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19
평안을 구하는 방식
2016년 4월


평안을 구하는 방식

우리가 모두 구하는 평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우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걷는 행동이 요구됩니다.

몇 년 전 제 딸과 사위는 부산한 네 살배기 다섯 명으로 구성된 초등회 반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복음 원리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이따금 소란이 있더라도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딸은 교사로, 사위는 규율 담당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특별히 골치 아팠던 어느 수업 중에 사위는 원기 왕성한 한 아이에게 여러 차례를 경고를 보낸 후, 그 네 살배기 소년을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밖에서 아이의 행동을 나무라며 부모에게 일러야겠다고 말하려는데, 그 아이는 사위의 말을 막으며, 손을 들고 감정에 북받쳐, 불쑥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어떨 때는 예수님을 생각하기가 힘들단 말이에요!”

우리는 필멸의 삶을 사는 동안, 그 여정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만큼 영예롭고 유쾌할지라도, 누구나 시련과 슬픔을 겪기 마련입니다. 조셉 비 워스린 장로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슬픔의 시곗바늘은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순간에 반드시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1 “주님께서는 그분의 지혜로 어떤 사람이 비탄과 슬픔을 겪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2 그러나, 이 여행길을 평안하게 지나갈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가 힘들 때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정신적 평화, 양심의 평안, 마음의 평화는 우리가 얼마나 시련이나 슬픔, 혹은 심적 고통을 피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심 어린 애원에도 모든 폭풍우가 진로를 바꾸지도, 모든 질병이 치유되지도 않으며, 선지자, 선견자, 계시자들이 가르친 모든 교리나 원리, 또는 관행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조건이 따르는 평화를 약속받았습니다.

구주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삶에 환난이 있더라도 기운을 내고, 소망을 품을 수 있으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내 안에서 너희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고 말씀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 희생을 믿는 신앙은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복음의 첫째 원리이자, “이 세상에서는 평화,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에 대한 소망의 토대가 됩니다.4

우리가 일상생활의 어려움 가운데서 평화를 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구주께 생각을 계속 집중하게 하는 간단한 방식이 주어졌습니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서 배우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의 영의 온유함으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는 내 안에서 화평을 누리리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라”5

배우라, 귀 기울이라, 걸으라—약속이 따르는 세 단계

첫째, “내게서 배우라”

이사야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6

지구 곳곳에서 그 수가 날로 증가하는 성전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며,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우리의 구주요 구속주이며, 평화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의 역할에 관해 배웁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은 살기에 힘들고 험난한 곳일 수 있습니다. …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거룩한 집에 가고 그 안에서 맺는 성약을 기억한다면 모든 시련을 더 잘 견뎌 내고 유혹을 더 잘 극복해 낼 것입니다. 또한 그 성스러운 곳에서 평안을 얻[을] … 것입니다.”7

저는 몇 년 전 남미에서 봉사할 당시, 어느 스테이크 대회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얼마 전에 젖먹이 아들을 잃고 비탄에 잠긴 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대회 기간 중 투미리 형제님을 처음 만나 접견을 하면서 아들을 잃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접견을 하면서 그분은 아들이 죽어서 매우 슬펐고,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크게 상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어 보니 새로운 교회 회원이었던 투미리 형제는 성전에 갈 돈을 저축하여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딱 한 차례 성전에 갔었고, 그곳에서 부부 인봉을 받고 두 딸도 인봉했지만, 다시 성전에 가기 위해 저축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미처 아들은 인봉받도록 성전에 데려가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오해가 있음을 깨닫고, 투미리 형제가 계속 충실히 생활한다면 참으로 아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고, 그 까닭은 그를 아내와 두 딸에게 묶은 인봉 의식이 성약 안에서 태어난 아들을 묶기에도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투미리 형제는 놀란 나머지 그 말이 진정 사실이냐고 물었고, 저는 그렇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제게 아들이 죽은 이후로 2주 동안 깊은 슬픔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눠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대회가 끝난 일요일 오후, 저는 투미리 자매님을 만나 그녀에게도 이 영화로운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고통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한 가닥 희망이 생긴 자매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습니다. “진정 아이를 제 품에 다시 안을 수 있을까요? 그 아이가 정말 영원히 제 아이일까요?” 저는 자매님이 성약을 지킨다면 성전에서 받은 그 인봉 권능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효력을 발휘하여 참으로 아들과 다시 함께하고 아들을 품에 안게 해 줄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투미리 자매님은 아들의 죽음으로 비탄에 잠겨 있었으나 우리 구주요 구속주께서 가능하게 하신 성스러운 성전 의식 덕분에 감사의 눈물과 평안이 가득한 채 모임 장소를 떠났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참석할 때마다 듣고,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에서, 참여하는 모든 의식에서, 또 우리가 맺는 모든 성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모범에서 배우는 동안 평화를 느낍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집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그분의 영을 느끼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평화를 찾게 될 것입니다.”8

둘째,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교리와 성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 자신의 음성으로 한 것이나 나의 종들의 음성으로 한 것이나 같으니라.”9 아담의 시대로부터 우리의 현재 선지자, 토마스 스펜서 몬슨 시대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권세를 받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전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로 한 사람들은 안전과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우리는 몰몬경에서 선지자의 권고를 따르고 선지자를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여러 예를 봅니다. 여기에는 니파이전서 제8장에 나오는 생명나무에 관한 리하이의 시현에서 배우는 교훈이 포함됩니다. 우리 시대만큼 크고 넓은 건물에 사람이 가득 차며 그 건물의 열린 창에서 나오는 소음이 잘못된 곳으로 인도하고, 조롱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때는 없었습니다. 다음 성구에는 두 부류의 사람과 아울러 건물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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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이의 꿈

26절부터 보면,

“이에 나 또한 내 눈길을 던져 주위를 둘러보고는, 물이 흐르는 강 저편에 크고 넓은 건물 하나를 보았나니 …

또 그 건물은 사람들[로] … 가득 차 있었으며, … 저들은 열매에 이르러서 먹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태도였느니라.

이에 그들이 열매를 맛본 후 그들을 비웃는 자들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더니, 금단의 길로 떨어져 나가서는 잃어버린 바 되더라.”10

33 절에는 건물에서 나오는 비웃음과 조롱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선지자 리하이는 건물 안에 있는 무리가 “나와 나처럼 열매를 먹고 있는 자들에게 멸시하는 손가락질을 하였[으나] … 우리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고]”11 설명했습니다.

부끄러워하며 떨어져 나가 잃어버린 바 된 사람들과, 건물에서 나오는 조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선지자 곁에 있던 사람들과의 주된 차이점은 다음 두 어구에 나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은 열매를 맛본 후”이고, 두 번째는 “열매를 먹고 있는 자들”입니다.

첫 번째 무리는 나무에 이른 후, 한동안 선지자 곁에 있었으나 열매를 맛보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열매를 먹지 않았기에, 건물에서 나오는 조롱의 영향을 받아 선지자로부터 멀어져 금단의 길로 떨어져 나갔으며, 그곳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열매를 맛본 후 길에서 벗어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계속해서 열매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건물에서 나오는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지자 곁에 있었으며, 이에 수반되는 안전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주님과 그분의 종에 대한 우리의 다짐은 일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를 파괴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가 권세를 부여받은 종들을 통해 주님께 귀 기울일 때, 거룩한 곳에 서서 움직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대적은 답이 되는 듯이 보이는 거짓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우리가 구하는 평화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타당하고 안전해 보이는 환상을 제시하지만, 결국에는 크고 넓은 건물처럼 그 안에서 평화를 구하는 모든 자를 무너뜨리고 파멸시킬 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한 초등회 노래에 있습니다. “선지자 말씀 계명을 지키라 안전평화 있으리니”12

셋째, “나의 영의 온유함으로 걸으라”

우리가 아무리 멀리 길에서 벗어났을지라도, 구주께서는 돌아와 그분과 함께 걸으라고 권유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라는 이 권유는 그분과 겟세마네까지 동행하라는 권유이자 겟세마네에서 갈보리로, 갈보리에서 정원 무덤까지 동행하라는 권유입니다. 아울러 구주의 위대하신 속죄 희생을 주시하고 적용하라는 권유입니다. 속죄는 무한한 동시에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 권유는 회개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그분의 권능에 의지하며, 뻗으신 사랑의 손을 붙들라는 권유입니다. 또 평안하라는 권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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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분과 함께 걸으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는 동안 죄와 범법으로 말미암은 고통과 비통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기]”13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적용하고, 진심 어린 회개를 통해 그분과 함께 걸으면 “눈과 같이 희어질 것[입니다.]”14 비록 죄책감에 짓눌려 왔더라도 우리는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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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회개하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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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마 이세는 주님이 보내신 천사의 방문을 받았을 때 죄와 맞서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바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는 내 영혼이 극심히 괴로움을 당하고 내 모든 죄로 고통을 당하였음이라.

… 참으로 나는 내가 내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하였음과 그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을 알게 되었느니라.”15

죄가 너무도 심각했기에, 그는 이런 시련 가운데서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내가 또한 나의 부친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세상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시려 오실 것에 관하여 백성에게 예언하시는 것을 들은 것을 기억하였느니라.

… 내가 내 마음 속에서 부르짖기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 나를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하였느니라.”16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부르짖어 자비를 구할 때까지, 내가 내 죄 사함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보라 내가 그에게 부르짖었고 내 영혼에 평안을 찾았느니라.17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죄를 회개하며, 그분의 치유 권능을 삶에 적용하면, 우리도 앨마처럼 영혼에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나 구하는 평안은 단순히 소망하는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구주에 관해 배우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걷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비록 우리에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할 능력은 없을지라도, 주님께서 주신 평안을 찾는 방식, 즉 예수님을 자주 떠올리고 생각하는 방식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통제할 만한 능력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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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주께서 주신 방식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18이며, 그분을 통해서만 이생에서 진정한 평안과 다가올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간증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