데, 이는 해마다 사는 곳이 바뀌고 친구를 계속 다시 사귀어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교회에 대해 제가 좋아했던 점 하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또 다양한 배경 속에서 가치와 경험, 재능과 능력을 발견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선교부에서 봉사했다.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정치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헤이니 장로는 학업을 계속해 1985년에 같은 대학교의 제이 르우벤 클라크 법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소재한 미국 제 9 연방 순회 항소 법원에서 일 년간 법률 서기로 일하다가 래이덤 앤드 와킨스 법률 회사에 합류해 샌디에이고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했다. 약 5년 전에 그는 독립해 친형제와 함께 법률 회사를 열었다.

헤이니 장로는 또한 장로 정원회 회장, 와드 청남 회장, 세미나리 교사, 고등평의원, 감독, 스테이크 회장, 지역 칠십인으로 봉사했다.

그는 브리검 영 대학교 재학 중에 데보라 루스 홀을 만나 1983년 12월 19일 월요일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슬하에는 여섯 자녀를 두었다.

자기 간증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이 뭉클해진 헤이니 장로는 12살 때 처음으로 몰몬경을 읽고 표시를 했다고 말했다. “믿지 않았던 기억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던 기억도 없구요.”

폰 지 키치 장로와 버니스 핌 키치 자매 사진: 제프리 디 알레드, Deseret News

폰 지 키치 장로

폰 지 키치 장로가 미국 대법원에서 워런 이 버거 대법원장과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의 법률 서기를 마치고 개업 변호사로 일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을 때 자신의 일생을 크게 바꾼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수많은 대형 법률 회사에 채용되어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건 일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인 버니스 핌 키치와 함께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 주님께 여쭈었다. 한동안 이렇게 고민한 끝에 두 사람은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가 커튼 맥콩키 법률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키치 장로는 가족 가까이 있기 위해서 최신의 법률 사건을 다루는 자신의 능력을 희생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교회를 위해 일하는 외부 법률 수석 고문으로서 55세인 키치 장로는 종교의 자유에 관한 헌법 관련 쟁점과 판례 사건들을 다루게 되었다. 그는 자국에서 거의 모든 주요 종파를 대표한 경력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큰 고객을 위해 일할 수 있었고 또 그런 큰 쟁점을 다룰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는 1960년 3월 17일 목요일에 유타 주 프로보에서 그레이 키치와 디앤 키치의 네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유타 주 오렘에 살다가 유타 주 플레전트그로브로 이사했으며, 거기서 그는 장래의 아내와 고등학교 세미나리 평의회에서 봉사했다. 

키치 장로는 독일 뒤셀도르프 선교부에서 봉사하며 독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1981년 11월 21일 토요일에 버니스 핌과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두었다. 키치 장로는 1984년에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고 브리검 영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1987년에는 같은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그 후로 키치 장로는 감독단 보좌, 고등평의원, 스테이크 회장, 지역 칠십인으로 봉사하다가 4월 4일 칠십인 제일 정원회 일원으로 지지를 받았다.

휴고 몬토야 장로와 마리아 델 카르멘 발바스트로 몬토야 자매 사진: 제프리 디 알레드, Deseret News

휴고 몬토야 장로

휴고 몬토야 장로가 칠십인 제일 정원회로 부름을 받고서 커다란 부담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새로운 총관리 역원들을 위한 훈련 모임에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하신 다음과 같은 친절한 말씀으로 위안을 얻었다. “여러분은 구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몬토야 장로는 자신이 새로운 부름을 받아 주님의 심부름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고양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구주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가라고 명하신 어느 곳이든지 갈 겁니다. 저는 하라고 명하신 무슨 일이든지 할 것이며, 말씀하라고 명하신 무슨 말이든지 말할 것입니다.” 몬토야 장로는 교회의 제185차 연차 대회의 토요일 오후 모임에서 지지받았다.

몬토야 장로는 또한 가족의 신앙의 유산에서 힘을 얻는다. 그의 증조부인 라파엘 몬로이는 멕시코 교회 역사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1915년 몬로이 형제와 동료 회원인 비센트 모랄레스는 멕시코 혁명 중에 혁명가 무리들에게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다른 요구 조건들 중에 그들의 종교를 부인하면 석방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거부했고 총살을 당했다.

몬토야 장로는 증조부의 모범이 그의 생애에서 여전히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두려운 감정은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신앙과 간증의 감정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몬토야 장로는 1960년 4월 2일 토요일 캘리포니아 프레스노에서 아벨 몬토야와 마클로비아 몬로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멕시코에서 살았다.

그는 에르모시요에서 마리아 델 카르멘 발바스트로와 결혼했으며 1983년 4월 6일 아리조나 메사 성전에서 인봉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다.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멕시코시티 북 선교부에서 봉사한 후 몬토야 장로는 와드 청남 회장, 고등평의원, 감독, 스테이크 회장, 지역 감사자 그리고 지역 칠십인으로 봉사했다.

그는 1986년에 농업 공학 학위로 소노라 주립 대학을 졸업했고 제록스에서 여러 관리직으로 일했으며 교회 교육 기구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번 피 스탠필 장로와 앨리시야 세실 콕스 스탠필 자매 사진: 제프리 디 알레드, Deseret News

번 피 스탠필 장로

번 페리 스탠필 장로는 우연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람들 사이에는 이생에서 만남이 있으며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 마음을 움직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스팬필 장로는 복음 안에서 특히 직접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을 즐긴다.

1957년 8월 8일 목요일에 제드 스탠필과 페기 스탠필 사이에서 태어난 스탠필 장로는 몬태나 타운센드 부근의 소 방목장에서 성장했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것의 가치를 배웠으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키웠다. 네 자녀 중 셋째였던 스탠필 장로는 위로 형이 둘, 아래로 여동생이 있으며, 모두 다 교회에서 충실하게 봉사해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손길이 우리 생활 속에 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 가족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주님이 생활 속에서 함께 하기를 바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프랑스 툴루즈에서 전임 선교사 봉사를 마치고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학위를 받은 후에 그는 앨리시야 콕스를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80년 12월 17일 수요일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졸업 후에 스탠필 부부는 몬태나로 돌아가서 소와 건초, 곡물 운영을 다루면서 가족 목장의 관리를 도울 수 있었다. 그는 1998년에 사업을 매각했고, 자선 관계 및 사유재산 업무를 조직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동산 및 금융 상품을 위주로 사업을 시작했다.

스탠필 장로는 사업과 취미로 비행과 관련을 맺었으며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조정할 수 있는 자격증을 갖고 있다. 

아내와 함께 네 딸을 키우며 스탠필 장로는 교회에서 장로 정원회 회장, 감독, 고등평의원, 스테이크 회장, 지역 칠십인으로 봉사했다. 칠십인 제일 정원회에 부름 받을 당시 그는 칠십인 제육 정원회에서 봉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