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그리스도인의 용기: 제자로서의 대가
2008년 10월


그리스도인의 용기: 제자로서의 대가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구주의 방법으로 대응함

우리는 함께 하나로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드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구주를 사랑하는데도 왜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고 공격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총명하고 충실한 후기 성도 젊은이 그룹이 그들의 마음 속에 가장 궁금한 질문들을 적었습니다. 한 자매는 “ 교회에 대한 비난이 있을 때 왜 교회가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저는, 이 생의 큰 시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믿음이 의심 받고 비난 받을 때 온다고 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주먹을 치켜들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발 물러서서, 기도하고 구주의 모범을 따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세상으로부터 멸시 받고 거절 당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리하이의 꿈에서, 구주께 나아온 사람들 또한 “[조롱과 … 손가락질을]” 견뎠습니다.(니파이전서 8:27) 예수께서는 “세상이 [내 제자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7:14)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구주께서 하셨던 것처럼 대응한다면, 우리는 좀더 그리스도처럼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을 따르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리 원고를 준비하거나 공식에 기초할 수 없습니다. 구주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다르게 대응하셨습니다. 사악한 헤롯왕과 대면하셨을 때 그분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는 자신의 신성과 목적에 대해 간단하고도 강력하게 간증하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히고 있던 돈 바꾸는 사람들을 대하실 때는 성스러운 것을 보전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분의 신성한 책임을 행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비할 데 없이 자비롭게 대응하셨습니다.(누가복음 23:34)

일부 사람들은 침묵, 온유함, 용서, 그리고 겸손하게 간증을 나누는 것과 같은 대응이 수동적이거나 나약하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무례하게 우리를 이용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마태복음 5:44 참조)은 신앙과 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그의 생애를 통해서 이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을 막론하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 심한 핍박을 받[았을 지라도]”(조셉스미스-역사 1: 27) 보복을 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참제자들과 같이, 그는 인내와 인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구주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우리가 보복하지 않을 때, 즉 다른 뺨을 돌려대고 화를 참을 때, 우리도 역시 구주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를 무찌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고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비난을 돌리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인 그분의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도전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것이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참제자들은 반대 속에서 기회를 봅니다.

몰몬경에서 선지자 아빈아다이는 결박 당한 채 사악한 노아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 왕이 아빈아다이에게 심하게 반대하고 결국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아빈아다이는 개의치 않고 담대히 복음을 가르치고 자신의 간증을 전했습니다. 아빈아다이가 그 기회를 활용했기 때문에, 앨마라고 하는 한 제사가 복음으로 개종했으며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습니다. 아빈아다이와 앨마의 그 용기는 그리스도인의 용기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흑색 선전이 있는 시기는 주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1983년 제일회장단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습니다. “반대는 그 자체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계속 직면하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종교 문제와 우리의 메시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판들은 …교회에 대한 관심을 유발합니다. … 이것은 [회원들이]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된 사람들에게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1

우리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정성 어린 편지, 친구와의 대화, 블로그의 댓글, 또는 악플을 남긴 사람에게 위안의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런 기회들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보나 편견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 즉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123:12)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는 것이 결코 나약함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께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응할 때, 각 상황은 다를 것입니다. 다행히도 주님은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며, 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다. 참제자들은 영의 인도를 구할 때 각 상황에 맞는 영감을 받습니다. 또한 모든 상황에서 참제자들은 주님의 영을 불러오는 방법으로 대응합니다. 바울은 그의 전도를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고린도인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4) 주님의 영에는 그 권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토론하는 동안 결코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알게 되듯이, 성경에 대한 논쟁은 영을 물러가게 합니다. 구주께서는 “다투는 정신을 가진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제3니파이 11:29) 우리 교회가 기독교가 아니라고 비난 받는 것보다 교회 회원들이 그런 비난에 대해 그리스도인 답지 않게 반응하는 것이 더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우리가 항상 영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갈라디아서 5:22~23) 온유하다는 것은 웹스터 사전에 “인내와 끈기를 나타내 보임, 또는 노를 품지 않고 상처를 견딤”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2 온유함은 나약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용기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특히 다른 기독교 종파의 회원들과 상대할 때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기독교인들과 교리적 차이로 다투며 논쟁한다면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는 슬퍼하시고 악마는 웃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리를 타협하거나 믿음을 희석시키자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회복된 복음 교리를 가르치고 순종하는 것이 세상의 눈에 인기를 모으거나 유행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리를 변경시킬 수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고 느낄 때조차도,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사도행전 4:29, 31 참조) 우리는 결코 담대함과 사탄의 모조품인 위압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앨마서 38:12 참조) 참제자들은 뽐내는 교만이 아니라 조용한 확신으로 이야기합니다.

참제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을 개인의 옹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두어야 합니다. 질문과 비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기회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낼 기회를 줍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거나 신학적 논쟁에서 점수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진심 어린 간증은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대응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증은 오직 사랑과 온유함으로만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에드워드 파트리지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마음[은] 내 앞에서 순결[하니,] 이는 그가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옛날의 나다나엘과 같음이니라.”(교리와 성약 41:11)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이 순결하며 화는 더디 내고 용서는 빨리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질은 가정과 가족 내에서 먼저 배우고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비난받을 때, 우리는 구주의 사도들이 “[주여, 저 입니까?]”라고 했던 것처럼 질문해야 합니다. 만일 영으로부터 응답을 듣는다면, 우리는 필요할 경우 바로잡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더 잘 해야 합니다.

간사함이 없는 참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 대해 부당하게 판단하는 것을 피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교회 회원이 아닌 학교 친구들, 직장 동료들, 그리고 세계 전역의 친구 및 이웃들과 강한 우정을 쌓아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필요하고, 그들은 우리가 필요합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을 배웁시다. … 우리 가운데 누구도 … 우리의 도시와 국가와 세계에서 홀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3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주께서 헤롯에게 하셨던 것처럼, 때때로 참제자들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번은 제가 골프를 치고 있을 때 큰 선인장에 스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쏘는 듯했습니다. 겨우 선인장을 스치기만 했는데도 그 식물의 가시가 제 옷에 온통 달라붙었습니다. 어떤 상황들은 마치 그 식물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거리를 두고 단순히 자리를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자극하여 논쟁에 휘말리게 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몰몬경에는 산에 진영을 친 리혼타이와 그의 부하들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반역자 아맬리카이아는 리혼타이에게 산기슭으로 “내려와” 자기를 만나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리혼타이가 산에서 내려오자, 그에게 “점차로” 독약을 먹이게 하매 그가 죽었고 그의 군대는 아맬리카이아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앨마서 47장 참조) 논쟁과 비난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유리한 고지에서 내려오도록 유혹합니다. 유리한 고지는 빛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아침에 첫 번째 빛을 보고 저녁에 마지막 빛을 보는 곳입니다. 그곳은 안전 지대입니다. 그곳은 참된 지식이 있는 곳입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그 유리한 고지에서 내려와 진흙 속의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논쟁을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은 인터넷 상에서나 직접 만나 종교에 관한 싸움을 하기로 작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상호존중과 사랑이라는 더 유리한 고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예루살렘 주위에 성벽을 쌓았던 선지자 느헤미야의 모범을 따릅니다. 느헤미야의 적들은 “[그를] 해하고자 [했던]” 평지에서 자신들을 만나 줄 것을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리혼타이와는 달리 다음과 같은 말로 현명하게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느헤미야 6:2~3) 우리도 역시 해야 할 역사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멈추어 논쟁하고 방해 받는다면 그 역사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모아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마십시오].”(시편 37:1)

이 세상에서 악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필멸의 생에서 큰 시험의 일부는 세상과 같이 되지 않으면서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자신의 중보 기도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간구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5) 그러나 구주께서는 핍박에 대해 경고하실 때조차 다음과 같이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안의 축복과 더불어 “견디기 힘들어 보일 수도 있는 반대 세력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에 축복이 될 것”4이라고 말씀하신 제일회장단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것을 간증 드립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모든 분께, 그리고 저에게 질문하신 자매님께 저의 답을 드립니다.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들의 인종, 신념, 종교, 또는 정치적 당파가 무엇이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용기를 보이려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낫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더 나은 길,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기를 소망합니다. 그분의 길은 침례의 문으로, 의롭게 생활하는 협착하고 좁은 길로, 또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끕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복음 14:6)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와 우리의 모든 형제 자매들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사, 즉 영생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돕고 그들에게 모범이 되는 것은 나약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건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용기로 대응함으로써 제자의 대가를 지불하는 여러분과 저, 즉 후기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 자신의 간증이기도 한 몰몬의 간증을 나눔으로써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보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 나는 그의 백성 가운데 그의 말씀을 선포하여, 그들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부름을 받았느니라.”(제3니파이 5:13) 저는 주님에 대한 저의 특별한 간증을 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나눌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겸손히 간구합니다. 아멘.

  1. 제일회장단 서한, 1983년 12월 1일.

  2.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1986년.

  3. 토마스 에스 몬슨, “In Quest of the Abundant Life,” 엔사인, 1998년 3월호, 3쪽.

  4. 제일회장단 서한, 1983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