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9
쉽게 그들의 짐을 지게 하시매
2014년 4월


쉽게 그들의 짐을 지게 하시매

우리가 저마다 지고 있는 인생의 짐은 거룩하신 메시야의 공덕과 자비와 은혜에 의지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제 사랑하는 한 친구는 신혼 시절, 자기 가족에게 4륜 구동 픽업 트럭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그 차가 필요해서 사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 차를 사고 싶은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농담조로 시작한 부부의 대화는 결국 그 차를 구입했을 때의 득실을 따져 보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여보, 우리는 4륜 구동 트럭이 필요해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이 질문에 그는 자신이 보기에 완벽하다 싶은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큰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아이들 분유는 사야 할 텐데, 그 트럭이 아니면 슈퍼마켓에 갈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내는 웃으며 답했습니다. “새 트럭을 사면 분유 살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런 긴급 상황에 가게에 갈 일을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계속 논의한 끝에 결국 그들은 트럭을 사기로 했습니다. 트럭을 사고 얼마 되지 않아, 제 친구는 그 트럭이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트럭을 사려는 이유로 말했던 것들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 장작으로 쓸 나무를 베어 오기로 했습니다. 가을이었지만, 나무를 구하러 올라간 산에는 벌써 눈이 내려 있었습니다. 산을 따라 올라갈수록 눈은 점점 더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제 친구는 미끄러운 길에서 운전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새 트럭에 대한 굳은 확신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친구는 눈 덮인 길을 너무도 많이 가 버렸습니다. 나무를 베려 한 곳에서 차를 길 바깥으로 돌리다가 그만 눈 속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네 바퀴가 다 눈 속에서 헛돌았습니다. 그는 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금세 인식했습니다. 그는 당황했고, 걱정에 빠졌습니다.

제 친구는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겠어.” 그는 차에서 나와 나무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트럭 뒤 칸에 무거운 짐을 가득 실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눈에서 빠져 나가려고 시도했습니다. 픽업트럭에 기어를 넣고 시동을 걸자 차가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트럭은 서서히 눈에서 나와 도로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그는 행복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집에 무사히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짐

트럭과 나무, 제 친구에 관한 이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에 대해 역설할 때 성신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눈에서 빠져나오고, 다시 길로 돌아가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장작더미 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족과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것은 바로 그 짐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과 기회, 의무와 특권, 환난과 축복, 선택과 제약이 그러한 짐에 포함됩니다. 우리의 짐을 주기적으로,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끌고 있는 이 짐은 협착하고 좁은 길 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그리고 영적으로 갇히지 않도록 영적으로 끌어 주는 힘이 되고 있는가? 내가 끌고 있는 이 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영적인 힘이 되고 있는가?”

때로 우리는 짐이 없으면 행복할 거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하지만 짐을 견뎌 내는 것은 행복의 계획에서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자신의 짐에서 영적인 견인력을 얻어야 하기에, 우리는 멋지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삶에 많이 포함시킴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들로부터는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속죄의 강화하는 힘

구주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멍에는 보통 소나 다른 동물들이 쌍으로 함께 짐을 끌 수 있도록 둘 사이에 놓는 나무 기둥을 말합니다. 멍에는 동물들이 나란히 서서 함께 움직여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라는 독특한, 주님의 개인적인 권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스러운 성약을 맺고 지킨다는 것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단단히 묶고 그분이 메신 멍에를 함께 멘다는 뜻입니다. 본질적으로,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께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짐을 끌자고 손짓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의 능력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필멸의 여정에서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함께 우리의 짐을 끌 때, 진정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벼울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혼자여야 할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늘의 도움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구주의 속죄를 통해 “우리 [자신]의 것을 넘어서는 힘”(“Lord I Would Follow Thee,” Hymns, no. 220)과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여행을 계속하라. 그리고 너희 마음으로 기뻐하라. 이는 보라, 또 바라보라, 나는 끝까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100:12)

앰율론이 앨마와 그의 백성을 박해했던 몰몬경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 중에 있는 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너희 머리를 들고 안심하라. 이는 너희가 내게 맺은 성약을 내가 알고 있음이요, 내가 나의 백성과 성약하고 그들을 속박에서 건져 낼 것임이니라”(모사이야서 24:13)

성약의 중심에는 구원에 대한 약속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받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받으려면, 고결하게 맺고 지킨 성약, 그리고 합당한 신권 권세로 집행된 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권 의식을 통해서 속죄의 축복을 포함한 경건의 능력이 육체에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교리와 성약 84:20~21 참조)

앨마와 그의 백성에 관한 기록에 있는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30)라고 하신 구주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또한 너희 어깨에 놓인 짐을 가볍게 하리니, 곧 너희가 속박되어 있는 동안 참으로 너희가 너희 등에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모사이야서 24:14)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이 성구를 짐이 갑자기, 그리고 영구히 없어진다는 뜻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에는 어떻게 짐이 가벼워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에 이제 이렇게 되었나니 앨마와 그의 형제들 위에 지워진 짐이 가벼워졌고, 참으로 주께서 그들을 강하게 하사 그들로 쉽게 그들의 짐을 지게 하시매, 그들이 주의 모든 뜻에 즐거이 인내를 가지고 복종하였더라.”(모사이야서 24:15; 강조체 추가)

사람들의 어려움과 도전들은 즉각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앨마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강화되었고, 그렇게 능력이 향상되었기에 짐이 가벼워졌습니다. 이 선한 사람들은 속죄를 통해 스스로 선택의지를 행사하는 자가 되어 행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교리와 성약 58:26~29 참조) 그들의 상황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주의 힘을 입어”(몰몬의 말씀 1:14; 모사이야서 9:17; 10:10; 앨마서 20:4) 앨마와 그의 백성들은 제이라헤믈라 땅으로 안전하게 인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아담의 타락이 끼친 영향을 극복하고 우리 개인의 죄와 범법을 사하는 것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분의 속죄는 선한 일을 하게 하고, 우리가 가진 필멸의 능력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더 발전하게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삶에서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움이 필요할 때, 구주께서 그분의 구속하는 권능을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속죄가 순종적이고, 합당하며, 계명을 성실히 지키는 남자와 여자를 위한 것이라는 것과,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더 충실히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속죄의 이 측면, 즉 삶을 강화하는 측면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는 게 아닌지, 그리고 순전히 자신의 투지와 의지, 훈련, 그리고 한계가 명백한 우리의 능력만으로 홀로 짐을 끌어야만 한다고 잘못 믿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스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속죄를 통해, 그리고 성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활력 있게 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뿐 아니라 강화하고 치유하고 싶어하신다는 점 또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도우십니다

앨마는 구주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실 수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이에 그가 나아가사, 온갖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당하시리니,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의 고통과 질병을 짊어지리라는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또 그가 사망을 짊어지시리니, 이는 그의 백성을 결박하는 사망의 줄을 푸시려 함이요, 또 그들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리니, 육체를 따라, 그의 심정을 자비로 충만하게 하사, 육체를 따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 어떻게 도울지 아시고자 하심이니라.”(앨마서 7:11~12)

그렇게 구주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죄와 죄악을 위해서만 고통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 고통과 고뇌와 연약함과 약점, 두려움과 좌절과 실망과 낙담, 그리고 우리의 후회와 회한과 절망과 절박함, 또한 우리가 겪는 부당함과 불공평, 우리를 괴롭히는 정서적 고충을 위해 고통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필멸의 삶 동안 마주할 그 어떤 육체적 고통, 영적 상처, 영혼의 고뇌나 심적 고통, 질환이나 연약함도 구주께서 경험하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연약함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을지 모릅니다. “이게 어떤 건지 아무도 모를거야. 아무도 이해 못해.”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각자의 짐을 느끼고 짊어져 보셨기에, 온전하게 알고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무한하고 영원한 희생으로(앨마서 34:14 참조), 그분은 완벽하게 공감하시며 자비의 팔을 우리에게 뻗으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다가와서 어루만지고, 돕고, 치유하고, 강화하실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지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분명,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습니다.

권유, 약속, 그리고 간증

자신의 짐을 가늠해 보는 가운데 구주의 속죄에 대해 공부하고, 기도하고, 숙고하고, 더 배우려 노력하시도록 권유합니다. 우리가 하는 필멸의 생각으로는 속죄의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죄의 많은 측면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해야만 합니다.

제 친구에게 나무 짐은 목숨을 구하는 견인력으로서 작용했습니다. 빈 트럭은 4륜 구동 자동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헤쳐 나가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짐은 견인력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친구를 구한 것은 바로 짐이었습니다. 그 짐이 제 친구를 갇힌 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으며, 다시 도로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었으며,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견인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지고 있는 인생의 짐은 거룩하신 메시야의 공덕과 자비와 은혜에 의지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니파이후서 2:8 참조) 우리의 짐을 쉽게 질 수 있도록 구주께서 도와주시리라는 것을 간증드리고, 약속드립니다.(모사이야서 24:15) 성스러운 성약을 통해 그분과 함께 멍에를 메고, 생활 속에서 능력 있게 해 주는 속죄의 힘을 받는다면, 그분의 뜻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바꿔 달라고 집요하게 기도하기보다는, 그 상황으로부터 배우고, 상황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상황을 수용할 힘을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행함을 받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니파이후서 2:14 참조) 우리는 영적인 견인력을 축복받을 것입니다.

구주의 속죄를 통해 우리 각자가 더 나은 것을 행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4월 6일입니다. 우리는 계시를 통해 오늘이 구주의 실제 탄생일임을 압니다. 4월 6일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조직된 날이기도 합니다.(교리와 성약 20:1; Harold B. Lee, “Strengthen the Stakes of Zion,” Ensign, July 1973, 2; Spencer W. Kimball, “Why Call Me Lord, Lord, and Do Not the Things Which I Say?” Ensign, May 1975, 4; Spencer W. Kimball, “Remarks and Dedication of the Fayette, New York, Buildings,” Ensign, May 1980, 54; Discourses of President Gordon B. Hinckley, Volume 1: 1995–1999 [2005], 409 참조) 이 특별하고 성스러운 안식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이심을 간증드립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우리를 씻으시고, 치유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강화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으로 기쁘게 간증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