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창하는 교회

우리의 유산, 1996


1901년부터 1970년까지 조셉 에프 스미스, 히버 제이 그랜트, 조지 앨버트 스미스 및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 네 분이 성장기의 교회를 인도했다. 이 대관장들은 말이 끄는 마차에서부터 우주를 여행하는 로케트에 이르기까지 교통 수단의 변천을 지켜보았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세계 대공황이 성도들을 변화시켰다. 이 기간 동안 9개의 성전이 세워졌다. 1901년에 50개의 스테이크에 대략 300,000명의 회원들이 있었으며, 1970년까지 교회는 전세계 500개의 스테이크에 2,800,000명 이상의 회원들로 증가되었다.

조셉 에프 스미스 대관장

조셉 에프 스미스는 미주리 주에서의 박해가 극심하던 때인 1838년 파웨스트에 있는 성전 부지 근처의 작은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조셉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하이람 스미스는 미주리 주 리치몬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메어리 필딩 스미스가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다.

조셉이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미주리 주에서 일리노이 주 나부로 이사를 했는데, 바로 그 곳에서 그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카테이지 감옥에서 살해 당했던 것이다. 조셉은 아버지가 말을 타고 카테이지 감옥으로 끌려가던 중에, 그를 번쩍 들어 올려 입맞춤하고 내려 주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어느 날 밤 그의 이웃이 어머니에게 아버지 하이람의 살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급히 창문을 두드리던 그 무서웠던 기억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의 시신이 나부에 있는 맨션 하우스의 관 속에 뉘어져 있던 광경도 그의 뇌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소년 조셉은 그날 밤 사이에 어른이 다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메리 필딩 스미스와 그녀의 가족들은 나부에서의 탈출 행렬에 합류했다. 일곱 살된 조셉은 마차를 모는 일을 했다. 조셉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그는 샌드위치 군도(현재의 하와이 군도)로 선교 사업을 떠났다. 그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지 3개월 후, 그는 원주민어로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다. 그를 성별했던 십이사도 팔리 피 프랫과 올슨 하이드가 그에게 영적인 은사를 주었다. 21세가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선교 사업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영국에서 3년 동안 봉사했다.

브리감 영 대관장으로부터 사도로 성임 받았을 때, 조셉은 겨우 28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는 교회의 네 명의 대관장의 보좌로 봉사했다. 1901년 10월, 로렌조 스노우 대관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조셉 에프 스미스는 교회의 6대 대관장이 되었다. 그는 복음 진리에 정통하고 해박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의 설교와 저술은 복음 교리라는 제목으로 편집되었는데, 이 책은 교회의 중요한 교리서 중의 하나가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회는 몇 가지 중요한 방법으로 발전해 나갔다. 십일조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와 이에 대한 성도들의 충실한 이행으로, 교회는 지고 있던 모든 부채를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번영의 시기가 뒤따라, 교회는 성전과 예배당과 방문자 센터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교회의 역사적인 장소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는 또한 솔트레이크시티에 교회 행정 건물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아직도 교회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스미스 대관장은 전세계에 성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906년 스위스 베른에서 있었던 대회에서, 그는 팔을 펴고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 땅에 많은 성전이 들어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그 곳에 가서 여러분의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해 구속 사업을 하게 될 것입니다.”1 유럽 대륙의 첫번째 말일성도 성전인 스위스 성전이 거의 반세기 후에 스미스 대관장이 예언의 말씀을 하였던 그 도시의 근교에 헌납되었다. 스미스 대관장은 1913년에 캐나다 앨버타의 카드스톤에 성전을 지을 땅을 헌납하였으며, 1915년에는 하와이 성전을 지을 땅을 헌납하였다.

1900년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유타로 집합하는 것보다는 성도들이 거하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권고했다. 1911년 조셉 에프 스미스 대관장과 대관장단의 두 보좌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문을 발표했다. “우리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땅에 그대로 남아서 전도 사업을 돕기 위한 영구적인 성격의 회중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2

스미스 대관장은 별세하기 6주 전에 죽은 자의 구속에 관한 중요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시현으로 영의 세계에서의 주님의 성역을 보았으며, 충실한 성도들이 영의 세계에서 계속해서 복음을 가르치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계시는 1976년에 값진 진주에 첨가되었으며, 1979년에 교리와 성약 138편으로 옮겨졌다.

히버 제이 그랜트 대관장

1918년 11월, 조셉 에프 스미스 대관장은 작고하기 직전에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던 히버 제이 그랜트 장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이 축복하실 것입니다. 형제님은 큰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이 아닌 주님의 사업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더 위대하십니다. 그분은 누가 그분의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지를 알고 계시지요. 그분은 결코 실수하시는 법이 없으시지요.”3 1882년부터 사도로 봉사해 온 히버 제이 그랜트는 그의 나이 62세에 교회의 제7대 대관장이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히버는 그의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 남다른 결의를 보였다. 미망인이었던 홀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던 어렸을 때, 그는 자기 또래의 다른 소년들과 쉽게 어울려 놀지 못했다. 그가 야구 경기를 하려고 할 때, 소심하고 서투른 솜씨 때문에 그는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를 팀에 끼워주려고 하지 않았다. 실망하고 낙담하는 대신, 그는 여러 시간 끈기있게 계속해서 공 던지는 연습을 하였으며, 결국 다른 팀 선수가 되어 몇몇 지방 경기에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

소년 시절, 구두 닦는 일보다 부기 계원이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그는 부기 계원이 되고 싶었다. 그 당시 부기 계원이 되기 위해서는 글씨를 아주 잘 써야 했지만, 그의 글씨가 얼마나 악필이었던지 그의 친구 두 사람은 그의 글씨가 꼭 암탉이 이리저리 찍어놓은 발자국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그는 실망하지 않고 오랫동안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그는 글씨를 아름답게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유명하게 되어, 결국에는 대학에서 습자를 가르치게 되었으며, 중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데 종종 불려가기도 했다. 그는 주님과 성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자 결심하였으며, 이를 지켜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위대한 모범이 되었다.

그랜트 대관장은 현명하고 성공적인 사업가였는데, 그의 이러한 사업 수단은 전세계가 공황에 처해 있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있던 때에 교회를 인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자립하는 것이 정부가 아닌 주님과 자신이 열심히 일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으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다.

1930년대에, 전세계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성도들도 대공황기에 실업과 가난의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1936년,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결과, 그랜트 대관장은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모든 회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교회 복지 프로그램을 제정했다. 대관장단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는, 가능한 한 게으름의 해독을 일소하고, 실업 수당의 해악을 없애며, 독립적이고, 근면하며, 검소하고, 자존하는 시스템을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세워보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목표는 스스로 돕고자 하는 사람을 돕는 데 있습니다. 노동은 교회 회원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다시 한번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4

대관장단의 보좌로 28년 동안 봉사해 온 제이 르우벤 클라크 이세 부대관장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복지 계획의 실제적인 장기 목표는 수여자와 수혜자인 교회 회원들 사이에서 특징을 형성하는 것이고, 그들의 내부 깊은 곳에 내재된 가장 훌륭한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며, 풍부하게 잠재된 영의 결실을 맺는 데 있습니다.”5

1936년 본부 복지 위원회가 교회의 복지 사업을 관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파이오니아 스테이크 부장이었던 해롤드 비 리 부장은 위원회의 관리 책임자로 부름 받았다. 후에 데져렛 인더스트리스 상점이 실업자나 지체 부자유자들을 돕기 위해 세워졌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농장 조성과 생산 사업이 실시되었다. 오늘날 복지 프로그램은 전세계의 가난한 교회 회원들과 궁핍한 환경에 처해 있는 다른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고 있다.6

선교 사업이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동안, 그랜트 대관장은 어떤 특별한 개종에 도움을 주었다. 개신교의 이탈리아인 목사였던 빈센초 디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교회를 향해 뉴욕 시의 거리를 걷던 중에 잿더미로 가득한 통속에서 표지가 없는 책 한 권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책을 집어들고, 책장을 넘겨보았다. 그는 그 책에서 니파이, 모사이야, 앨마, 그리고 모로나이라고 하는 이름들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 책의 이름과 출처에 대해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그 책의 진실성에 대해 기도해 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해보았으며,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귀하고 특별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기쁘고 즐거운 느낌이 나의 영혼에 위안을 주었으며,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교회 회원들에게 그 책에 나와 있는 원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그의 행위에 대해 그를 징계했으며, 심지어는 그에게 그 책을 태워버리도록 지시했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후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며, 1930년 그는 그 책이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발행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유타에 있는 교회 본부로 편지를 썼으며, 그 편지는 그랜트 대관장에게로 전달되었다. 그랜트 대관장은 그에게 이탈리아어판 몰몬경을 보냈으며, 그의 이름을 유럽 선교부의 선교부장에게 보냈다. 전시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빈센초는 여러 해 동안 침례를 받을 수 없었으나, 그는 결국 1951년 1월 18일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는데, 이는 시칠리 섬에서 최초의 회원이 된 것이었다. 5년 후 그는 스위스 성전에서 엔다우먼트를 받았다.7

1922년 5월 6일, 그랜트 대관장은 교회의 첫 라디오 방송국을 헌납했다. 2년 후에 그 방송국은 연차 대회 실황을 방송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더 많은 교회 회원들이 총관리 역원들의 연차 대회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929년 7월, 태버내클 합창단은 영적인 음악과 메시지를 방송하는 주례 방송 프로그램인 음악과 진리의 말씀을 첫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계속해서 매주 방송되고 있다. 그랜트 대관장은 1945년 5월 14일에 서거하였다. 교회 대관장으로 봉사했던 그의 27년은 브리감 영 대관장의 봉사 기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긴 기간이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관장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히버 제이 그랜트 대관장의 뒤를 이어 교회의 대관장이 되었다. 평생 복음 가운데 생활하면서 행복을 찾아온 스미스 대관장은 다음과 같이 간증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모든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의 조언과 권고에 따름으로써 온 결과였습니다.”8

하나님의 계명과 교회 지도자의 권고에 순종하는 것은 스미스 대관장의 가족에게 있어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오는 의로움의 행동 양식이 되어 왔다. 그는 예언자 요셉 스미스의 사촌이며 브리감 영 대관장의 보좌였던 그의 친할아버지 조지 에이 스미스의 이름을 물려 받았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의 아버지인 존 헨리 스미스는 조셉 에프 스미스 대관장의 보좌로서 대관장단에서 봉사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33세 때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았다. 1903년부터 1910년까지 아버지 존 헨리와 조지 앨버트는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함께 봉사했다. 이 경륜의 시대에 아버지와 아들이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함께 봉사했던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는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42년 동안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충실하게 봉사했다. 그는 남부 유타 지역에서 철로를 위한 측량 조사를 하던 중에 과도하게 햇빛에 노출되어 두 눈이 손상을 입어, 거의 장님에 가깝게 된 시력을 교정하는 수술을 했으나 실패했다. 봉사하던 시기에 가중되는 압박과 필요 사항으로 인해 그의 약한 몸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1909년에 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완전한 휴식을 요하는 의사의 처방이 나온 뒤 그는 자신감을 잃었고,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까지 갖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건강이 더욱더 악화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스미스 대관장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는 꿈속에서 큰 호수 가에 있는 아름다운 숲을 보았다. 숲을 지나 얼마 동안 걷고 있던 중에,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할아버지 조지 에이 스미스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조지는 할아버지에게로 서둘러 가려 했으나, 벌써 그의 할아버지가 그의 곁에 와 서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나의 이름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였는지 알고 싶구나.” 조지의 마음속에 그의 지난 생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으며, 그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할아버지께 부끄러울 만한 일을 결코 한 적이 없습니다.” 이 꿈은 조지의 영과 육체에 새로운 힘을 주었으며, 그는 곧 다시 일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후에 그는 종종 그의 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9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관장이 봉사하는 동안, 1945년부터 1951년까지 교회 회원 수가 백만에 도달했으며, 아이다호 폴스에 성전이 헌납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선교 사업이 다시 계속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궁핍하게 된 유럽의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들이 점차 조직화되었다. 교회는 미국에 있는 교회 회원들에게 의류품과 다른 생필품들을 기부하도록 권고하였다. 스미스 대관장은 수집한 음식과 의류와 침구류를 유럽에 보내는 데 승인을 받기 위하여 당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던 해리 에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다. 스미스 대관장은 그 모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말했다. “‘왜 대관장님은 그 곳에 구호 물자를 보내려고 하십니까? 그들의 화폐는 이제 별로 가치가 없는데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그들의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대관장님의 말씀은 그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우리는 줄 것입니다. 그들은 비탄에 잠겨있는 우리들의 형제들이요 자매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잉여물의 축복을 주셨고, 우리는 정부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보낼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관장님이 옳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을 돕겠습니다.’”10

기부된 물자들이 해외로 발송되기 위해 유타에서 분류되고 포장되는 동안, 스미스 대관장이 준비 사항을 점검하기 위해 왔다. 후하게 기부된 많은 양의 생필품들을 본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분 후 그는 입고 있던 새 오버 코트를 벗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것도 보내십시오.” 함께 있던 몇몇 사람들이 추운 겨울 날씨에 그 코트가 필요할 것이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기어코 그것을 보내게 했다.11

십이사도 정원회의 에즈라 태프트 벤슨 장로가 유럽 선교부를 재개설하고, 구호 물자가 잘 분배되는지 살펴보며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 사항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임무를 지명 받았다. 벤슨 장로는 초기에 라인 강변에 위치한 독일의 칼스루헤라는 도시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벤슨 장로는 그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침내 모임 장소로 가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 곳은 한 블록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폭격으로 일부가 파손된 건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 모임에 함께 할 것이라는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성도들은 우리가 오기를 바라며 그 모임에서 두 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저희들이 단상으로 걸어 올라갔을 때, 저는 제 생애에서 처음으로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6년 내지 7년만에 마침내 그들이 시온의 대표자라고 부르는 분들이 그들을 다시 방문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입니다. 야위고 창백한 얼굴을 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으며, 신발조차 신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는 이 위대한 말일의 사업에 대해서 간증하고, 주님께 자신이 받은 축복에 감사하는 그들의 눈에서 신앙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12

벤슨 대관장이 맡은 많은 임무 중에는 특히 유럽 전역으로 갈 화물차 127량 분량의 식품, 의류, 그리고 의약품의 분배를 감독하는 임무가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토마스 에스 몬슨 부대관장이 독일 츠비카우의 새로운 예배당을 헌납하고 있었을 때, 나이가 지긋한 한 형제가 눈물을 흘리며 몬슨 부대관장에게 다가와 에즈라 태프트 벤슨 대관장이 자신을 기억하기를 바란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 분에게 가시면 그 분이 미국 교회 회원들이 모은 식품과 의복 등을 가져오셨기 때문에, 저의 생명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생명을 구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13

네덜란드의 성도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던 독일 성도들에게 기독교적인 봉사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네덜란드 성도들은 전쟁 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후에 미국 교회의 회원들에게서 복지 지원을 받았었다. 1947년 봄, 그들은 그들 자신의 복지 프로젝트를 실시하도록 요청 받았으며, 그들은 그러한 복지 프로젝트를 열정을 가지고 행하였다. 그들은 먼저 감자를 심었으며 큰 수확을 기대하였다.

이 시기에, 구 동독 선교부의 월터 스토버 선교부장이 네덜란드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황폐하고 굶주림에 처해 있는 독일 성도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네덜란드 선교부의 코넬리우스 재페이 선교부장은 회원들에게 전쟁 기간 동안 그들의 적군이었던 독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재배한 감자를 나누어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성도들은 기꺼이 동의했으며, 그들의 감자 수확이 크게 늘어나기를 기대했다. 추수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았으며, 네덜란드 성도들은 75톤의 감자를 독일에 있는 그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일년 후에 네덜란드 성도들은 90톤의 감자와 9톤의 훈제 청어를 독일 성도들에게 보냈다.14

missionaries in the Netherlands

성도들이 보여 준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표현은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관장에게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을 널리 밝혀 나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형제 자매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함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15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

데이비드 오 맥케이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관장의 보좌로서 대관장단에서 봉사했다. 1951년 봄, 스미스 대관장의 건강이 다소 호전되었을 때, 맥케이 부대관장과 그의 아내 엠마 래 자매는 그 동안 연기해 왔던 캘리포니아에서의 휴가를 위해 솔트레이크를 떠나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유타 주 세인트 조지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맥케이 부대관장이 일어났을 때, 그는 교회 본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솔트레이크로 돌아온 지 며칠 후에 스미스 대관장은 뇌일혈로 쓰러졌으며, 이로 인해 1951년 4월 4일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은 교회의 제9대 대관장이 되었다.

맥케이 대관장은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이전부터 잘 준비해 왔다. 그가 여덟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영국으로 선교사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떠맡아야 했다. 그의 두 누나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어머니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농장 일이 데이비드의 어머니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맥케이 형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내가 선교 사업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그러자 맥케이 자매는 그의 남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제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데이비드와 제가 모든 일을 잘 꾸려 갈 거예요!”16 그의 부모의 신앙과 헌신은 어린 데이비드의 마음속에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주님께 봉사하고자 하는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32세가 되던 1906년 그는 십이사도 평의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았으며, 교회 대관장이 되기 전 45년 동안 십이사도 평의회와 히버 제이 그랜트 대관장과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관장의 보좌로서 대관장단에서 봉사했다.

president McKay as a child

맥케이 대관장은 전세계에 걸친 교회 회원들을 방문하기 위해 광범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영국과 유럽, 남아프리카, 남미, 남태평양 및 기타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했다. 유럽에 있는 동안, 그는 런던과 스위스에 있는 성전 건축에 관한 준비를 하였다. 대관장단에서의 봉사가 끝나기 전에, 그는 교회 회원들에게 축복과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거의 전세계 모든 곳을 방문했다.

맥케이 대관장은 모든 성도들에게 매해 최소한 한 명의 새로운 회원을 교회로 데려 오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격려하면서 선교 사업에 대해 재차 강조했다. 그는 “모든 회원은 선교사입니다.”라는 권고의 말씀을 반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2년, 복음 선교 사업의 효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공식적인 전도 계획이 처음으로 전세계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보내졌다. 그 계획은 “복음을 가르치기 위한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에는 영으로써의 가르침이 강조되었고 하나님의 특징, 구원의 계획, 배도와 회복 및 몰몬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곱 가지 선교사 토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숫자는 놀라운 속도로 증가되었다. 1961년 교회 지도자들은 모든 선교 부장들을 위한 첫번째 세미나를 가졌는데, 선교부장들은 가족 회원들이 친구나 이웃과 우정 증진을 한 다음 그들을 자신의 집에서 선교사와 공부하게 할 수 있게 하도록 가족 회원들을 격려하라는 가르침 받았다.

맥케이 대관장이 봉사하던 기간 동안, 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교회 회원들에 의해 아시아에서의 성장을 위한 씨앗들이 심어졌다. 한국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던 유타 주 아메리칸 포크 출신의 한 사병은, 일단의 미군 병사들이 자신들이 조그만 길을 지나가는 동안 한국 민간인들을 옆으로 비켜서게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젊은 교회 회원은 그와 반대로, 길을 비켜서서 한국인들이 그 길을 지나가도록 해주었다. 그는 또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의 곁을 지나갈 때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느 날 그는 친구 다섯 명과 함께 영내에 있는 식당에 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줄이 매우 길었기 때문에, 그는 식탁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한 한국인 노무자가 음식이 든 식판을 들고 그에게 나타났다. 그는 막대기가 하나뿐인 그의 팔의 계급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단지 사병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그 한국인이 대답했다. “받아주십시오. 당신은 최고의 기독교인입니다.”17

1967년까지 선교사들과 군인 형제들이 한국에서 복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몰몬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그 땅에 스테이크와 와드가 조직되었다.

선교사들은 또한 일본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성도들은 몇 년 동안 교회의 대표자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 일본에 주둔했던 말일성도 군인 형제들은 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1945년, 타추이 사토는 홍차를 정중히 거절했던 말일성도 군인 형제들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침례 받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그의 가족들도 침례의 물가로 인도되었다. 엘리옷 리차즈가 타추이 사토 형제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당시에는 군인이었으나 나중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이 된 보이드 케이 패커 형제가 사토 자매를 침례했다. 사토 형제의 가정은 많은 일본인들이 회복된 복음의 메시지를 처음으로 들었던 장소로 쓰였다. 얼마 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인들과 대항하여 싸웠던 말일성도 선교사들이 선교 사업을 행하기 위해 일본의 여러 도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필리핀에서의 교회 성장도 마찬가지로 2차 세계 대전 후에 주둔했던 미국인 군인 형제들의 노력이 컸는데, 1961년부터 교회가 매우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교회 회원이 아니었던 한 젊은 필리핀 여성은 몰몬경에 대해 듣게 되었으며, 몇 명의 말일성도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녀는 자기와 잘 알고 지내던 정부 관리들을 만나야 한다는 강한 느낌이 들어 그들에게 필리핀에 말일성도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에 대한 승인이 내려졌으며, 몇 개월 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고든 비 힝클리 장로가 선교 사업을 위해 그 땅을 재헌납했다.

1950년대 동안 교회의 극적인 성장의 결과, 맥케이 대관장은 신권 협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해롤드 비 리 장로를 위원장으로 한 이 위원회는 교회의 프로그램들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에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 프로그램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연구하도록 임무 지명을 받았다. 1961년 대관장단의 승인에 따라 리 장로는 모든 교회 교과 과정 자료의 계획, 저술 및 시행을 관리할 정책들이 개발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미 많은 자료들도 이전에 교회 보조 조직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지시가 내려진 것은 복음이 전세계에 있는 언어와 연령이 다른 모든 회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가르쳐지기 위해 프로그램과 공과 자료의 불필요한 중복을 피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교회는 또한 교회의 사명을 보다 잘 수행하기 위해 복지 사업, 선교 사업 및 가족 역사 사업 등이 포함된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들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다른 변화들을 가져왔다. 요셉 스미스 시대부터 교회의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였던 가정 복음 교육이 영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교회 회원들을 돌보기 위한 방법으로 1960년대에 재차 강조되었다.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집회소 도서실이 설립되었고, 교사 훈련 프로그램이 또한 시작되었다. 1971년 교회는 총관리 역원의 감독 하에 어린이를 위한 프렌드, 청소년을 위한 뉴이라 그리고 성인을 위한 엔사인 등 세 개의 영어 판 잡지를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교회는 여러 선교부마다 독립적으로 발행해 왔던 외국어 판 잡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금은 한 종류의 잡지가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지고 있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은 행복의 근원과 현대 생활의 시련과 유혹에 맞설 가장 확실한 방패로서 가정과 가족 생활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강조해 왔다. 그는 종종 그가 자신의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의 아내 엠마 래 자매로부터 받은 끊임없는 내조에 대해 이야기했다. 맥케이 대관장은 봉사 기간 동안에 부모가 그들의 자녀들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고 자녀들에게 복음의 원리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매주 월요일 저녁에 갖는 가정의 밤을 시행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상호부조회는 가정과 가족의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예언자를 지지했다. 나부에서 처음 창립되었을 때부터, 상호부조회는 수천 명의 회원들을 포함하여 크게 발전해 왔다.이 여성들은 상호부조회를 통해 받는 가르침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로 인해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가족과 더불어 축복을 받았다. 1945년부터 1975년까지 벨 에스 스패포드 자매가 본부 상호부조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유능한 지도자인 스패포드 회장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 여성 평의회 회장으로 봉사하는 동안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맥케이 대관장은 1970년 1월에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거의 20년간 교회를 관리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교회 회원 수가 거의 3배로 증가했고 전세계에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참조 보이기

    주석

  1.   1.

    서지 에프 밸리프, 대회 보고, 1920년 10월, 90쪽에서 인용

  2.   2.

    제임스 알 클라크 편,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대관장단 메시지, 6권 (1965~1975년), 4:222

  3.   3.

    “편집자란”, 임프르브먼트 이라, 1936년 11월, 692

  4.   4.

    대관장단, 대회 보고, 1936년 10월, 3쪽

  5.   5.

    제이 루벤 클라크 이세, 스테이크 부장 특별 모임, 1936년 10월 2일

  6.   6.

    더 자세한 내용은 글렌 엘 러드, 참된 종교: 1930년 이후의 교회 복지에 관한 이야기(1995년) 참조

  7.   7.

    빈센초 디 프란체스카, “책을 불태우지 않으렵니다!” 엔사인, 1988년 1월호, 18쪽

  8.   8.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회 보고, 1948년 4월, 162쪽

  9.   9.

    조지 앨버트 스미스, 다른 사람들과 복음을 나눔, 프레스튼 니블리, (1948년), 110~112쪽

  10.   10.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회 보고, 1947년 10월, 5~6쪽

  11.   11.

    글렌 엘 러드, 참된 종교, 248쪽 참조

  12.   12.

    에즈라 태프트 벤슨, 대회 보고, 1947년 4월, 154쪽

  13.   13.

    게리 애반트, “전쟁은 분리시키고, 복음은 화합시킴,” 처치 뉴스, 1995년 8월 19일, 5쪽 인용

  14.   14.

    더 자세한 내용은 글렌 엘 러드, 참된 종교, 254~261 참조

  15.   15.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회 보고, 1949년 4월, 10쪽

  16.   16.

    르웰린 알 맥케이,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의 가정 회상 (1956년), 5~6쪽에서 인용

  17.   17.

    조지 더런트, “제일의 기독교인,” 임프르브먼트 이라, 1968년 11월호, 8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