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높이 일어서라
2001년 10월


높이 일어서라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높이 서는 사람의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고결, 힘, 용기를 구현한 분이십니다.”

한 지혜로운 분은 종종 이런 간단한 충고를 들려주었습니다. “데이비드, 높이 일어서라.” 제 아버지는 제 키가 조금 더 자라거나 제가 발 끝으로 서기를 기대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제가 결정을 내릴 때 원칙을 굽히거나 영적인 가치들을 더럽히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충고에 따랐을 때 제 인생의 일들은 잘 풀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의 인생은 대체로 즐겁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저는 어린 손자 두 명에게 만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높이 서라고 하신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습니다. 한 아이는 보다 크게 보이고자 뒤꿈치를 들고 섰습니다. 두 아이 모두 한 목소리로 “그분은 우리가 옳은 일을 하기 원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9월 11일의 크나큰 고통과 혼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국가들은 높이 일어섰습니다. 적과 친구가 공동의 적에 반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흔치 않은 용감한 행동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적 지원이 끝없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인종과 종교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손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기도가 행해졌습니다. 선을 위한 힘이 테러나 무분별한 파괴 행위에 반대하여 높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기회주의자도 결국에는 이편이나 저편에 서야 할 때가 옵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인생의 담장 위에 앉아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용기를 내어 의의 편에 당당히 서며 죄의 족쇄를 떨쳐 버릴 때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역과 가르침은 자기 성찰을 위한 표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높이 서는 사람의 완전한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고결, 힘, 용기를 구현한 분이십니다. 구세주의 성역에서 세 가지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침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광야에 가서 아버지와 교통하라는 영의 속삭임을 들었습니다. 필멸의 육신이 신성한 영에게 온전히 굴복하게 하고자 40일 동안 금식하기로 하셨습니다. 육신이 허약해졌을 때, 사탄이 찾아와 구세주의 위대한 권세를 사용하여 놀라운 묘기를 보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굶주린 육신을 구하라는 사탄의 유혹에, 구세주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4)고 응답하심으로써 높이 서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의 손으로 받들게 하라는 말에, 그분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복음 4:7)고 굳세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부귀 영화를 주겠다는 말에, 그분은 용감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10)

사탄의 교활한 유혹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질”의 추구가 일부 사람들을 원리로부터 멀어지게 유혹해 왔습니다. 필요와 욕구를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흐려졌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애정과 인정과 지도력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층 더 많은 물질적인 재산을 획득하기 위해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며, 때로는 불법적인 방법에 매달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물질적인 것들의 추구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용기있게 높이 일어설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중히 하기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물품들을 경배하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높이 일어설 때입니다. 필요 이상의 풍요를 축복 받았다면, 지금이야말로 높이 일어서서 필요 사항이 충족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눠 주어야 할 때입니다.

둘째, 구세주께서 한 번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15:10~11)

평범하게 사용하는 일상 언어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습니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외설적이고 저속한 말을 흔히 사용하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젊은 친구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이 사용하는 어휘에서 이런 말들을 없애기 위해 높이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어떤 말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학교에서나, 음악이나, 스포츠에서 그러한 말들이 계속해서 거듭 사용되는 것을 듣습니다. 높이 일어서려면 용기가 필요할까요? 물론입니다.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십시오. 구세주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라. 그리하면 나는 네게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교리와 성약 19:38)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릎을 꿇은 동안 가장 높이 선다.”(“Standing Tall”, New Era, Oct. 2001, 19) 모독적인 언사와 무례함은 우리를 드높이지 않고 더럽힐 뿐입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청소년 체육 행사에 수백 차례 이상 참여해 왔습니다. 모범이 되어야 할 코치들과 성인들이 불경스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들었습니다. 성인들은 저속하고 모독적인 언어를 제거하는 일에 높이 일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네 행동이 크게 말하니, 네 말을 들을 수가 없다.” 우리의 행동은 자신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단정하게 옷을 입으라는 예언자들의 권고에 따르는 일에 높이 일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단정치 못한 옷차림으로는 짧은 상의와 치마, 몸에 꼭 끼는 바지, 배를 다 가리지 않는 셔츠, 기타 노출이 심한 복장을 들 수 있습니다.”(청소년의 힘을 위하여, 8쪽 참조) 단정하고 깔끔하고 청결한 옷은 품위를 높여줍니다. 단정하지 못한 옷은 품위를 떨어뜨립니다. 의심이 든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이 모습으로 주님의 면전에 선다면 마음이 편안할까?”(청소년의 힘을 위하여, 영문) 어머니 여러분, 이 중요한 문제에서 여러분은 우리의 모범과 양심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청소년들은 갓 구운 신선한 빵 냄새를 맡듯 쉽게 위선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부모 여러분, 자녀들에게 권고하고 그들과 함께 단정하지 못함에 대항하여 높이 서는 일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셋째,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는 율법사의 질문에 구세주께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을 하던 중 강도에게 매맞아 거반 죽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처음 그 옆을 지나가게 된 사람은 제사장이었는데, 그는 고개를 돌리고 길의 다른 편으로 지나갔습니다. 곤경에 처한 그를 발견한 그 다음 사람도 그를 보기는 하였으나 역시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고 지나쳐 갔습니다. 사마리아인이던 세 번째 사람은 상처를 매어 주고 그를 보살피기 위해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자비를 보여 준 사람이 이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구세주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37, 30~37 참조)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그들의 필요 사항뿐 아니라 느낌에도 민감합니까? 우리의 이웃은 선택적으로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국한됩니까, 아니면 종교와 피부색 혹은 기타 차이점에 상관없이 포괄적입니까? 구세주께는 이웃의 정의에 어떠한 단서도 붙이지 않으십니다. 때로 우리 교회의 독특한 용어들은 우리 이웃에게 오해를 받거나, 무감각하고 생색을 내는 듯이 들릴 수 있습니다. 어제 밸라드 장로님이 제언하신 것처럼, 저도 비회원이란 용어에 거북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비회원이라 일컬을 때, 그들은 마치 우리가, 그들을 우리 지역 사회나 도시, 혹은 심지어 인류 사회의 일원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 관계에서 너그럽고 관용적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가까스로 묵인하는 정도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웃에게 분명한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높이 서도록 합시다.

우리 가족과 친하던 한 친구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부인과 함께 등산을 즐겼습니다. 어느 가을 오후, 그들은 가파른 산등선을 수 킬로미터나 올라 아름다운 폭포에 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올라가던 몇몇 등산객과 마주쳤는데, 그들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가볼 만합니까?” 친구의 대답은 언제나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후에, 신선한 공기와 산의 아름다움, 운동, 동반자와의 사랑을 즐긴다면 그러한 노력이 가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료들에게 심한 압력을 받으며, 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를 느끼는 분들은 “높이 일어서기 위한 노력이 가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 질문에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영생이 여러분에게 중요하다면, 이생에서 여러분이 참 기쁨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높이 서는 것은, 그 요구대로 결심하고 매일같이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의의 편에 높이 일어서기를 기원하며, 주님이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