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바벨론 가운데 있는 시온
2006년 4월


바벨론 가운데 있는 시온

우리는 바벨론의 기준과 관습과 윤리 표준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바벨론 가운데 시온을 세울 수 있습니다.

지난 여름, 저와 아내는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를 여행하며 그곳에 있는 올드 글로브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관람했습니다. 저희 딸 캐롤린이 이 연극에 등장하는 세 명의 마녀 중 하나로 출연했기에 우리는 그 공연을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딸의 연기를 보는 것도 물론 즐거웠지만, 그 아이가 다음의 유명한 대사를 읊던 극적인 순간에는 더욱 기뻤습니다. “내 엄지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니, 무언가 사악한 것이 이리로 온다”(4막 1장, 40~41행)

그 대사를 들었을 때 저는 악이 다가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대비하도록 해 주는 조기 경고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유용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악은 우리가 조기 경고 시스템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후 아내와 저는 차를 몰고 전국을 횡단하던 어느 날 밤 매우 큰 도시 근처에 이르렀습니다. 언덕 위에서 지평선을 따라 펼쳐진 밝은 불빛들을 보았을 때 저는 살며시 아내를 깨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벨론 성을 보라!”

물론 오늘날 바벨론을 상징하는 특정 도시는 없습니다. 바벨론은 고대 이스라엘 시대의 세속적이고 퇴폐적이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 있었던 주요 건물은 우리가 종종 벨 또는 바알이라고 부르는 거짓 신을 위해 지어진 신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속성, 타락, 퇴폐, 그리고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일은 전세계 곳곳의 크고 작은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주의 의를 세우기 위하여 주를 구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길로, 또 자기 자신의 신의 형상을 따라 걷나니, 그 형상은 세상의 모습이요, 그 실체는 우상의 것이니, 점점 낡아져 바벨론 곧 무너질 대 바벨론에서 멸망하리라.”(교리와 성약 1:16)

너무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고 세상의 형상을 지닌 신을 따르면서 옛 바벨론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일반적으로”라는 말은 인기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바벨론 가운데 있는 시온. 영적인 어둠 가운데서 비치는 빛으로서 이 얼마나 밝고 빛나는 문구입니까! 바벨론이 더욱 널리 확산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그 얼마나 중요한 생각입니까!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지역 사회에서, 그리고 도처에서 바벨론을 봅니다.

바벨론이 영역을 넓혀가는 이때 우리는 그 가운데 시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사악한 영향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시대의 영향을 얼마나 크게 받고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 주님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바다에 둘러싸인 참된 하나님의 섬 같았습니다. 바다의 파도는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해안으로 밀려왔습니다.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표면상 시대와 장소에 따른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선지자와 제사들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방 신상을 찾아다녔으며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을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성행하는 문화에 끊임없는 압박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교활한 문화 한 가운데에 살고 있는지요. 그것은 우리의 환경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 독일인들이 시대 정신(zeitgeist)이라고 명명한 사회의 기풍, 또는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와 장소의 문화를 따르면서 스스로가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저는 10곳의 다른 나라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시대 문화와 행동 양식의 영향력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에서는 너무나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의 정중한 언어가 다른 곳에서는 혐오스럽게 여겨집니다.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은 자기 만족, 자기 기만이라는 보호막 안에서 사물을 보는 자신의 관점이 그 사물의 실제라고 온전히 믿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먹고 입는 것, 예절 바른 행동, 즐겨야 할 스포츠, 좋아해야 할 음악, 교육의 중요성, 정직에 대한 우리의 자세 등을 결정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남성들에게 오락이 중요한가, 종교가 중요한가에, 여성에게는 직업이 우선인가, 자녀 양육이 우선인가의 문제에 영향을 주며, 우리의 생식과 도덕적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 우리의 문화가 무엇이 “좋은 것”인 지를 결정할 때 우리는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같습니다.

그곳에는 물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대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시대 사조,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문화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9)

이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교리와 성약 84:44) 사람들의 시대의 문화입니다. 만약 이 문화가 우리를 독특하게 만든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맨해튼 성전 건축에 참여하면서 저는 이 성전을 헌납하기 전부터 자주 그곳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분주한 뉴욕 거리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고요 속에서 해의 왕국실에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대도시의 소음과 혼란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성전이 어떻게 그처럼 경건하고 고요할 수 있겠습니까?

답은 바로 성전의 설계 양식에 있습니다. 그 성전은 현존하는 건물 벽 안에 지어졌으며 성전 내부 벽은 외부 벽과 단지 몇몇 접촉 부위에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전(시온)이 바벨론, 또는 바깥 세상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바벨론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여 우리 가운데 참된 시온을 세울 수 있습니다.

기원전 600년 경, 바벨론에서 온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정복했으며 주님의 백성을 데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들 중 젊은이 몇 명을 택하여 특별 교육과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들 중에는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으로 끌려 온 소년들 중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그들에게 왕의 고기와 포도주를 먹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이 네 명의 소년들이 처한 곤란한 처지를 명확하게 이해해 봅시다. 그들은 포로가 되어 정복자의 힘에 의해 끌려왔으며 자신들의 생사권을 지닌 왕족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다니엘과 그의 형제들은 바벨론 문화에서는 옳다고 믿지만, 그들이 믿기에는 잘못된 것들을 거부했습니다. 이 충성심과 용기에 대해 주님은 축복을 주셨으며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다니엘 1:17)

우 리는 종종 우리 문화에 매혹되어 바벨론인들의 세상에서 유행하는 것들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우리가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참으로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중요해” 라고 말한 시인 워즈워스의 말과 같습니다.”(“The World Is Too Much with Us; Late and Soon,” in The Complete Poetical Works of William Wordsworth [1924년], 353쪽).

요한은 첫 번째 서한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한1서 2:14~15)

우리는 바벨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시온이라는 특정한 지리적인 장소로(적어도 지금 당장) 대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벨론 가운데서 시온을 건설하고자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바벨론의 기준과 관습과 윤리 표준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바벨론 가운데 시온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음악, 문학, 춤, 영화, 언어에 있어 우리만의 표준을 만들 수 있습니다. 복장과 행실, 예절과 존중에 대해 우리 자신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덕적인 율법에 따라 생활할 수 있으며 대중 매체를 적절히 조절하여 가정에 바벨론의 영향이 들어오는 것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원할 경우, 우리는 시온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어려울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문화의 파도가 쉴 새 없이 우리의 해안으로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용기가 필요할까요? 물론 그럴 것입니다.

용기에 관한 이야기, 불가능한 시련에 맞서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우리를 감탄하게 합니다. 용기는 우리의 모든 덕의 근본이요, 기초이며, 용기가 부족할 경우 우리가 가진 모든 다른 미덕은 감소합니다. 우리가 바벨론 가운데 시온을 세워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시험의 순간이 올 때 여러분이 용감한 행동을 할 것이라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소년 시절에 그런 상상을 해 보곤 했습니다. 누군가가 위험에 빠졌을 때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구해냈다고 상상했습니다. 또는 무시무시한 적들과의 위험한 대결에서 용감하게 맞서 이겼다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어린 시절의 상상입니다!

근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저는 만약 그런 영웅적 기회가 만에 하나 오게 되더라도 극히 드물게 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미묘한 압박으로, 심지어 친구들까지 시대의 우상 숭배를 부추길 때, 올바른 것을 위해 맞설 기회는 훨씬 더 자주 옵니다. 그러한 행동을 촬영하는 사진사나 신문 일면의 기사를 낼 기자는 없을 것입니다. 단지 양심의 조용한 명상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용기의 시험에 맞섰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시온이냐, 바벨론이냐?

속지 마십시오. 전부는 아니더라도 바벨론의 대부분은 사악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경고하는 엄지손가락들의 떨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파도는 계속 우리의 해안으로 밀려옵니다. 시온입니까? 바벨론입니까?

바벨론이 세상의 도시라면, 시온은 하나님의 도시입니다. 주님은 시온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시온은 해의 왕국의 율법의 원칙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세워질 수 없나니”(교리와 성약 105:5) “무릇 시온은 이것이니-마음이 청결한 자라”(교리와 성약97:21).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느 도시에 살든,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해의 왕국의 원리에 따라 우리만의 시온을 세울 수 있으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할 수 있습니다. 시온은 아름다우며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시온과 마찬가지로 피난과 보호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와 장소에 관련된 문화의 손 안에 든 꼭두각시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주님의 길을 따르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시온이라 불릴 것이며 주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바벨론의 맹공격에 저항할 힘을 갖고 우리의 가정과 지역 사회에 시온을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로, “바벨론 가운데 있는 시온”을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시온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곳이 우리의 구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우리의 주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온 안에서, 그리고 시온으로부터 빛나는 밝은 빛이 비칠 것이고,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살피시리라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