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90세를 맞다

제공: 게리 아반트, 교회 소식 편집장

  • 2014년 9월 24일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과 부인 도나 스미스 패커 여사.  패커 회장이 2014년 9월 10일, 90번째 생일을 맞다.  사진: 클린턴 멜란더, (c) 2012 판권 소유.

"저희는 지나간 세월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길은 없으니 생을 유익하게 보내려고 노력했을 뿐이죠. .. 90년을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성취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 항상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5년 전, 85세 생일에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의 한 친구는 그에게 계속해서 생일을 맞으면, 그건 늙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패커 회장은 9월 10일, 90번째 생일에 관한 Church News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계속해서 생일을 맞고 있고, 실제로 많이 늙었죠.”라고 말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서늘한 8월 아침, 패커 회장과 부인 도나 스미스 패커 여사는 집에서 벽난로 가까이에 앉아 생의 10번째 10년의 서막으로 인도한 지난 세월을 회고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 “믿을 수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갑자기 (90번째 생일이) 되었어요. 저희는 지나간 세월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길은 없으니 생을 유익하게 보내려고 노력했을 뿐이죠. .. 90년을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성취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 항상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인 패커 회장은 과거를 돌아보고 시간을 되돌리거나 뭔가를 다르게 할 수 있다면 하고 바라지는 않는다며,

“저는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꽤 만족합니다.”라고 말했다.

도나 스미스와 보이드 케이 패커는 1947년 7월 29일에 결혼했다.
사진 제공: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유타 주 브리검시티에 있는 자택에서 첫 두 자녀와 함께한 보이드 케이 패커와 도나 스미스 패커 부부. 사진 제공: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유타 주 브리검시티에 살 때 10명의 자녀 중 첫 세 자녀와 함께 사진을 찍은 보이드 케이 패커와 도나 패커 부부. 사진 제공: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교육감인 윌리엄 이 배럿(중앙)의 지시 하에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관리자로 봉사했던 보이드 케이 패커(왼쪽)과 에이 시어도어 터틀(오른쪽). 사진 제공: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인도 세미나리 기공식. 사진 제공: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관리자로 봉사할 당시 임무 수행차 부인 도나를 데리고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사진 제공: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2012년 9월 23일 유타 주 브리검시티 성전 헌납식에서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과 부인 도나. 사진: 게리 아반트

일곱 아들과 세 딸과 함께 가족 사진을 찍은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과 부인 도나 에스 패커 자매. 사진: 클린턴 멜란더, (c) 2012 판권 소유.

패커 회장이 느끼는 만족감의 대부분은 그들의 10자녀와 60명의 손주, 그리고 103명의 증손주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비롯된다.

이제 모든 자녀가 장성해 그네들의 자녀와 손주들을 데리고 돌아온다고 패커 회장은 말했다.

패커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애들이 저희를 도와줍니다. 늙으면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패커 회장]은 소아마비가 재발해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패커 자매가 언급한 소아마비는 아이라 패커와 에마 패커 부부의 11자녀 중 10번째로 태어난 보이드 패커 회장이 5살이던 때 앓았던 병이다. 당시에는 폐렴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으며, 패커 회장은 한동안 걷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는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 전신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야 기형적 무릎과 골반뼈에서 소아마비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패커 회장을 정의할 단어를 한 가지 고르자면, 아마도 “교사”일 것이다. 가정에서, 직업인 세미나리 교사 및 교육감으로서, 선교부 회장으로서, 총관리 역원으로서뿐만 아니라 친구 및 이웃으로서도 그는 교사였다.

“저는 지식과 간증에 관한 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패커 회장은 자신이 가르쳤거나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제 자녀에게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복음에 대한 간증을 갖는 것입니다.”

그는 특히 몰몬경 가르치기를 좋아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대에서 복무할 때 몰몬경을 재발견하고 간증을 얻었다. “참으로 결정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공군에서 5년간 복무하면서 저는 몰몬경을 탐독했고, 이는 제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브리검시티에서 세미나리 교사로 재직할 때 그는 구약전서, 신약전서, 교회사 등의 교회 교과 과정을 가르칠 당시 추가로 몰몬경 새벽반을 가르쳤다. 그가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관리자가 되자, 몰몬경이 교회 전체 세미나리 교과 과정에 포함되었다.

패커 회장은 이상적인 귀감이 되는 교사인 동시에 끊임없이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하다. 그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계발을 위해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1970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지지받은 이래 수행해 온 수많은 임무 중에 컴퓨터로 경전 검색을 가능하게 하는 데이터베이스인 “경전 통합 자료”가 있다.

성구를 쉽게 찾을 수 있자 복음 지식을 더하고 신앙과 간증을 증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노력에 따른 혜택 중 하나이다.

패커 회장은 경전과 복음 진리에 기반을 두고 가르친다. 비판하는 자들이 뭐라고 하건 “있는 그대로 말하는” 사람으로 평판이 높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 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동조하는지는 신경쓰지 않는다며 “듣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진정성이 사라집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패커 자매는 남편이 자신은 주님의 종이며, 영의 속삭임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패커 회장이 말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을 말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연단에 선 모습만으로는 잘 알 수 없는데 그분은 유머 감각이 아주 뛰어나죠. 아주 좋은 아버지였고, 어떤 식으로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배려하고, 사려 깊은 다정한 사람입니다.”

패커 회장의 유머 감각은 자신이 가르칠 때 가르치는 이유에 관해 언급한 일화에 잘 드러난다. “저는 여러분이 단 한 번이라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의 한 지인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패커 회장이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화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