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포용의 교리
2001년 10월


포용의 교리

“우리가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모든 이웃에게 언제 어느 때나, 사랑과 이해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오늘처럼 아름답고 청명한 가을 날이었을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앉으셔서 몇몇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을 때 “어떤 율법사”로만 알려진 한 사람이 일어나 그분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을 아셨고, 그 질문에는 모세의 율법에 반하는 말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간파하셨습니다.

구세주는 그 질문에 대해 두 가지 질문으로 응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대로, 그 율법사는 그 율법을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께서 이르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나 그 율법사는 그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신앙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는 것에 대해 유대인 사이에는 엄격한 규칙과 믿음이 있었던지라, 그는 논쟁을 벌여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계속 더 많은 대답을 원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이오니까”

다시 한 번 가르침이 주어질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즐겨 사용하셨던 가장 효과적인 교수법 중에 하나인 비유로 답하셨습니다. 아마 이 비유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많이 인용되는 비유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비유를 알고 계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들을 만나 거반 죽은 채로 버려졌습니다. 어떤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 다른 쪽으로 피하여 지나갔고, 레위인 또한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런 후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가 대답했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결론적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누가복음 10:25~37)

저는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그 힘과 간결함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구세주께서 왜 사마리아인을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셨는지 궁금하게 여겨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상당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보통 이 두 민족은 서로 만나기를 회피했습니다. 강도들을 만나 쓰러진 사람이 형제 유대인에 의해 구해졌더라도 이것은 여전히 훌륭하고 교훈적인 비유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언급하신 것은 우리는 모두 이웃이며 종교나 정치, 문화를 비롯한 어떤 차이에도 상관없이 서로를 사랑하고 높이 평가하며 존중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교훈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가르침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회복된 교회의 핵심 교리를 열거하며 요셉 스미스는 “우리는 자기 양심의 지시에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특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우리는 또한 “사람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어디서나 어떤 모양으로나 혹은 무엇이라도 예배할 수 있는 똑같은 특권이 허용된다”고 말함으로써 그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신앙개조 11조)

감사하게도 대다수의 회원들이 이 교리를 이해하며 일상 생활에서 그 원리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이곳 유타 주의 한 지역 사회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죽음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젊은 미망인이 한 말이 인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쏟아지는 지원의 손길에 감격했습니다. 우리는 몰몬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 지역의 와드는 우리에게 음식과 도움과 위로의 말 등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The Provo Daily Herald, “Former Ute’s Death Leaves Wife Coping, Wondering”, Aug. 11, 2001, A3)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렇게 해야 할 바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모든 이웃에게 언제 어느 때나, 특히 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사랑과 이해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최근 처치 뉴스에는 친한 친구인 두 여인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사람은 뉴욕에서 온 유태인 내과 의사이고 또 한 사람은 유타에서 온 여섯 자녀를 둔 평범한 [말일성도] 가정 주부였는데, 이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만났습니다.” 우리 회원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우정이 컴퓨터 소개 서비스를 통해 이뤄졌다면, 첫번째 장애물조차 통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의료 업무에 종사하는 바쁜 여성이 학부모—교사 연합회에 쓸 접대용 냅킨 색깔에 대해 의논하고 싶어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무언가를 지레짐작하는 일의 재미있는 점은,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무성하게 자라났을 어떤 것의 뿌리를 잘라내버린다는 점입니다. 지레짐작하지 않았던 것에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Unlikely friends sharing a lifetime”, Church News, August 18, 2001, 10)

선입견에 의해 지레짐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불공정한 일입니다. 우리 회원들 중에서도 모든 이웃에게 친근한 미소와 따뜻한 악수와 사랑에 찬 봉사를 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이웃으로 이사 오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와 회원에 대해 이미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이웃은 종교나 국적, 민족, 또는 문화 등에 상관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친절히 대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때때로 저는 회원들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함으로써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일은 특히 우리 회원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이웃이 우리 교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이웃의 아이와 놀지 말라고 말하는 편협한 마음을 가진 부모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회원이 어떻게 그런 일들을 행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평생 이 교회에 몸담아 왔습니다. 전임 선교사, 두 차례의 감독, 선교부장, 칠십인으로 봉사했고 지금은 사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배타의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으며 그러한 가르침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친구들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고 인자하게 대하라고 이 교회 회원들에게 권고하는 말 외에는 어떤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부모 여러분, 종교나 정치나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배타가 아니라 포용의 원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스스로 실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음이 요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선포하며, 신앙과 간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권고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사람들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정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고든 비 힝클리 대관장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갖는 특별한 책임을 되풀이하여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를 인용하겠습니다. “우리 각자는 한 개인입니다. 우리 각자는 다릅니다. 그러한 차이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

“… 우리가 신봉하는 교리나 철학에 상관없이 서로에 대한 관용과 존중, 자제의 태도를 키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리나 철학에 관해 여러분과 저의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정중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Teachings of Gordon B. Hinckley, [1997], 661, 665쪽)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들은 우리가 일부 사람들에게 특이한 사람들(베드로전서 2:9 참조)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리와 믿음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소중히 간직합니다. 저는 일순간이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의 특이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의 유일성은 세상 사람들이 명확한 선택을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을 영적인 위험에 빠뜨릴 어떠한 관계를 맺으라고 제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회복되었다는 우리의 교리를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우리의 신앙에 속하지 않은 이웃들은, 선하고 훌륭하게 되고자 노력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선함과 훌륭함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들 또한 우리처럼 가족을 돌봅니다. 그들 또한 우리처럼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처럼 그들도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며 관대하고 충실합니다. 약 25년 전에, 대관장단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 종교적 신념이나 종족,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남자와 여자의 영원한 복리를 위한 특별한 사랑과 관심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딸이기에 진정 형제요 자매입니다.”(대관장단 성명, 1978년 2월 15일)

이 메시지가 우리의 교리, 곧 포용의 교리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배워온 것입니다. 이 교리로 인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사랑이 많고, 가장 친절하며, 가장 관용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이웃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간단한 세 가지 일을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첫째, 이웃과 알고 지냅시다. 그 가족들과 그들의 일과 견해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함께 어울리되, 강압적으로나 다른 의도를 갖고 그렇게 하지는 맙시다. 우정은 결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정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유타 주로 이사 온 한 여성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밸라드 장로님, 이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웃에게 인사를 할 때나 손을 흔들 때, 그들은 제 인사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아침에나 저녁에 산책을 하며 그들 옆을 지날 때, 그들은 제 인사에 응하지 않습니다. 다른 유색인들도 자신들의 친절한 태도에 대해 그와 비슷한 부정적인 반응들을 받았다고 일관되게 말합니다.” 그녀의 이웃 중에 교회 회원들이 있다면 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른 배경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상호 신뢰와 이해가 수반된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합시다.

둘째, 비회원이나 비몰몬과 같은 우리가 사용하는 몇 가지 언어 습관을 없앴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표현은 품위를 떨어뜨리고 심지어 경시하는 느낌을 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 자신이 “비카톨릭” 혹은 “비유대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입니다. 저는 그렇게 구분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아닌 것으로 구별되기 보다는 제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에 의해서 구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같은 예의를 보입시다. 일반적인 통칭이 필요한 경우, 대부분 “이웃”이라는 말이 적절한 듯 합니다.

셋째, 이웃이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나 우리가 도덕적인 이유로 지지하는 일부 법률에 대한 의견 차이로 화를 내거나 좌절감을 표시할 때, 농담일지라도 결코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교회 회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개척자 조상들은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진 이웃들에 의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쫓겨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믿었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과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역사로부터 다른 것을 못 배웠다 해도, 모든 사람에게는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 만큼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진 모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염려되는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교리와 가르침은 주님이 세우신 것이기에 때로 여러분과 의견을 달리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서로 반목하지 않으면서도 의견을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사회에서 우리는 예의와 존중과 정중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일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곳 유타 주에서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시민들이 “화합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이고 다른 교회들과 조직들이 이러한 노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 중 하나는 “다른 관점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지역 사회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이웃들이 모두 공동의 선을 위해 함께 서야 할 가장 중요한 때일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육체적 영적 속죄의 과정들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구세주는 사도들과 만나 유월절의 만찬인 최후의 만찬을 함께 드시며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들은 그분이 지상에 살아계시는 동안 자주 주셨던 것들입니다. 이 가르침 중에 심금을 울리며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어떤 율법사”를 포함한 그의 제자들에게 주셨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살아계신 예언자와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차이점이 극심하더라도 서로에게 친절하십시오. 존중과 정중한 태도로 서로를 대하십시오. 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구세주요, 구속주이심을 간증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더욱 좋은 이웃이 되라는 훈계에 따르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