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도널드 엘 홀스트롬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이 모임을 떠올리면, 그 어느 곳에도 이와 필적할 만한 모임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연차 대회 신권 모임의 목적은 신권 소유자들에게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제3니파이 27:27 참조)를 가르치고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도록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반세기 전에 제가 아론 신권 소유자로서 하와이에 살던 시절과 영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던 때에는 집회소에 모여서 전화 연결로 연차 대회 신권 모임을 들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커다란 접시형 위성 수신기를 보유하고 있으면 교회에서 위성 방송으로 대회를 시청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참 놀랍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누구라도 어느 곳에서나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여 이 모임의 말씀들을 시청하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자신의 음성으로 한 것과 같은 (교리와 성약 1:38 참조) 주님 종들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이렇게 많아졌는데도 기꺼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교리와 성약 11:21 참조) 따르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연차 대회와 신권 모임의 목적은 우리가 기꺼이 행하려 하고 기꺼이 변화하려 할 때에만 비로소 달성되는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 저는 감독으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저보다 나이가 아주 많으신 한 형제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녀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냈습니다. 직장 생활도 위태로웠으며, 친한 친구도 없었고, 와드 회원들과 어울리는 것도 힘겨워했기에, 교회 봉사도 꺼리게 되었습니다. 삶에서 겪는 어려움에 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분은 제게로 몸을 숙이며 여러 차례 이어 왔던 토론을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감독님, 저는 성마른 기질이 있어요. 그게 제 본 모습이라고요!”

그 말을 들은 그날 밤 저는 망연자실했으며, 그 이후로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누구라도 그분처럼 “그게 제 본 모습이라고요”라고 하며 자신을 단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변화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 됩니다. 백기를 들고 무기를 내려 놓고, 전투를 포기하고 항복해 버림으로써 승리할 가능성을 아예 상실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적어도 한두 가지 좋지 않은 습관으로 “그게 제 본 모습이라고요”라는 말을 실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신권 모임에 모이는 이유는 현재의 우리가 앞으로의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우리의 약점, 나약함, 중독에도 불구하고 구주의 속죄는 우리에게 변화할 능력을 줄 수 있다는 확신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과거가 어떠했을지라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변화하겠다는 “진정한 의도”(모로나이서 10:4 참조)로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영이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주님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그리고 이렇게 되리니, 그들이 …… 나를 믿는 신앙을 행사하는 만큼 나는 그들이 함께 모이는 그 날에 그들 위에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교리와 성약 44:2)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힘의 원리이자 행동의 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오늘 밤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2006년에 인도 하이데라바드 외곽의 작은 마을에서 만났던 한 분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십시오. 그분은 기꺼이 변화하고자 하는 모범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아파 라오 눌루 형제님은 인도의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신체 장애를 안게 되었습니다. 사회에서는 그의 잠재력에 큰 한계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독신 성인이 되었을 무렵, 그분은 우리 선교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선교사들은 그분에게 그분이 이생에서나 다가올 영원한 세상에서 발휘할 커다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분은 침례를 받고 교회 회원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잠재력에 관해 크게 깨닫게 된 그분은 멜기세덱 신권을 받고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1986년에는 장로로 성임되었으며 인도에서 봉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양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도 버거워서 자주 넘어지긴 했지만 포기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명예롭고 헌신적으로 선교 사업에 임하기로 굳게 결심했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우리가 이 눌루 형제님을 만난 것은 그분이 선교 사업에서 귀환하고 거의 20년이 지났을 때였으며, 형제님은 아스팔트가 끝나는 지점에서 기쁘게 우리를 맞이한 뒤에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따라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사는 자신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아주 덥고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었습니다. 눌루 형제님은 여전히 걷는 데 큰 불편함이 있었지만 자기 연민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작은 집에 들어갔을 때, 그분은 바로 저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가장 아끼는 물건이 담긴 상자를 꺼내셨습니다. 그분은 제게 종이 한 장을 보여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 종이에는 “친절과 애정을 담아 용기 있고 행복한 선교사인 눌루 장로님께, [날짜] 1987년 6월 25일, [서명] 보이드 케이 패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를 방문하셨던 패커 장로님이 선교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면서 눌루 장로의 잠재력을 확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2006년에 눌루 형제님이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복음은 그분을 영원토록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방문에 선교부 회장님도 저희와 동행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엔다우먼트와 인봉을 위해 눌루 형제님과 그분의 아내를 접견했으며, 부모와 인봉되도록 자녀들도 접견했습니다. 우리는 그 가족에게 의식을 받기 위해 중국 홍콩 성전으로 가는 일정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오래 기다려 온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기쁨에 찬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신권 소유자에게는 무엇이 요구됩니까?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저는 세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1. 1.

    우리는 합당한 신권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론 신권을 소유한 청소년이든 멜기세덱 신권을 소유한 성인이든, 우리는 성약을 맺었기에 합당한 신권 소유자가 되고, 영적인 성숙함을 보여야 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11) 신권을 소유하고 있기에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거만, 교만, 우월감을 버리고 겸손하고 온순하며 온유해야 합니다. 신권을 받고 다양한 신권 직분에 성임되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 깊은 일이 되어야 합니다. 나이가 차면 자동으로 거쳐 가는 의례적인 “통과 의례”가 되어서는 안 되며 사려 깊게 맺는 성스러운 성약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큰 특권으로 여기고 깊이 감사드리며,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신권에 관해 거의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2. 2.

    우리는 봉사해야 합니다! 신권 소유의 본질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함으로써 “[우리의] 부름을 영화롭게”(교리와 성약 84:33 참조)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의무인 아내와 자녀에게 봉사하는 것을 회피하고, 교회 부름을 거부하거나 수동적으로 수행하며,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구주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나중에 주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를 섬[길지니라]”(교리와 성약 42:29) 신권 책임과 반대되는 이기적인 성품이 자신에게 있다면,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3. 3.

    우리는 합당해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님이 신권 모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여러분과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바싹 맞대고 여러분의 눈썹을 태워 그슬릴 정도로 …… 불을 뿜어[낼]” (“싸움 끝나는 날까지”, 리아호나 2011년 11월호, 45쪽) 능력은 없지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공공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행위들이 어떻게 신권을 행사하는 우리의 힘을 제한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외설물과 순결의 법 위반과 부정직에 조금이라도 관여하면서, 이 정도쯤은 우리와 가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모로나이는 “범사를 합당하게 행하[라]”(몰몬서 9:29)고 했습니다. 주님은 강력하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너희에게 한 가지 계명을 주노니, 너희 스스로에 관하여, 그리고 영생의 말씀에 부지런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조심하라.”(교리와 성약 84:43) 합당성을 저해하는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다면,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물음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은 “나와 같은 자라야 하느니라”(제3니파이 27:27)라는 간단명료하고 심오한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라]”(모로나이서 10:32)는 권유에는 변화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또 만일 사람들이 내게로 오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보일 것이라. …… 내가 …… 연약한 것들을 강하게 되게 할 것임이니라.”(이더서 12: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주의 속죄에 의지할 때, 우리는 변화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