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9
장막은 어디 있나이까?
2012년 10월


장막은 어디 있나이까?

신성한 도움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막이 하나님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덮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신 것이 아니라 …… 우리[가] …… [가리고] 있습니다.

리버티 감옥에서 깊은 비탄에 잠겨 있던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 또 당신께서 숨으신 곳을 가리는 장막은 어디 있나이까?”1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고뇌하는 시기에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신성한 도움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막이 하나님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덮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습을 감추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들이 우리를 장막처럼 가리고 있어서 마치 하나님이 멀리 계시어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2라는 심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하나님을 가로막는 장막이 있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시고 대화하실 수 있으나 우리가 그분의 뜻과 시간에 귀 기울이지도, 따르려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느낌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좀 더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우리 동기에 영향을 미치는 세상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아시며 그분의 충실한 자녀에게서 절대 숨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 살 된 제 손녀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해 주는 순수함과 겸손의 힘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손녀는 가족과 함께 유타 주 브리검시티의 성전 일반 공개를 보러 갔습니다. 그 아름다운 성전의 어느 한 방에서 그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엄마, 예수님이 어디 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성전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 그분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손녀 일라이자는 엄마의 대답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을 도우러 가신 것 같네요.” 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떤 장막도 일라이자의 이해력이나 실체를 보는 시각을 흐리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 가까이에 계시며, 그 아이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 손녀는 성전이 주님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부활하셔서 영화롭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갖고 계시며, 한 번에 한 곳에만 계신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입니다.3 예수님이 그분의 집에 계시지 않으면, 다른 장소에 계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주에 대해 손녀가 알고 있던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 아이는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를 위해 어디선가 선행을 하고 계신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예수님이 존재하신다는 기적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보고자 했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영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고 바라는 위안을 아이 같은 손녀의 마음과 정신에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셔서 우리를 알고, 굽어살피시고, 돌보십니다. 고통이나 외로움, 혼란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상황을 알고 계시며, 그분의 사명은 축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꼭 그분을 직접 뵈어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우리의 어린 시절이 오래전에 지났더라도 일라이자와 같은 경험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살면서 배웁니다. 사회생활 초기에 저는 열심히 노력해서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종신 교수가 되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과 가족이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한 환경에서 아내의 친정 근처에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저에게 캘리포니아를 떠나 아이다호 주 렉스버그의 릭스 대학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당시 제 일생의 직업적인 목표는, 제 미래를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저를 멀어지게 하는 일종의 장막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까지 제가 사회와 가족생활에서 어떤 성공을 거두었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와 같이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간구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에서 “그 학교는 나의 학교니라”라고 말하는 고요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어떤 장막도 없었습니다. 저는 신앙과 겸손으로 제 뜻을 굽히고 주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으며, 그분의 관심과 가까이 계심을 느꼈습니다.

몇 년을 릭스 대학에서 보내면서 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에 따라 행하려 노력했으며 장막이 저를 덮거나 제 인생에서 하나님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행하려 노력할 때, 저는 그분을 가깝게 느꼈고, 그분이 제 상황을 아시고 제 행복에 깊은 관심이 있으시다는 확신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스탠퍼드에 있었을 때 품었던 세상적인 동기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릭스 대학교 학장으로 5년째 일하고 있던 어느 날, 매력적인 이직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했으며 제일회장단과도 상의했습니다. 그분들은 따뜻하고 유쾌하게 답해 주셨지만 분명한 지침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님께 제가 대기업에서 받은 제의를 다 말씀드렸더니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든 형제님이 필요할 때, 어디로 가면 형제님을 찾을 수 있는지 알겠군요.”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아셨겠지만, 직업적인 성공에 대한 제 욕망은 장막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는 일이 어려워지고 더 나아가 그분의 권유를 듣고 따르는 것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아내는 우리가 릭스 대학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피력했습니다. 저는 “그 정도면 충분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제가 계시를 구해야 한다고 현명하게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기도했고, 이번에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음성을 통해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 음성은 “릭스 대학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제 야망이 현실에 대한 시야를 흐리게 하여 계시를 받기 어렵게 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직 제의를 거절하고 릭스 대학에 있어야 한다는 영감 어린 결정을 내린 지 30일 후, 근방에 있던 테튼 댐이 터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댐이 터질 것과 수백 명에게 도움이 필요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조언을 구하고 릭스 대학에 남아 있도록 그분의 허락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하는 봉사가 대학과 렉스버그에서 계속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이유를 그분은 모두 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산과 삶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기 위해 자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간구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여러 시간을 일하며 집들에서 진흙과 물을 제거했습니다.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소망 때문에 제 영혼을 키울 기회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되거나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장벽을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예를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는 그분의 시간표가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의 시간표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그때 저는 렉스버그에서는 이미 충분한 시간을 봉사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서둘러 다음 단계로 가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행동하려고 고집하다가 그분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리버티 감옥에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미주리 주에서 교회 회원들을 박해했던 사람들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가 간구한 것은 확실하고 신속한 보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제부터 여러 해가 지나지 [않아]”4 그분이 교회의 적들을 처리할 것이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교리와 성약 121편 24절과 25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보라, 나의 눈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보고 알고 있으며, 나는 그들 모두를 위하여 제 시기에 행할 신속한 심판을 간직하고 있느니라.

이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행위에 따라 지정되어 있는 때가 있음이니라.”5

“당신의 때에 따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장막을 걷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만을 바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으므로, 곧 그분의 시간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될 것입니다.

제 한 며느리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장막을 씌우셨다고 느끼며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어린 세 자녀를 둔 어머니였으며 자녀를 더 낳고 싶었습니다. 두 차례나 유산하자 그녀의 애절한 기도에 고통이 더해졌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시간이 몇 년 더 흐르자, 분노가 생기려는 충동이 들었습니다. 막내가 등교하고 나면 텅 비어 버리는 집은 어머니 역할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마치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고 또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할 때에도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주의 여종이오니”6라고 선언했던 마리아처럼 온전히 헌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었던 그녀의 남편은 캘리포니아 출장에 동행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남편이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그녀는 한적하고 아름다운 백사장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벅차올라 소리 내어 기도했습니다. 정말 처음으로 아기를 더 갖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신성한 목적에 대해 간구했습니다. 그녀는 외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당신께 제 모든 시간을 바치겠나이다. 그 방법을 알려 주세요.” 그녀는 가족이 가야 하는 곳이면 어디든 기꺼이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평안한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심적으로 확신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채워진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 기도는 장막을 없애고 하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두 주가 지나지 않아 며느리는 임신을 했습니다. 갓난아기가 돌이 되었을 때, 선교사 부름장이 제 아들과 며느리에게 도착했습니다. 어디든지 가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약속한 그녀는 두려움을 제쳐놓고 자녀들을 데리고 국외로 나갔습니다. 선교 임지에서 그녀는 선교사 이동일에 아이를 또 낳았습니다.

때때로 우리 스스로 머리에 씌우는 영적인 장막을 걷으려면, 이 젊은 어머니가 한 것처럼 하늘의 뜻에 완전히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가 이삭을 임신하기 오래전부터, 그리고 그들이 약속의 땅을 받기 전에 아브라함의 마음은 의로웠습니다. 하늘은 먼저 이뤄야 할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을 키워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예비된 땅으로 돌고 돌아가는 머나먼 여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던 영원한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종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랫동안 뜸을 들이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축복이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뜻이 늦게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시기 동안 외롭거나 슬퍼하거나 조바심낼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주님의 시간이 항상 우리의 시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 다가가기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이 지금 우리 중에 있다면 우리 모두 그분을 대면할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간증을 전합니다. 지금 그분이 아무런 지장 없이 우리를 볼 수 있듯이, 우리도 그분을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직접 그분 앞에 설 것입니다. 제 손녀처럼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도, 우리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만큼 그분과 친숙하게 되는 일들을 먼저 행한다면, 심판대에서 그분과 재회하는 일는 더욱 기쁠 것입니다. 그분을 섬길 때 우리는 그분처럼 되며, 아무것도 우리 시야를 가리지 않는 그날이 이를 때 그분을 더 가깝게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7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후 그분은 그 방법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8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을 행할 때, 주님은 그것을 그분에 대한 친절로 여기시며,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인정을 느낄 때 우리는 그분과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그분처럼 될 것이며 기쁜 기대감으로 심판의 날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여러분을 숨기는 장막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려는 소망이 아니라 사람의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구주의 유일한 동기는 사람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이나 반대로 여러분의 마음을 다치게 했던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갈 때 두려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께서 제 사례를 비롯하여 몇 번이고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서 사랑과 용서를 전하라는 당부를 전합니다. 이렇게 할 때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여러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느낄 것이며, 그 사랑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일은 가족 내에서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지역 사회나 전국 어디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나아가 다른 사람을 축복한다면, 그분은 지켜보시고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자주 또 오래도록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변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나아가 그분과 더욱더 닮아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겠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보게 될 때 모로나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모로나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모든 이에게 작별을 고하노니, 내가 곧 하나님의 낙원으로 가서 쉬리로다. 그리하여 나의 영과 육신이 다시 재결합하고, 내가 공중에서 승리자로 나아와,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원한 재판관이신 위대한 여호와의 기쁜 심판대 앞에서 너희를 만나리라. 아멘.”9

우리가 신앙과 겸손,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는 소망으로 봉사한다면, 위대한 여호와의 심판대가 기쁨이 될 것임을 간증드립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 분명히 완전한 사랑으로 지금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들을 그렇게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