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 주에 시온을 건설함

우리의 유산, 1996


미주리에서의 초기 시절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도 많은 교회 회원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뉴욕 주 콜스빌에 살던 성도들은 떠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기꺼이 고향을 등지고 커틀랜드로 모였다.(18쪽 참조) 그들은 1831년 5월 중순에 오하이오에 도착했을 때,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성도들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주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과 시드니 리그돈 및 28명의 다른 장로들에게 미주리로 전도하러 가라고 명하는 계시를 받았다. 주님은 또한 콜스빌의 성도들도 “미주리 땅으로”(교리와 성약 54:8) 가라고 지시하셨다. 그들은 시온으로 알려지게 된 땅에 정착한 성도들의 첫번째 그룹이었다.

콜스빌 지부의 지부장이었던 뉴웰 나이트는 즉시 성도들을 모았다. 에밀리 코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진실로 순례자들이었으며 더 좋은 지역을 찾기 위해 출발했습니다.”1 그들은 오하이오 주 웰스빌에서 증기선을 타고 오하이오의 미시시피 강과 미주리 강을 이용하여 미주리 주 잭슨 군으로 갔다. 그 증기선의 선장은 그들에 대해 “자신들이 서부로 태워다 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평온하고 온순한 이주자들이었으며 ‘불경스러운 말과 상스러운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도박과 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

예언자를 비롯한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은 잭슨 군에 콜스빌 성도들이 살 곳을 미리 마련하기 위해 육로를 이용하여 서둘러서 그들보다 앞서 갔다. 예언자 일행은 1831년 7월 14일에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에 도착했다. 그 지역을 살펴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성한 인도를 구한 후, 예언자는 “[주님이] 친히 저에게 나타나셨으며 저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이 계획하신 바로 그 곳에서 집합의 사업을 시작하고 시온으로 불릴 거룩한 도시를 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3

이 계시는 미주리가 성도들의 집합을 위해 주님이 계획하신 곳이라는 사실과 “지금 인디펜던스라 하는 곳이 그 도시의 중심부니라. 성전을 세울 지점은 서쪽으로 재판소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57:3)는 사실을 명시해줍니다. 성도들은 미주리 주와 인디안 영토를 가르는 경계선까지 그 도시의 서쪽에 있는 모든 땅을 구입해야 했다.(교리와 성약 57:1~5 참조)

요셉 스미스와 패트리지 감독은 인디펜던스에서 서쪽으로 약 12마일 떨어진 코 타운쉽에 콜스빌 지부를 세울 땅을 구했다. 1831년 8월 2일에 지부 회원들이 도착한 후, 아주 상징적인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람이 통나무째로 막 자른 떡갈나무를 옮겨다가 올리버 카우드리가 준비해 둔 돌에 가로 놓음으로써 시온 건설을 위한 상징적인 토대를 놓았다. 성도들은 그렇게 초라하게 시작하여 교회와 학교로 이용될 건물을 세웠다.4

다음 날 몇 명의 형제들이 인디펜던스 재판소에서 서쪽으로 반 마일 떨어진 높은 지대에 모였다.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성전을 지을 곳에 모퉁이 돌을 놓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헌납했다. 시온 땅의 중심지는 주님의 집이 되어야 했다.5

예언자는 커틀랜드로 돌아갔고 잭슨 군의 성도들은 에드워드 패트리지 감독으로부터 토지를 나누어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무나 궁핍하여 오두막을 짓는 동안 폭풍우를 막아 줄 천막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농기구가 전혀 없어 사람들을 동쪽으로 20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세인트 루이스로 보냈다. 성도들은 장비를 갖추자마자 파종하기 위해 땅을 갈기 시작했다. 에밀리 코번은 자신이 목격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너덧 마리의 소가 멍에를 메고 비옥한 땅을 갈아 엎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었어요. 곧 이어 울타리를 치는 일과 다른 공사들도 급속히 진행되었어요. 시간과 돈과 손이 돌아가는 대로 가족들을 위한 오두막 집들이 신속히 세워졌어요.”6

콜스빌 성도들은 개척지의 불편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지냈다. 그들과 함께 지냈던 팔리 피 프랫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기도와 모임을 통해 많은 행복한 순간을 누렸습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졌으며 어린 아이들에게조차 그것이 주어져서 여덟 살이나 열 살 또는 열두 살 된 많은 어린이들이 모임과 가족 예배에서 말씀과 기도를 하고 예언을 할 정도였습니다. 광야에 세워진 이 작은 교회에는 화평과 단합의 영이 있었으며 사랑과 선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속에 항상 소중하게 기억될 것입니다.”7

그 성도들은 1832년 4월에 예언자와 시드니 리그돈의 두 번째 방문을 받는 축복을 누렸다. 이 지도자들은 오하이오 주 하이람에 있는 존 존슨 농장에서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온 직후였는데, 그들은 그 곳에서 성경의 번역 작업을 하고 있었다. 교회를 대적하는 폭도들이 밤중에 요셉 스미스를 그의 집에서 끌어냈다. 그들은 그의 숨통을 막고 옷을 벗겨서 몸에다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꽂았다. 시드니 리그돈은 발꿈치를 잡힌 채로 꽁꽁 얼어 붙은 거친 땅 위로 끌려간 탓에 머리가 심하게 찢어졌다.

이제 그들은 그런 육체적인 고통과는 반대로 친구들과 함께 안전하게 되었다. 요셉은 “같은 신앙 안에서 같은 침례를 통해 하나가 되고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 자매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고대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기뻐했던 것처럼 콜스빌 지부의 회원들이 기뻐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확인했다.8

잭슨 군에서의 박해

주님의 명에 따라 패트리지 감독은 오하이오와 다른 여러 곳에서 이주해오는 많은 성도들을 위해 잭슨 군에서 수백 에이커의 땅을 구입했다. 지도자들은 초기에 이들 회원들을 위해 인디펜던스, 콜스빌, 휘트머, 빅블루 및 프라이어리 지부를 세웠다. 1833년 후반부에 총 10개의 지부가 세워졌다.9 1833년 4월에 교회 회복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빅블루 강에서 지부 연합 모임을 가졌을 때 1,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참석했다. 뉴웰 나이트는 이 모임이 시온에서 기념식으로는 첫번째 모임이며 성도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성도들이 기뻐할 때, 악마는 화를 내며 그의 백성과 종들도 화를 냅니다.”라고 말했다.10

4월이 다 가기 전에 박해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교회 회원들에게 말일성도들이 그렇게 많이 이주해오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다고 경고했다. 주민들은 말일성도들이 투표에서 그들을 압도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성도들은 주로 북부 지역 출신들로서 대체로 노예 제도를 반대했는데 당시 미주리 주에서는 그것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몰몬경을 경전으로 믿고 잭슨 군이 궁극적으로 시온이 되며 자신들이 예언자에 의해 인도된다는 성도들의 믿음과 주장은 매우 불안한 것이었다. 또한 성도들이 인디언들과 접촉한다는 비난은 주민들의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반대자들은 “몰몬 재앙”을 몰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서명을 얻기 위해 때때로 은밀한 법으로 불리는 회보를 돌렸다. 이러한 적대감은 1833년 7월 20일에 약 400명에 이르는 폭도들이 힘을 합치기 위해 인디펜던스 재판소에 모였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들은 성도들이 잭슨 군을 떠날 것과 교회 신문인 이브닝 앤드 모닝 스타지의 발행을 중단할 것, 그리고 더이상 교회 회원들이 잭슨 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서면 요구서를 교회 지도자들 앞에 제출했다. 폭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불법적인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는 편집인인 윌리암 더블류 펠프스의 집이기도 한 신문사 사무실을 습격했다. 그들은 인쇄기를 훔쳐갔으며 신문사를 파괴했다.

계명의 책을 파기함

신문사에서 인쇄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획물은 계명의 책으로서 예언자 요셉 스미스가 받았던 계시들을 처음으로 편찬한 것이었다. 폭도들은 신문사를 습격해서 제본되지 않은 그 책의 낱장들을 거리로 내던졌다. 이것을 본 두 어린 말일성도 소녀, 메리 엘리자베스 롤린스와 동생인 캐롤린은 목숨을 걸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그것들을 건지려고 애썼다. 메리 엘리자베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폭도들은] 한 웅큼의 낱장들을 가져 나와서는 ‘여기 몰몬의 계명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제 동생 캐롤린과 저는 울타리 모퉁이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이 그 계명의 책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저는 그것들을 건져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동생은 만일 제가 그것을 건지러 간다면 자기도 따라갈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우리를 죽일거야.’라고 말했습니다.” 폭도들이 그 집의 한쪽 끝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두 소녀는 달려가서 그 귀중한 종이들을 두 팔 가득히 안았다. 폭도들은 그 소녀들을 보고 멈추라고 명령했다. 메리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달렸습니다. 그들 중 두 명이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울타리 사이에 난 틈을 보고 그리로 해서 넓은 옥수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낱장들을 땅바닥에 놓고 우리 몸으로 그것을 덮어 감췄습니다. 옥수수는 5피트에서 6피트 정도의 높이로 무성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지면서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왔으나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악당들이 사라지자 그 소녀들은 그 곳을 벗어나 어떤 낡은 통나무 마굿간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메리 엘리자베스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펠프스 자매를 만났다. “펠프스 자매와 아이들이 마굿간 한쪽에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를 날라다 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그때 우리가 가진 것을 받아서… 그들은 그 낱장들을 작은 책으로 제본해서 한 권을 제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무척 귀중한 상이었습니다.”11

패트리지 감독이 타르칠을 당하고 깃털을 꽂힘

그 폭도들은 다음에 에드워드 패트리지 감독과 찰스 알렌을 붙잡았다. 그들은 인디펜던스의 공공 광장으로 끌려가서 몰몬경을 부인하고 잭슨 군을 떠나라는 강요를 받았다. 패트리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도들은 어느 시대에나 박해를 받았으며 누구라도 상하게 할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가혹하게 다룬다면 무죄한 사람을 학대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겠지만 그 지역을 떠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폭도들은 자신들의 제의가 거절당하자 패트리지 감독과 알렌 형제의 겉옷을 벗기고 몸에다 타르 칠을 하고 깃털을 꽂았다. 패트리지 감독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가 지극히 유순하게 그 학대를 감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풀어주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엄숙해졌습니다. 내가 생각했듯이 그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영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서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이나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런 증오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12

빅블루 전투

폭도들은 7월 23일에 다시 왔다. 교회 지도자들은 폭도들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면 자신들이 볼모가 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폭도들은 교회 회원을 모두 다 해치겠다고 위협하면서 형제들에게 말일성도가 다 그 지역에서 떠나는 데 동의하도록 강요했다. 폭도들의 행위가 불법적이었고 미 합중국과 미주리 주의 헌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주지사인 다니엘 던클린에게 도움을 구했다. 주지사는 그들에게 공민권에 대해 조언해 주고 성도들이 법률 고문을 갖도록 지시했다. 알렉산더 더블류 도니판과 다른 사람들이 교회 회원들을 대리하도록 고용되었다. 그것은 폭도들을 더욱 자극시켰다.

말일성도들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이 폭행 당하고 재산이 파괴되는 상황은 마침내 빅블루 강 근처에서의 전투를 야기시켰다. 폭도 중 두 명이 죽었으며 성도들 가운데서는 앤드류 바버가 죽었다. 필로 디블은 배에 세 발의 총탄을 맞았다. 뉴웰 나이트가 불려와서 그에게 축복을 해주었으며 결과는 기적적이었다. 디블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뉴웰 나이트 형제가 와서 제 침대 곁에 앉았습니다.… 저는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제 머리에 영이 임하는 것을 느꼈으며 제가 치유되리라는 것을 즉시 알았습니다.… 저는 곧 일어났으며 총탄 때문에 몸 속으로 들어가 박힌 옷 조각과 함께 2.8리터 정도의 피를 쏟아냈습니다. 그 다음에 저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부터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피를 많이 흘려서 다소 약해진 것 말고는 부상으로 인해 아주 가벼운 고통이나 불편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13

던클린 지사가 중재에 나섰으며 토마스 피처 대령에게 양편을 무장 해제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피처 대령은 폭도들 편이었으므로 성도들의 무기를 취하여 폭도들에게 넘겨 주었다. 무방비 상태의 성도들은 폭도들로부터 공격 받았으며 그들의 집은 파괴되었다. 남자들은 숲 속으로 숨거나 심한 폭행을 당해야 했다. 마침내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소집하여 소유물을 가지고 잭슨 군을 떠나기로 했다.

클레이 군으로 피함

팔리 피 프랫이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처럼 1833년 말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미주리 강을 건너 북쪽의 클레이 군으로 가서 그 곳에 임시로 은신해 있었다.

“강기슭 양쪽에 나룻배들이 줄을 짓기 시작했다. 배에는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여러 가지 물품과 마차와 상자 및 식료품 등이 있었다. 밤이 지날 때마다 미루나무 밑에서 많은 캠프 모임을 가졌다. 사방 어디에서나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텐트 안에도 있었고 모닥불 주변에도 있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찾아 다녔다. 어떤 사람들은 다행히 가족과 함께 물품과 식량을 갖고 탈출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사도 모르고 모든 소유물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우리의 눈먼 적들과 눈멀고 무지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떤 사람의 마음도 녹일 광경이었다.”14

잭슨 군에서 시온과 하나님께 바칠 성전을 건설할 기회는 성도들에게서 잠시 멀어졌다. 이제 약 1,200명 정도의 교회 회원들은 클레이 군의 강가에서 차디찬 겨울을 지내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했다. 마차 안에 거처를 마련한 사람도 있었고 산기슭에다 텐트나 움집을 지은 사람도 있었으며 버려진 오두막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뉴웰 나이트는 인디언의 오두막에서 겨울을 지냈다.

성도들이 클레이 군에서 처음으로 지은 건물 중 하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작은 통나무 교회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악한 적의 손길로부터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앞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셔서 그들이 가는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그 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15

시온 진영에 대한 박해

제3장에서 설명한 대로 주님은 요셉 스미스에게 잭슨 군의 자기 땅에서 내쫓긴 성도들을 돕기 위해 커틀랜드에서 미주리로 행군해갈 남자들을 모으라고 명하셨다. 1834년 6월말에 시온 진영이 미주리 주의 클레이 군 동쪽에 이르렀을 때, 300명 이상의 미주리 주민으로 구성된 폭도들이 그들을 해칠 의도로 대항하러 왔다. 형제들은 예언자 요셉의 지휘 하에 리틀 강과 빅피싱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캠프를 쳤다.

폭도들은 대포로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주님이 성도들의 전투를 치러 주셨다. 구름이 급속히 머리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예언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비와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폭풍우였습니다. 바람과 비와 우박과 천둥이 격노한 것처럼 그들을 덮쳤습니다. 그들은 이내 용기가 꺾였으며 ‘조 스미스와 그의 군대’를 죽이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폭풍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마차 밑과 나무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한 낡은 오두막 안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끝났을 때 그들의 탄약은 젖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억수같은 폭풍우를 겪은 후, “이 ‘계획이 무산된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전투에 나서실 때는 차라리 싸우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폭도들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인디펜던스로 ‘돌아가는 길’을 밟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복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파멸시키려는 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보호해 준 것 같았습니다.”16

폭도의 군대가 성도들과 직면하고 던클린 지사가 성도들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 명백해지자 예언자는 주님께 가르침을 구했다. 주님은 그에게 지금은 시온의 구속을 위한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들은 시온을 건설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자신을 더 많이 준비해야 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다음과 같은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시온은 해의 왕국의 율법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건설될 수 없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시온을 내게로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나의 백성은 순종을 배우기까지 필요하면 저들이 겪는 고난으로 징계 받아야만 하느니라.”(교리와 성약 105:5~6)

주님은 다음과 같이 시온 진영은 그 군사적인 목적을 중단해야 한다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백성의 범법으로 인하여 나의 장로들이 시온이 구속받는 날을 잠시 동안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느니라. 그리하여 저들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며 나의 백성이 더욱 완전하게 배우며.”(교리와 성약 105:9~10) 시온 진영의 형제들은 명예롭게 해체되었으며 예언자는 커틀랜드로 돌아갔다.

파웨스트의 교회 본부

대부분의 미주리 성도들은 클레이 군에 1836년까지 머물러 있었는데 그 때 클레이 군의 주민들은 그들에게 잭슨 군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체류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제 이 일이 불가능해 보임에 따라 그들은 약속한 대로 떠나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법적으로 성도들이 이 요청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충돌을 일으키기보다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겼다. 성도들의 친구로서 주의 입법부에 있던 알렉산더 더블류 도니판의 노력으로 인해 1836년 12월에 콜드웰과 데이비스라는 이름의 두 개의 새로운 군이 레이 군 밖에 만들어졌다. 성도들은 콜드웰 군의 자리로서 클레이 군에서 북쪽으로 60마일 정도 떨어진 파웨스트에 그들의 사회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군의 주요한 관리들이 말일성도들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성도들에 대한 박해의 끝이기를 바랐다.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오하이오 주 커틀랜드로부터 어렵게 여행하여 1838년 3월에 미주리 주 파웨스트에 도착했으며 그 곳에 교회 본부를 세웠다. 그는 5월에 북쪽의 데이비스 군에 있는 그랜드 강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이 아담 온다이 아만 계곡으로서 “아담이 자기 백성을 찾아 보기 위하여 올 땅”(교리와 성약 116:1)임을 예언적으로 확인했다.17 아담 온다이 아만은 데이비스 군에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1838년 7월 4일에 파웨스트에서 성전의 초석이 헌납되었다. 성도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적으로부터 풀려났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크룩크 강의 전투

그러나 이내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1838년 8월 6일에 데이비스 군 갤러틴의 투표소에서 100명의 폭도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투표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다친 싸움으로 번졌다. 콜드웰 군과 데이비스 군에서 폭도들이 조장한 난동이 점점 커지자 릴번 더블류 보그스 주지사는 평화를 유지하도록 주의 민병대를 파견했다.

민병대의 장교 중 한 사람인 사무엘 더블류 보가트 장군은 사실상 폭도들과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었다. 그는 세 명의 말일성도를 납치하여 레이 군의 북서쪽에 있는 그의 진영에 감금함으로써 무력 충돌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일단의 말일성도 민병대들이 납치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되어서 1838년 10월 25일에 맹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십이사도 중 한 명이었던 데이비드 더블류 패튼 장군은 민병대를 이끌다가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의 아내인 피비 앤 패튼과 요셉 스미스와 하이람 스미스 및 히버 시 킴볼이 그와 함께 하기 위해 파웨스트로부터 왔다.

히버는 데이비드 패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전에 그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복음의 원리는 임종의 순간에 그에게로부터 사망의 고통과 공포를 거두어갔으며 위로와 도움이 되었다.” 죽어 가는 그 사람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신앙을 잃고 배도로 빠져들어가던 성도들을 염려하며 “오, 그들이 나와 같다면 얼마나 좋겠소! 난 아직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까.”라고 외쳤다. 그런 다음 그는 피비 앤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든 제발 신앙을 부정하지 마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시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니 당신께서 제 영혼을 풀어주시고 받아주시옵소서.” 그런 후 그는 둘러선 사람들에게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신앙으로 나를 잡아주었소. 그러나 바라노니 나를 풀어주시고 떠나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킴볼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하나님께 맡겼으며 그는 신음 소리도 없이 이내 마지막 숨을 거두고 예수님 안에서 잠들었다.”18

사무엘 보가트 장군의 군대는 민병대라기 보다 폭도에 더 가깝게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번 더블류 보그스 지사는 크룩크 강 전투에서의 한 민병대원의 죽음과 다른 보고들을 받아들여서 그 악명 높은 “몰몬 근절령”을 만들었다. 1838년 10월 27일자의 그 법령에는 “몰몬들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공공의 평화를 위해 미주리 주에서 근절하거나 추방해야 한다. 그들의 난폭함은 형언할 수 없다.”라고 진술된 부분이 있다.19 민병대는 주지사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임명되었다.

혼즈밀 학살 사건

근절령이 발표된지 3일 후인 1838년 10월 30일에 200명 정도의 남자들이 콜드웰 군 숄크릭크의 혼즈밀에 있는 성도들의 거주 지역을 기습했다. 적들은 비겁하게도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장간으로 도망가라고 속였다. 그런 후 그들은 건물 주위에 자리를 잡고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그 안에 대고 총질을 했다. 또 다른 폭도들은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 모두 17명의 남자와 소년들이 살해 당했으며 15명이 부상을 입었다.

학살이 끝난 후, 아만다 스미스는 대장간으로 가서 남편 와렌과 아들 사디어스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대학살 가운데서도 그녀는 또다른 아들인 어린 앨마가 심하게 다쳤지만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앨마는 머스켓 총에 맞아 엉덩이가 없어졌다. 대부분 죽었거나 다친 사람들 가운데서 아만다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도움을 간청했다.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나는 부르짖었다. 당신은 제 불쌍한 아들이 부상 당한 것을 아시며 제가 아무런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옵소서!” 아만다는 재를 태워 잿물을 만들어서 상처를 씻으라고 지시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느릅 나무 찜질약을 준비해서 그것을 상처에 채워 넣었다. 다음 날은 발삼 향유를 상처에 부었다.

아만다는 아들에게 “앨마야,… 넌 주님이 너의 엉덩이를 만들어 주실 것을 믿니?”라고 물었다.

“네, 엄마. 믿어요.”

“그런데 주님은 네 엉덩이 자리에 어떤 것을 만들어 주실거야, 주님이 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니?”

“‘엄마는 주님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린 아들은 순진하게 물었다.

“나는 ‘믿고 말고, 나는 시현을 통해 다 보았단다, 얘야.’라고 대답했다.

“그런 후 나는 앨마를 편안하게 엎어 뉘인 후 ‘이제 그대로 있어야 한다. 움직이지 마. 그러면 주님은 네게 다른 엉덩이를 만들어 주실거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앨마는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5주 동안 엎드려 누워 있었다. 관절과 뼈가 없어진 곳에 탄력있는 연골이 자라났다.”20

아만다와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장되는 것을 지켜보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브리감 영의 형제인 조셉 영을 포함하여 소수에 불과했으며, 폭도들이 돌아올 것이 두려웠으므로 관례대로 무덤을 팔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시신들을 모두 한 마른 우물에 넣어서 공동 무덤을 만들었다. 조셉 영은 어린 사디어스의 시체를 옮기는 것을 거들다가 “이 끔찍한 무덤에 그 애의 몸을 던져 넣을 수 없다.”고 외쳤다. 그는 미주리로 여행하는 동안 그 “재미있는 소년”과 놀아 주었으며 또 그런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심성이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아만다는 사디어스의 시체를 시트로 감싸 두었다가 다음 날 또 다른 아들인 윌라드의 도움을 받아 우물 안에 넣었다. 그런 후 흙과 밀짚을 던져 넣어서 그 끔찍한 광경을 덮었다.21

스무 살인 벤자민 에프 존슨 역시 아담 온다이 아만에서 그를 쏘려고 하는 한 미주리 주민의 손길에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는 억류되어 8일 동안 몹시 추운 날씨에 노천의 모닥불 앞에서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그가 통나무에 앉아 있을 때 한 “난폭한 사람”이 손에 라이플 총을 들고 그에게 다가와서는 “지금 당장 몰몬주의를 포기해라. 그렇지 않으면 쏘겠다.”라고 말했다. 벤자민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 악당은 조심스럽게 겨냥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끔찍한 욕을 퍼부으며 “20년 동안이나 그 총을 사용했지만 발사 안된 적이 한번도 없었어.”라고 외쳤다. 그는 발사 장치를 점검한 후 총알을 장전하고 다시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발사되지 않았다.

그는 세 번째도 똑같이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그 총을 잠깐 손본다면 저 자를 문제없이 죽일 수 있네.”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탄약도 새로 장전하여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벤자민을 겨냥했다. 그러나 벤자민은 “이번에는 그 총이 폭발해서 그 총을 든 사람이 죽을거요.”라고 단언했다. 한 미주리인이 “그 자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게 좋겠네.”라고 말했다.22

예언자가 감옥에 갇힘

혼즈밀 학살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예언자 요셉 스미스와 다른 지도자들이 주 민병대에 체포되었다. 예언자와 동료들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다음날 파웨스트의 시 광장에서 총살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알렉산더 더블류 도니판 장군은 그 결정을 “냉혹한 살인”이라고 부르며 사격을 거부했다. 그는 그 민병대를 지휘하는 장군에게 만일 이 사람들을 계속 죽이려고 노력한다면 “맹세코 세상의 법정에서 당신에게 책임을 지울 것이오.”라고 경고했다.23

예언자와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 인디펜던스로 끌려갔다가 그 다음에는 레이 군의 리치몬드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팔리 피 프랫도 당시 예언자와 함께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저녁에 간수들이 말일성도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강간한 자신들의 만행을 이야기하면서 죄수들을 조롱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팔리 피 프랫은 예언자가 자기 옆에서 잠이 깬 것을 알았으며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 놀라운 권세로 간수들을 꾸짖었다고 기록했다. “‘잠잠하라, 너희 지옥의 악마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꾸짖어 명하노니 잠잠하라. 그런 말을 들으면서 한 순간도 더 살지는 않겠노라. 그런 말을 그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든 나든 한 쪽이 당장 죽게 되리라!’

“그는 말을 마치고 위엄있게 똑바로 서있었다. 무기도 없이 사슬에 묶여 있었으나 천사처럼 고요하고 평온하며 고귀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떠는 간수들을 바라보았다. 간수들은 무기를 내리거나 바닥에 떨어뜨리고 무릎을 떨면서 구석으로 뒷걸음질쳐 갔으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고 다른 간수들과 교대할 때까지 조용히 있었다.”

그 다음 팔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모인 왕들과 대법관과 군주와 제왕과 황제들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미주리의 구석진 마을에 있는 감옥에서 한밤중에 사슬에 묶인 채로 서 있는 예언자보다 더 고귀하고 장엄하지는 않았다.”24

법정 심리가 끝나자 요셉과 하이람 스미스, 시드니 리그돈, 라이만 와이트, 캘렙 발드윈, 알렉산더 맥리는 클레이 군의 리버티 감옥으로 이송되어 1838년 12월 1일에 그 곳에 도착했다. 예언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담과 문이 이중으로 된 감옥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빈약한 음식을 취하면서… 밤낮으로 심한 감시를 받으며 지냈습니다. 우리는 짚 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몸을 따뜻하게 덮을 담요도 부족했습니다.… 재판관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우리가 무죄며 석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진지하게 말했지만 폭도들이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그대로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25

일리노이로 탈출함

예언자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8,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근절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주리를 가로질러 동쪽의 일리노이 주로 갔다. 그들은 한겨울에 떠나도록 강요 받았다. 그래서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었던 브리감 영이 성도들을 지휘하고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존 햄머 가족도 피난처를 찾아 떠난 많은 가족 중 하나였다. 존은 그 어려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당시의 고통과 심한 어려움을 잘 기억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마차 한 대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끄는 것은 오로지 눈먼 말 한 마리 뿐이었다. 그 말로 우리 물건을 모두 싣고 일리노이 주로 가야 했다. 우리는 말이 두 마리 있는 형제의 가벼운 마차와 우리 마차를 바꾸었다. 서로에게 적절한 교환이었다. 우리는 그 작은 마차에 의복과 침구와 옥수수 가루와 또 우리가 모을 수 있는 빈약한 식품들을 싣고서 춥고 얼어 붙은 길을 걸어서 여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늘을 지붕 삼아 길가에서 먹고 잤다. 그러나 밤중의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도 이전에 우리가 도망쳐 왔던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들에 비하면 그다지 잔인하고 냉혹한 편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맨발이었으며 몇몇은 동상에 걸리지 않고 얼어 붙은 땅바닥의 날카로운 부분에 발을 베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천으로 발을 감싸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 한다 해도 불완전한 보호책이었으므로 종종 발에서 피가 흘러 얼어 붙은 땅에 흔적을 남겼다. 우리 가족 중에서 신발을 신은 사람은 어머니와 누이 동생 뿐이었는데 그 신발들은 일리노이 주의 살기 좋은 해안에 닿기도 전에 다 해어져서 거의 쓸모없게 되었다.”26

예언자는 성도들이 미주리 주에서 쫓겨나는 동안 감옥에서 속수 무책으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예언자가 주님께 바치는 탄원을 통해 그의 영혼의 고뇌를 가늠해볼 수 있는데 그것은 교리와 성약 121편에 기록되어 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 당신께서 숨으신 곳을 가린 큰 휘장이 어디 있나이까?

“언제까지 당신의 손이 가만히 계시며 영원한 하늘에서 당신의 눈 곧 당신의 깨끗하신 눈이 당신의 백성과 종의 피해를 바라보시며 당신의 귀가 저희 울부짖음을 듣기만 하려 하시나이까?”(교리와 성약 121:1~2)

주님은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나의 아들아, 평안할지어다. 네 불행, 네 곤고는 잠시 동안이니,

“만일 네가 이를 잘 견디어내면 하나님께서 너를 높이 받들어 올릴 것이요, 너는 네 원수를 모두 이기리라.

“네 친구는 네 편이 되어 따뜻한 마음과 우정어린 손으로 또 다시 환성을 올리며 너를 맞이하리라.”(교리와 성약 121:7~9)

Joseph Smith in prison writing

주님의 말씀은 1839년 4월에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불법적으로 감금된지 6개월 후, 재판지가 변경되어 그들은 먼저 데이비스 군의 갤러틴으로 이송되었다가 다음에 분 군의 콜럼비아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윌리암 모건 보안관은 “죄수들을 절대로 분 군으로 이송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고위직에 있던 어떤 사람 또는 몇몇 사람이 죄수들의 탈출을 허용해 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마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하나도 없으면서 그들을 공판에 넘겼다가 공공연하게 수치를 당하는 일을 피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 죄수들은 두 필의 말을 구입해서 간수들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하이람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리노이 주로 방향을 변경하고 9일 내지 10일간 여행하여 아담스 군 퀸 시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곳에서 건강하긴 했으나 궁핍한 상태에 있던 가족들을 만났다.”27 그 곳에서 그들은 참으로 “따뜻한 마음과 우정어린 손”으로 환영 받았다.

윌포드 우드럽은 예언자와의 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다시 요셉 형제의 손을 잡는 행복한 특권을 누렸다.… 그는 기쁨에 넘쳐서 우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솔직하고 편견없이 친숙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뻤다. 복음을 위해 시련을 받았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만남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28 주님은 기적적으로 그의 예언자와 교회의 본체를 보호해 주셨다. 현대의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 놓인 새로운 기회와 성약으로 새로운 땅에서 다시 한번 모이기 시작했다.

참조 보이기

    주석

  1.   1.

    에밀리 엠 오스틴, 몰몬이즘; 즉, 몰몬들 가운데서의 생활(1882년), 63쪽

  2.   2.

    에밀리 엠 오스틴, 몰몬이즘, 64쪽

  3.   3.

    요셉 스미스, 말일성도의 사자요 옹호자, 1835년 9월, 179쪽

  4.   4.

    래리 시 포터, “1831년에서 1833년 사이의 미주리 주 잭슨 카운티 코 타운쉽의 콜스빌 지부,” 말일성도 교회 역사에서의 지역 연구: 미주리 주, 아놀드 케이 가 및 클라크 브이 존슨 편저 (1994년), 286~287쪽

  5.   5.

    교회 정사, 1:199

  6.   6.

    에밀리 엠 오스틴, 몰몬이즘, 67쪽

  7.   7.

    팔리 피 프랫 자서전, 팔리 피 프랫 이세 편(1938년), 72쪽

  8.   8.

    교회 정사, 1:269

  9.   9.

    극서부의 기록, 도날드 큐 캐논 및 린든 더블류 쿡 (1983), 65쪽

  10.   10.

    “뉴웰 나이트의 일지,” 자서전 모음집 (1883), 75쪽

  11.   11.

    메리 엘리자베스 롤린스 라이트너, 유타 계보 및 역사지, 1926년 7월호, 196쪽

  12.   12.

    교회 정사, 1:391

  13.   13.

    “필로 디블의 해설,” 교회사의 초기 장면 (1882), 84~85쪽

  14.   14.

    팔리 피 프랫 자서전, 102쪽

  15.   15.

    “뉴웰 나이트의 일지,” 자서전 모음집, 85쪽

  16.   16.

    앤드류 젠슨, 역사 기록 (1888년), 7:586

  17.   17.

    교리와 성약 116:1; 또한 교리와 성약 107:53~57; 교회 정사, 3:34~35쪽 참조

  18.   18.

    올슨 에프 휘트니, 히버 시 킴볼의 생애, 3판 (1945년), 213~214쪽

  19.   19.

    릴랜드 호머 젠트리, “1836년에서 1839년까지의 북부 선교부에서의 말일성도의 역사” (브리감 영 대학교 박사 논문, 1965년), 419쪽

  20.   20.

    아만다 반즈 스미스, 에드워드 더블류 튤리지, 몰몬의 여인들, 124, 128쪽 인용

  21.   21.

    아만다 반즈 스미스, 에드워드 더블류 튤리지, 몰몬의 여인들, 126쪽 인용

  22.   22.

    이 데일 르바론, “벤자민 프랭클린 존슨: 개척자요 관료요 교회 지도자” (석사 논문, 브리감 영 대학교, 1966년), 42~43쪽

  23.   23.

    릴랜드 호머 젠트리, “북부 미주리 주에서의 말일성도의 역사”, 518쪽

  24.   24.

    팔리 피 프랫 자서전, 211쪽

  25.   25.

    “제이 스미스 이세가 갤런드 씨에게 보낸 편지 부본”, 타임즈 앤드 시즌스, 1840년 2월, 52쪽

  26.   26

    라이만 오머 리틀필드, 말일성도의 회상록(1888년), 72~73쪽

  27.   27.

    교회 정사, 3:423

  28.   28.

    매튜 에프 카울리, 윌포드 우드럽(1909년),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