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시험의 기간

우리의 유산, 1996


존 테일러 대관장

브리감 영 대관장이 돌아가신 후, 존 테일러 회장이 관리하는 십이사도 정원회가 3년 동안 말일성도들을 인도하였다. 1880년 10월 10일, 존 테일러는 교회의 대관장으로 지지되었다. 테일러 대관장은 천부적인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는데, 그는 속죄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타임즈 앤드 시즌스와 더 몰몬을 포함한 교회의 매우 중요한 정기 간행물을 편집하였다. 그는 여러 면에서 회복된 복음에 대한 그의 헌신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한 예를 들면, 그는 자발적으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카테이지 감옥에 갇혔으며, 그 곳에서 네 발의 총탄을 맞기도 했다. 그의 개인적인 생활 신조인 “하나님의 왕국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함축하고 있다.

선교 사업

테일러 대관장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1879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사도로 부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세스 대처 장로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대처 장로와 다른 두 명의 선교사는 1879년 11월 13일 멕시코시티에 첫번째 교회 지부를 조직하였는데, 지부장으로는 플로티노 시 로다카나티 박사가 부름 받았다. 로다카나티 박사는 스페인어 판 몰몬경에 관한 소책자를 읽고 테일러 대관장에게 교회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요한다는 편지를 보낸 후 개종한 사람이다.

십이사도 중 한 명과 세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회복된 복음이 서서히 멕시코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1881년 4월 6일에 대처 장로와 페라모르즈 영 장로와 파이스 형제는 해발 5,000미터에 이르는 포파카테페텔 산에 올라가 간단한 헌납식을 가졌다. 대처 장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멕시코 백성들이 그들의 목자인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멕시코 백성들과 멕시코 땅을 헌납하였다.

대처 장로는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와 몇몇 선교사들이 추가적으로 더 멕시코에서 봉사하도록 추천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훗날 대관장단의 일원이 된 앤소니 더블류 어빈스를 포함한 몇몇 젊은이들이 멕시코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밀턴 트레조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떠한 종교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군복무를 할 때, 그는 록키 산맥의 몰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후에 그는 심한 병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유타를 방문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병이 완쾌되었을 때 솔트레이크시티로 여행을 했다. 그는 브리감 영을 만났으며 복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멕시코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한 그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페인어로 된 몰몬경을 읽을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테일러 대관장은 또한 미 서부에 사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불렀다. 아모스 라이트의 선교 사업은 와이오밍 주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 구역에 거주하는 쇼숀 족 가운데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단 몇 개월만의 봉사로 라이트는 와사키 추장을 포함한 300여 명 이상의 인디언들을 침례주었다. 또한 말일성도 선교사들은 애리조나 주와 뉴멕시코 주에 거주하는 나바호 족, 푸에블로호 족 및 주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윌포드 우드럽은 호피 족, 아파치 족 및 주니 족 등과 같은 인디언들에게 1년 정도 선교 사업을 하였다. 암몬 엠 테니는 100명 이상의 주니 족 인디언들에게 침례를 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선교사들은 영국과 유럽에서도 복음을 계속 전했다. 1883년, 유타 주 리하이에 살고 있던 독일 태생의 토마스 비싱거는 유럽 선교부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와 폴 해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보내졌다. 그 지역은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선교사들은 법률로 전도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화들은 종종 종교적인 주제로 화제가 바뀌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전도한 지 채 한 달도 못되어, 비싱거 장로는 체포되어 두 달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석방된 후, 비싱거 장로는 자신을 고발했던 안토닌 유스트를 침례주는 축복을 받았다. 유스트 형제는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말일성도가 되었다.1

복음은 폴리네시아에도 전파되었다. 두 하와이 선교사인 키모 펠리오 장로와 사무엘 마노아 장로는 1862년에 사모아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약 50명의 사람들을 침례주었으며, 마노아 장로는 사모아에서 25년 동안이나 자신이 개종시켰던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1887년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조셉 에이치 딘은 사모아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마노아 장로와 그의 충실한 아내는 딘 장로와 그의 아내 플로렌스 자매를 그들의 집으로 기쁘게 맞아들였는데, 이는 마노아 장로에게 있어서 실로 20년 만에 사모아 지역 외의 교회 회원을 만나게 된 특별한 일이었다. 딘 장로는 얼마 있지 않아 14명을 침례주어 교회로 인도하였으며, 약 한 달 뒤에는 사모아 말로 첫설교를 하였다.2 그리하여 선교 사업은 그 섬에서 다시 한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1866년으로 접어들면서, 하와이 정부 관리들은 나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병에 걸린 환자들을 몰로카이 섬의 카라우파파 반도로 격리시켰다. 말일성도였던 조나단과 키티 나펠라는 1873년에 그곳으로 추방당했다. 키티 자매만 병에 걸렸으나, 솔트레이크 엔다우먼트 하우스에서 부부로 인봉된 조나단은 키티 자매 혼자 그 곳에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후에 조나단도 병에 걸렸으며, 9년 후 그의 친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을 때는 그의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었다. 얼마 동안 그는 1900년까지 200여 명 이상이던 반도의 성도들을 관리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심한 병으로 고생하던 충실한 성도들을 잊지 않았으며, 그들의 영적인 필요 사항을 돌보기 위해 자주 그 지부를 방문하였다.3

50년절 연차 대회

1880년 4월 6일, 교회 회원들은 교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했다.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 50년마다를 50년제절라고 이름붙였던 것처럼 그 행사를 50년절이라고 불렀다. 테일러 대관장은 생활이 궁핍한 회원들이 교회에 진 빚을 모두 면제해 주었다. 교회는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극빈자들”4에게 300마리의 소와 2,000마리의 양들을 나누어 주었다. 교회의 상호부조회 자매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35,000부셸(곡식 따위의 계량 단위, 8갤런, 36리터: 역자 주)의 휘트밀을 나누어 주었다. 테일러 대관장은 또한 교회 회원들에게 특히 대공황기 중에 진 개인적인 빚을 면제해 주도록 강조했다. “지금은 50년절의 기간입니다.”5라고 테일러 대관장은 선언했다. 말일성도들 사이에는 용서의 정신과 기쁨이 가득했다.

1880년 4월 50주년 기념 연차 대회의 마지막 날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십이사도 중 열한 명이 대회 기간 동안 간증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초대 회원 중 한 사람이었던 올슨 프랫은 교회 회원 모두가 뉴욕 주 페이에트의 피터 휘트머 일세의 집에 모였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말일성도들의 시련과 집합, 박해와 고통에 대해 회상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아직도 함께 하고 있는 사실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주 하나님께서 지난 50년 동안 행하셨던 위대한 사업”6에 관하여 간증했다. 프랫 장로는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다른 충실한 말일성도들처럼 끝까지 견딘 것에 대해 기쁨을 느꼈다.

50주년 기념 행사가 있기 2년 전, 존 테일러 대관장은 어린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칠 조직을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첫번째 초등협회 모임이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북쪽으로 15마일 떨어진 파밍턴에서 시작되었다. 1880년대 중반까지 거의 모든 말일성도 정착지에 초등협회가 조직되었다. 초등협회는 전세계의 수백만 어린이들이 속해 있는 조직으로 성장해 오고 있으며, 어린이들은 초등협회에서 매주 복음의 가르침과 음악과 교제를 통해서 축복 받고 있다.

계속되는 박해

1830년대 초에 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아브라함, 야곱, 다윗 그리고 구약의 다른 지도자들이 한 명 이상의 처를 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언자는 이에 대해 이해력을 주시도록 기도 드렸으며, 특정한 때에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늘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서 복수 결혼을 허용하시고 지시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요셉 스미스는 또한 하나님의 승인에 따라 곧 신권의 권능에 의해 선택된 말일성도들이 한 명 이상의 처와 결혼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몇몇 말일성도들이 나부에서 복수 결혼을 시작했으나, 이 교리와 그 시행에 대해서는 1852년 8월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그 대회에서 브리감 영 대관장의 지시를 받은 올슨 프랫 장로는 한 남자가 한 명 이상의 처를 갖는 것을 실시하는 것은 주님의 만유에 대한 회복의 일부(사도행전 3:19~21 참조)라고 발표하였다.

미국의 많은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은 유타 주에 살고 있는 말일성도들이 부도덕하고 반기독교적이라고 여기는 복수 결혼 체제를 장려한다는 것을 알고 몹시 분개하였다. 교회와 회원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미 의회는 말일성도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교회에 재정적으로 타격을 주는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안에 따라 결과적으로 관리들은 한 명 이상의 처를 둔 남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들에게서 투표권과 가정에서의 사생활 보장권 및 기타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였다. 수백 명의 충실한 말일성도들과 몇몇 여성들이 유타, 애리조나, 네브라스카, 미시간 그리고 사우스 다코타 주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인 많은 회원들에게도 박해가 심해졌는데, 특히 미국 남부 지역이 심했다. 예를 들면, 1878년 7월에 조셉 스탠딩 장로는 조지아 주 롬 근처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후에 사도가 된 그의 동반자 루저 클로슨 장로는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솔트레이크시티에 사는 성도들은 스탠딩 장로의 살해 소식에 매우 비통해 했으며, 수천 명이 솔트레이크의 태버내클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존 깁스, 윌리엄 베리, 윌리엄 조운스 및 헨리 톰슨 장로는 교회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바꿔보기 위해 테네시 전역을 여행했다. 1884년 8월 어느 일요일 아침, 그들은 테네시 주 케인 크릭 근처에 있는 제임스 콘도의 집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깁스 장로가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 폭도 한 명이 숲에서 뛰어 나와 그에게 총을 쏘았다. 그로 인해 깁스 장로와 베리 장로가 목숨을 잃었다. 학교 교사였던 깁스 장로에게는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깁스 장로의 죽음으로 인해 매우 애통해 하였다. 깁스 자매는 43년 동안 미망인으로 지냈으며,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산파 일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다시 만날 재회의 기쁨을 고대하면서 복음 가운데에서 생을 마쳤다. 많은 선교사들이 살해당하던 당시에 선교부장 대리로 봉사하고 있던 브리감 헨리 로버츠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깁스 장로와 베리 장로의 시신을 무덤에서 몰래 파내어 유타로 옮겨왔다. 유타 주의 많은 와드에서는 두 장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은 피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채찍질 당하였으며, 많은 선교사들이 채찍질로 인한 심한 상처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당시에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복수 결혼한 사람들을 수색하는 연방 보안관들의 체포망을 피하기 위해 잠적했다. 많은 가족들은 이 보안관들이 늦은 밤 집으로 침입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조지 큐 캐논 부대관장, 로렌조 스노우, 루드가 클로슨, 브리감 헨리 로버츠, 조지 레이놀즈와 다른 많은 성도들이 투옥되었으며, 그들은 감옥에서 책을 저술한다든지, 감옥 내 학교에서 가르친다든지,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존 테일러 대관장은 솔트레이크에서 북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유타 주 케이스빌로 강제 추방당하였는데, 그는 1887년 7월 25일에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전하고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의 생을 다 바친 충실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

윌포드 우드럽은 교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교사 중 한 명이었으며, 또한 예언자적인 통찰력과 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다. 그는 상세하게 일지를 기록했는데, 거기에는 초기 교회 역사에 대한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그는 존 테일러 대관장이 별세했을 때,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약 2년 후에 교회의 대관장으로 지지 받았다.

그가 교회를 인도하는 동안, 말일성도에 대한 정치적인 박해의 정도가 심해졌으나 교회는 더욱 발전해 나갔다. 성전이 유타 주의 세인트 조지, 로간 및 맨타이에서 운영되었으며, 솔트레이크 성전도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님의 집을 통해 수천 명의 성도들이 자신의 엔다우먼트를 받을 수 있었으며, 그들의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대리 의식을 행할 수 있었다. 우드럽 대관장은 평생 동안 가족 역사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조상을 위해 성전에서 많은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권고하였다.

다음의 이야기는 성도들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행하고 있었던 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1884년 5월 로간 제2와드의 헨리 밸라드 감독은 그의 집에서 성전 추천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밸라드 감독의 딸이 친구들과 함께 집 근처에서 노는 중에 두 노신사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 소녀를 부르더니 신문을 한 장 건네주며 그것을 아버지께 갖다 드리라고 말했다.

그 소녀는 그들이 부탁한 대로 그 신문을 아버지에게 전했다. 밸라드 감독은 그 신문이 영국에서 발행된 뉴베리 위클리 뉴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많은 계보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와 그의 아버지의 친인척들에 대한 명단이 60여 개 이상 실려 있었다. 이 신문은 1884년 5월 15일자였는데, 발간된 지 겨우 3일 만에 그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항공 수단이 있기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우편물이 영국에서 미국 서부로 전달되기까지는 몇 주가 걸리던 때였다. 이것은 참으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 밸라드 감독은 그 신문을 성전으로 가져 갔으며, 당시 성전장이었던 마리너 더블류 메릴에게 그 신문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메릴 성전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밸라드 형제님, 세상 저 편에 계신 누군가가 그들에 대한 사업이 행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그들은 이 신문이 형제님의 손에 건네진다면 형제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7 그 신문은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교회 역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교회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미정착지에 대한 개척을 강조하였다. 1885년 초기, 많은 말일성도들이 개척지 주아레즈와 개척지 디아즈와 같은 마을들을 세우면서 멕시코의 소노라와 치우아후아에 정착했다.

교회 회원들은 개척을 위한 장소로서 북쪽의 캐나다 지역을 살펴보았다. 캐쉬 밸리 스테이크의 찰스 오 카드 스테이크 부장은 1886년 앨버타 남부에 말일성도들의 공동체를 설립했다. 1888년 겨울까지 캐나다 서부에 살고 있던 말일성도는 100명이 넘었으며, 1890년대 동안에는 더 많은 말일성도들이 와서 관개 시설과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하였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앨버타에서 그들의 지도력을 발전시켜 나갔다.

선언문

1880년대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 합중국 정부는 복수 결혼한 사람들에 대한 투표권과 배심원으로 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였으며, 심하게는 교회가 소유할 수 있었던 재산까지 제한하는 추가적인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더 많은 가장들이 몸을 숨기게 됨에 따라 말일성도 가족들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은 주님의 인도를 구하였다. 1890년 9월 23일 저녁, 예언자는 영감에 따라 교회 회원들에게 복수 결혼을 금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썼다. 주님께서는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에게 복수 결혼의 시행을 중지하지 않는 한 미 합중국 정부가 성전을 강점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사업이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시현을 통해 보여 주셨다.

1890년 9월 24일, 대관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가 선언문을 지지했으며, 성도들은 1890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이 선언문을 승인했다. 오늘날 이 선언문의 내용은 교리와 성약에 선언문 1로 실려 있다.

교회의 이러한 조치에 따라, 연방 관리들은 복수 결혼을 반대하는 법률을 위반한 혐의가 있는 말일성도들을 사면한다고 공포하였으며, 그로 인해 많은 박해와 핍박이 그쳤다. 그러나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제가 행했던 일을 하도록 저에게 명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모든 성전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 또한 감옥에 갔어야 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 곳으로 가게 해야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도록 명을 받은 시간이 왔을 때, 저는 그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 앞으로 나아갔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썼습니다.(“선언문에 관한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의 세 가지 연설문에서 발췌”, 선언문 1 다음에 추가됨.) 미 합중국의 의회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께서 복수 결혼의 공식적인 중단을 가져오게 하셨던 것이다.

계보 협회

말일성도들은 계보 협회를 창설하기 오래 전부터 돌아가신 조상들의 삶에 관한 기록들을 모았다. 윌포드 우드럽, 올슨 프랫 그리고 히버 제이 그랜트도 성전 의식을 대리로 행했던 수천 명의 조상들의 이름을 얻었던 사람들에 속한다. 1894년, 대관장단은 계보 협회를 조직하도록 지시했고, 초대 지도자로 프랭클린 디 리차즈 장로를 불렀다. 도서관이 설립되었으며, 협회의 대표는 성전 의식이 수행될 수 있도록 전세계로 여행하며 사람들의 명단을 찾아다녔다. 이 협회는 후에 교회의 가족 역사부로 발전했다.

1894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우드럽 대관장은 계보 사업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일성도들이 다음과 같이 행하기를 바란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계보를 찾아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봉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자녀들도 그들의 부모에게 인봉되도록 하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이러한 인봉의 끈이 연결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그것이 진실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8 말일성도들은 지금도 계속 자신들의 돌아가신 조상들의 기록을 찾고, 또한 자신을 위해서도 성전 의식을 받도록 권고 받고 있다.

1885년부터 1900년까지, 많은 교회 회원들이 계보 선교사로 봉사했다. 그들은 솔트레이크시티로 초대되어 총관리 역원으로부터 그들의 사업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또한 선교사 카드와 승인서가 제공되었다. 그들은 친척을 방문하고 무덤에 있는 묘비에서 이름을 기록하고 지방 행정 관청의 기록과 가족 성경을 연구하고 성전 사업이 수행되도록 할 수 있는 값진 정보들을 가지고 그들의 집으로 돌아왔다. 많은 선교사들이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종종 그들에게 필요한 관련 자료들을 지시해 주신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하는 영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9

솔트레이크 성전의 헌납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은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성전 사업에 헌신했다. 그는 세인트 조지 성전의 초대 성전장으로 봉사했으며, 맨타이 성전을 헌납하였다. 솔트레이크 성전의 초석이 세워진 지 40년이 지난 후,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은 이 역사적인 성전의 헌납을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성전 헌납식은 1893년 4월 6일부터 18일까지 약 75,0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10

Salt Lake

4월 6일 첫번 헌납식이 끝나고 우드럽 대관장은 자신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의 영과 권세가 우리에게 임했다. 예언과 계시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고, 사람들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찼으며, 많은 것들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11 몇몇 말일성도들은 천사를 보았으며, 이미 돌아가신 교회 대관장과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을 본 성도들도 있었다.12

우드럽 대관장이 자신의 90번째 생일 축하 모임에 참석했을 때, 수천 명의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템플 스퀘어에 있는 태버내클에 모여 그를 축하해 주었다. 그는 크게 감동하여,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열 살 때 개신교의 주일학교에 참석해 사도와 예언자에 관해 읽었던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살아 생전에 이 지상에서 한번 더 사도와 예언자들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이제 그는 사도와 예언자들이 함께 있는 곳에 서 있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그의 기도는 여러 차례 응답되었다.13

그로부터 1년 후인 1898년 9월 2일에 우드럽 대관장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던 중에 운명을 달리했다.

로렌조 스노우 대관장과 십일조

우드럽 대관장이 별세한 후,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로렌조 스노우가 교회의 대관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잘 준비해 왔던 현명하고 사랑이 많은 지도자였다. 그는 그 당시까지의 모든 말일의 예언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그 분들에 의해 가르침 받아온 사람이었다. 1900년 11월, 그는 성도들을 태버내클에 모이게 하였으며, 종종 예언자 요셉 스미스와 예언자의 가족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예언자와 사적인 면담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셉이 하나님의 예언자임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이 진리가 “가장 분명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자신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었다.14

스노우 대관장이 대관장으로 봉사하던 시기에, 교회는 복수 결혼에 반대하는 연방 정부의 법률 때문에 야기된 심각한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스노우 대관장은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부채를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주님께 인도를 구하였다. 이듬해인 1899년 4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유타 주 세인트 조지를 방문해야겠다는 영감을 받았다. 그는 그 곳에서 열린 모임에서 말씀을 하던 중에 말씀을 잠시 멈추었는데, 잠시 후 그는 자신이 계시를 받았었다고 말했다. 교회의 성도들이 십일조의 법을 소홀히 했으며, 이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교회 회원들이 완전한 십일조를 바치는 데 더 충실하면, 그들에게 축복이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예언자는 유타 전역에서 모임에 참석한 회중들에게 십일조의 중요성에 관해 말씀을 전했다. 성도들은 그의 권고에 따랐으며, 그 해에 성도들은 전년도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십일조를 바쳤다. 1907년까지, 교회는 교회의 모든 채권자들에게 갚을 충분한 기금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결국 교회의 모든 빚이 청산되었다.

1898년, 본부 청녀 상호 향상회를 위한 리셉션에서, 조지 큐 캐논 부대관장은 대관장단이 “현명하고 사려 깊은 몇몇 여성들을 선교사로 부르겠다”고 결정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15 이러한 발표가 있기 전부터, 몇몇 자매들이 선교사로 나가는 그들의 남편을 동행한 적이 있긴 했으나, 자매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자로서 공식적으로 부름 받고 성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매들에게는 선교사로 봉사할 의무가 없지만, 지난 수십년 간 수천 명이 복음 선교사로서 이러한 특권을 행사했으며, 복음 선교사로서 용감하게 주님을 위해 봉사했다.

로렌조 스노우 대관장이 봉사하던 시기에 교회는 20세기를 맞았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당시, 교회는 43개의 스테이크와 20개의 선교부, 및 967개의 와드와 지부가 있었다. 성도들은 283,765명에 달하였으며, 성도들 대부분이 미합중국의 록키 산맥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4개의 성전이 운영되고 있었으며, 교회 회원들에 관한 기사를 싣는 출판물로는 청소년 인스트럭터, 임프르브먼트 이라, 청녀 저널 등이 있었다. 최소한 새로운 한 개의 선교부가 곧 개설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으며, 말일성도들은 다음 백 년 동안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거의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제까지 그들은 말일성도들이 교회의 운명에 관한 예언들이 성취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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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1.   1.

    카알라일 메르, “인내하는 신도들: 체코슬로바키아와 말일성도 교회, 1884~1990년,” 몰몬 역사 일지 (1992년 가을), 112~113쪽

  2.   2.

    알 레이니어 브리치, 바다의 섬을 향해서: 태평양에서의 말일성도의 역사(1986년), 352~354쪽

  3.   3.

    리 제이 캔웰, “이별의 아픔”, 디스 피플(1995년 여름호), 58쪽

  4.   4.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5:592

  5.   5.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5:593

  6.   6.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5:590~591

  7.   7.

    멜빈 제이 밸라드: 의를 위한 십자군(1966), 16~17쪽

  8.   8.

    제임스 알 클라크 편,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대관장단 메시지, 6권(1965~1975), 3:256~257

  9.   9.

    제임스 비 앨런, 제시 엘 엠브리, 카알라일 비 메르,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고: 유타 계보 협회 역사, 1894~1994년(1995년), 39~41쪽

  10.   10.

    비 에이치 로버츠, 교회사 요해, 6:236

  11.   11.

    “윌포드 우드럽 일지” (1833~1998년), 1893년 4월 6일; 말일성도 교회 기록 보관소

  12.   12.

    리차드 니첼 홀자펠, 돌의 교훈(1992년), 71, 75, 80쪽

  13.   13.

    매튜 에프 카울리, 윌포드 우드럽(1909년), 602쪽

  14.   14.

    “시온의 구속”, 밀레니얼 스타, 1900년 11월 29일, 754쪽

  15.   15.

    “자전적 스케치: 제니 브림홀 및 이네츠 나이트”, 청녀 일지, 1898년 6월, 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