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더블유 크레이그 즈위크
여러분에게 타인의 경험에 대해 따뜻한 배려를 보이면서 이러한 질문을 해 보시도록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41년 전에 저는 제 아름다운 아내 잰과 어린 아들 스코티를 태우고서 바퀴 18개가 달린 세미 트럭의 운전석에 올라탔습니다. 우리는 건축 자재를 잔뜩 싣고 여러 주를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안전띠 규제나 유아용 보조 의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는 우리의 소중한 아들을 팔에 안았습니다. “우린 땅에서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아요.”라는 아내의 말에서 아내가 느끼는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도 가파른 지점인,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도너 패스 고갯길을 내려오는데, 예기치 않게 갑자기 트럭 좌석으로 두터운 연기가 차 올랐습니다.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습니다.

브레이크만으로는 그 무거운 세미 트레일러 트럭을 제동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미친듯이 엔진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낮추면서 차를 세우려 했습니다.

길가로 트럭을 세우려 하는데, 차가 완전히 멈추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내가 아이를 안은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내와 아이가 땅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를 세우자마자 저도 연기가 나는 운전석에서 급히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매우 흥분한 상태로 돌멩이와 잡초를 헤치며 달려가 아내와 아이를 팔로 안았습니다. 아내의 팔뚝과 팔꿈치가 쓸려 피가 나고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둘 다 무사했습니다. 먼지가 잦아드는 동안 저는 고속도로 옆에서 아내와 아이를 꼭 껴안은 채 있었습니다.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가빴던 숨이 잠잠해지자 제가 불쑥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요?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연기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저를 돌아보며 한 아내의 이 말은 제 가슴을 파고들었고, 지금도 제 귓가에 울리는 듯합니다. “우리 아들을 구하려고 한 것뿐이에요.”

아내는 엔진에 불이 났다고 생각했고, 트럭이 폭발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는 걸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위험하긴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전기 고장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소중한 아내를 바라보며 우리의 어린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도대체 어떤 여인이 그렇게 용감한 행동을 또 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진짜로 엔진이 고장 난 상황만큼이나 감정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는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얼마간 침묵의 시간을 참아 내다가, 다행스럽게도 마침내는 왜 그렇게 격한 감정이 들었는지 서로의 속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둘 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의 안전을 염려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저희는 소중히 가꿔 온 결혼 생활이 그 위험한 사고로 정말로 치명상을 입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경고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 4:29) 바울의 말은 일종의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이 구절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자기 자신에게서든 타인에게서든, 우리는 자주 분노로 가득한 감정을 봅니다. 우리는 공공 장소에서 억제되지 않은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운동 경기, 정치권, 심지어 우리의 가정에서도 그와 같은 일종의 감정적 “누전”을 겪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칼날처럼 날카로운 언어로 말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풍요롭고 감미로운 시간 중 일부를 함께한 배우자들이 서로에 대한 비전과 인내를 잃은 채 언성을 높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 많은 하나님 아버지의 성약의 자녀이지만,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후회한 적이 있고, 타인의 관점으로 상황을 이해해 보기도 전에 거친 말을 내뱉은 적도 있습니다. 파괴적인 말이 위험한 상황을 어떻게 치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우리 모두 배운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제일회장단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하라고 가르치며, 그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제일회장단 서한, 2014년 1월 10일) 이는 특히 세상을 보는 관점이 서로 다를 때, 그럴 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예의 바르게 대화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잠언의 저자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논리적인 반응, 즉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는 절제된 말을 뜻합니다. 이는 결코 우리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다거나 교리적인 진리를 양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의 내용은 확고하더라도 그 마음은 부드러울 수 있습니다.

몰몬경에는 또한 부부간의 의견 차이가 생긴 상황에서 단호한 말을 했던 주목할 만한 예화가 나옵니다. 놋쇠판을 가져오도록 예루살렘으로 보낸, 새라이아와 리하이의 아들들이 돌아오지 않자 새라이아는 아들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분노가 차올라 누군가 비난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녀의 아들 니파이의 관점에서 본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는 모친이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셨음이라. 또한 모친은 나의 부친에게 그가 환상의 사람이라 말하며 불평하셨었나니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우리를 우리 기업의 땅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이제 내 아들들은 없어졌고 우리는 광야에서 멸망하리이다 하셨더라.”(니파이전서 5:2)

자, 새라이아의 생각을 헤아려 봅시다. 그녀는 서로 싸우려 드는 아들들을 남편의 목숨이 위협받던 곳으로 돌려보냈기에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여전히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젊은 나이의 그녀는 아름다운 집과 친구들을 고립된 광야의 천막과 맞바꾸었습니다. 두려움의 한계점에 내몰린 새라이아의 이때의 상황은 이성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영웅적이게도 가족을 보호하려 질주하는 높은 트럭에서 뛰어내린 것과 같습니다. 새라이아는 분노와 의심과, 비난을 담아, 온 인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예리한 말로 정당한 근심을 남편에게 표현했습니다.

선지자 리하이는 아내의 분노 저변에 깔린 두려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 다음, 연민 어린 말로 절제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먼저 그는 이 상황을 보는 아내의 시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 나의 부친이 모친에게 말씀하여 이르되, 나는 내가 환상의 사람인 줄을 아노라. …… [하지만] 만일 내가 …… 예루살렘에 머물[렀더라면, 우리는] 나의 형제들과 함께 멸망하였을 것임이라.”(니파이전서 5:4)

그런 다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의 남편은 성신의 간증을 들으면서, 아들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내의 두려움을 다독였습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약속의 땅을 얻었으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는 진정 기뻐하노라. 더욱이 나는 주께서 나의 아들들을 라반의 손에서 구원하[실] …… 것임을 아노라 ……

이러한 말로 …… , 나의 부친 리하이는 우리에 관하여 나의 모친[을] …… 위로하셨더라.”(니파이전서 5:5~6)

남성과 여성이 신념과 행동 면에서 동떨어진 존재이고, 서로 다른 동기로 그들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서로에 대한 존중심을 함양하는 일은 오늘날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정보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 파악하기는, 아니 우리가 각자의 시련과 선택에 대한 정황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인의 일에 무엇보다도 먼저 공감을 보인다면, 바울이 이야기한 “더러운 말”은 어떻게 될까요? 불완전하고 다듬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는 제 한계를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타인의 경험에 대해 따뜻한 배려를 보이면서 이러한 질문을 해 보시도록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호와께서 베들레헴에 사는 작은 양치기 소년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심으로써 사무엘과 사울을 놀라게 하셨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선지자에게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트럭이 연기로 가득했을 때, 아내는 우리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했습니다. 아내의 선택에 의문이 들었을 때 저 역시 보호자로서 행동했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누가 더 옳은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흔쾌히 상대방의 눈으로 보려 한다면, “더러운 말”은 “은혜를 끼치[는]”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았으며, 우리도 모두 어느 정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를 고치거나 해결해 주지는 못할 수는 있지만, 더 중요한 가능성은 은혜가 끼쳐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 많으신 구주에 대해 간증드립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다. 우리가 성신의 은사를 함양하여 이를 통해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염려하는 동정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운다면 애정에 찬 언어로 “은혜를 끼[칠]” 수 있음을 간증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위험한 상황을 거룩한 곳으로 변모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을 보이시는 사랑의 구주에 대해 간증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