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우리의 삶을 높이는:주 닮은 우리 친구들
2005년 4월


우리의 삶을 높이는:주 닮은 우리 친구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의 필요 사항을 아시며 우리에게 서로 도우라고 속삭이시고 종종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몇 주 전에 남편과 저는 성전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들어가면서, 성전 봉사자이자 같은 와드 소속인 소중한 친구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그 영접을 시작으로 우리는 멋진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에 다니던 와드의 친구들, 지역 사회의 친구들, 여러 부름에서 함께 봉사했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제가 기억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봉사를 받았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젊은 여성으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그녀가 말을 하기 시작하자 즉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청녀 회장을 맡았을 때 가르쳤던 월계반의 청녀 로빈이었습니다. 우리가 담소와 추억을 나누며 그동안 서로에게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할 때, 그녀는 청녀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큰 친절에 감동을 받고, 제 인생의 전반에 걸쳐 친구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깨달으며 성전을 나왔습니다. 주님은 때때로 제 영혼에 감화를 주셨는데, 종종 그분의 손길은 친구의 손을 통해 제게 왔습니다.

38년 전 이 무렵, 딘과 저는 신혼 부부였으며, 우리는 저의 부모님을 뵙기 위해 뉴 멕시코로 갔습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저희를 데리고 주 북쪽에 있는 산으로 하루 코스의 등산 여행을 가셨습니다. 오후에, 우리는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길가에 정차해 있는 차 한 대를 보았습니다. 그 운전자는 아버지에게 스페어 타이어까지 바람이 빠졌기 때문에 타이어 수리를 위해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갈 차편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차 안에 타고 있던 그 운전자의 가족을 보시더니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내까지 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거요. 당신 타이어와 내 타이어의 사이즈가 똑같으니 내 것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다음에 앨버커키에 오거든, 타이어를 돌려 주시오.” 이 낯선 사람은 그 제안에 매우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모르시잖아요?” 늘 그렇게 하시듯 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오. 그렇지 않소? 당신은 타이어를 다시 가져올 거요.”

몇 주 후에 저는 아버지에게 그 스페어 타이어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타이어를 돌려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90세가 되신 제 아버지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십니다. 대부분 아버지 나이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서 무료 식사 제공을 받지만, 제 부친은 “나이 드신 분들”께 음식을 갖다 드립니다. 아버지는 종종 아프거나 임종이 가까운 친구들의 침대맡을 지키십니다. 전기톱을 가지고 다니시면서 로터리 클럽 회원들의 연례 미화 작업을 돕기도 하십니다. 아버지의 삶과 행동들을 생각할 때, 저는 패커 회장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그분은 “복음 안에서 활동적입니다.”(“인생의 황혼기”, 리아호나, 2003년 5월호, 83쪽) 그분의 삶은 찬송가에서 말하듯이, 선한 영향을 주는 삶이며, 그 영향 속에서 우리 모두는 풍요로워졌습니다.(“선한 영향 주는 삶”, 찬송가, 173장 참조) 제 부친은 우정을 알고 계십니다.

상호부조회 회장단으로서,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아마 자신을 보살피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주님의 손길을 찾아본다면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더욱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부나 와드 회원, 이웃, 심지어 그들을 축복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이는 낯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헨리 비 아이어링 장로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은 구세주를 대표하는 부름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간증하는 음성은 그분의 음성과 동일한 것이 되며, 다른 사람들을 고양시키는 여러분의 손길은 주님의 손길과 동일한 것이 됩니다.”(“자신의 부름을 수행하십시오”,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76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고양시킬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도 고양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가정 복음 교사는 매달 충실하게 홀로 된 연로한 자매님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단지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매년 가을이 되면 자매님의 냉난방기를 수리하고 난로의 필터를 점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일까요? 아니면 가정 복음 교사의 사랑일까요? 답은 물론 둘 다입니다.

우리의 신앙 키우며

우리의 삶을 높이는

주 닮은 우리 친구들

주께서 주신 큰 은사

(찬송가, 173장)

저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비롯해 우리가 다녔던 모든 와드에서 우리 가족을 축복해 준 많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헌신, 봉사, 현명하고 온화한 가르침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제 친구들 중 일부는 저와 매우 다릅니다. 우리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며 서로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며, 사실은 그 차이들을 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양한 배경, 나이, 민족적 태생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스테이크를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저는 지금 파킨 자매님과 핑그리 자매님, 그리고 보조 조직 회장단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봉사하면서 매우 특별한 우정과 자매애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훌륭한 여성들입니다. 제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삼 년을 함께한 지금, 사랑하는 자매님들은 저를 잘 압니다. 그들은 저의 신앙과 간증을 알지만, 저의 불안과 걱정도 또한 잘 압니다. 그분들은 제가 오랜 훈련 여행으로 피곤할 때, 저의 모습이 최상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의 사랑과 인내를 느끼며 그들이 여전히 저의 가장 좋은 면을 봐 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의 간증과 기도는 저를 강화시켜 주고 그들의 웃음은 저의 하루를 밝혀 줍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자매들입니다.

제 가족과도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제 여동생 중 한 명이 지난 몇 달 동안 암으로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살지는 않지만 전화를 통해 가까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 어려운 시련을 겪는 동안 우리는 사랑, 기도, 추억과 감미로운 간증들을 나누었습니다. 제 자매들은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남자 형제들도 그렇습니다. 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손자들도(그들이 아무리 소란스럽더라도) 그렇습니다.

복음이 회복된 초기에, 새로운 회원들은 “시온”을 세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시온은 장소인 동시에 목적, 즉 영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같은 방식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지부와 와드가 우리의 시온입니다. 그러나 와드와 지부는 회원들이 서로를 돌볼 때에만 시온의 영을 지닙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감정이 상한 교회 형제 자매들이 다른 회원들에게서 멀어지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어려운 문제를 겪고 있다면, 여러분이 상처를 준 쪽이든 받은 쪽이든,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에서 여러분이 해결해야 할 부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가 되라. 너희가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나의 것이 아니니라.”(교리와 성약 38:27)

저는 최근에 요셉 스미스에 관해 질문했던 한 여성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부름과 임무에 대해 분명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말을 하면서, 저는 주님께서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실하게 [나의 종 요셉]의 편이 되라.”(교리와 성약 6:18) 저는 그 날과 제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저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가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녀는 요셉의 편이었다.” 저는 그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요셉 스미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정은 ‘몰몬이즘’의 기본 원리 중 하나입니다. 이 원리는 세상을 개혁하고 교화하며, 전쟁과 분쟁을 그치게 하고, 인류가 친구와 형제가 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History of the Church, 5:517) 또한, 그는 우정이 추상적 개념 이상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형제의 집이 적들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 회원들이 그에게 안됐다고 말했을 때, 예언자는 그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형제에 대해 5달러만큼의 동정심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동정심을 느끼십니까?”(Hyrum L. Andrus와 Helen Mae Andrus 편찬, They Knew the Prophet, [1974년], 150쪽)

우리는 우정에 대해 예언자 요셉이 느꼈던 것처럼 느낍니까? 우리는 우리의 호의를 실질적인 도움으로 전환시킵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의 필요 사항을 아시며 우리에게 서로 도우라고 속삭이시고 종종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 속삭임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답하시는 주님의 대리자로서 봉사할 기회를 허락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언자 요셉의 친구라면, 우리는 구세주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주께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찬송가, 173장 참조) 요셉 스미스는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 때가 찬 경륜의 시대의 안내자였던 요셉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인류에 대한 그의 우정을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주님에 대한 그의 우정과 헌신도 기억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 제 운명에 만족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분 안에서 저는 위안을 찾을 것입니다.”(The Personal Writings of Joseph Smith, 편찬 Dean C. Jessee [1984년], 239쪽)

우리는 각자 자신의 궁극적인 우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구세주는 우리에게 애정을 갖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친구라 부르리라 …”(교리와 성약 93:45) 그분의 형제 자매인 우리에 대한 그분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를 다시 아버지께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은 분명합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특성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분의 일과 뜻을 행하십시오.

제가 성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랑하는 친구들로부터 영접 받은 날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사도 그렇게 축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처럼 보이는 일면을 느꼈으며, 그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채워 줍니다. 저는 또한 모든 연령대로 구성된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이 함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는 와드와 지부를 그려봅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간증을 드립니다.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제가 항상 그분의 친구가 되길,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또한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