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교회

우리의 유산, 1996


조셉 필딩 스미스 대관장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93세가 다 된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이 교회의 대관장이 되었다. 그는 조셉 에프 스미스 전 교회 대관장의 아들이었다.

소년 시절, 조셉 필딩 스미스는 주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여, 열 살이 되기 전에 몰몬경을 두 번이나 읽었으며, 걸어다닐 때도 경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무도회장에서도 그가 보이지 않으면, 친구들은 건초 저장 창고에서 경전을 읽고 있는 그를 찾아내곤 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어렸을 적을 돌이켜 보면, 처음으로 글을 읽을 수 있었을 때부터, 이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경전을 연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예언자 요셉 스미스에 관한 글을 읽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루어진 사업을 알아보는 데서 더욱 큰 기쁨과 만족을 느꼈습니다.”1

이처럼 어려서부터 연구한 덕분에 경전과 교회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쌓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말씀과 거의 스물 네 권이나 되는 저서와 교리를 주제로 한 수많은 중요한 기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아시아(일본 동경)와 아프리카(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첫번째 스테이크가 조직되었다. 교회 회원 수가 늘어나자, 스미스 대관장과 그의 보좌들은 전세계적으로 지역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지역 대회를 여는 관례를 시작하여 회원들이 총관리 역원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그러한 대회가 열린 곳은 영국의 맨체스타였다. 전세계 사람들에게 더욱 훌륭하게 봉사하기 위해, 보건 담당 선교사들이 부름을 받아 기본적인 건강 원리와 위생 설비를 가르쳤다. 이내 많은 나라에서 200명 이상의 보건 선교사들이 봉사하게 되었다.

1912년 이래, 교회에서는 미국 서부 지역에서 고등학교에 인접한 건물에서 열리는 세미나리 공과를 후원했다. 1920년대에는, 말일성도가 많이 다니는 단과 및 종합 대학에서 신학 연구원 과정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에는, 세미나리 새벽반 공과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스에서 시작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1,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니게 되었다. 이 사실을 목격한 비회원들은 15~18세의 말일성도들이 종교 학습반에 다니기 위해 일주일에 닷새를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1970년대 초에, 가정 학습 세미나리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전세계의 말일성도 학생들은 종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스미스 대관장의 관리 기간 동안, 세미나리와 대학부 등록수는 극적으로 증가되었다.

1972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스미스 대관장은 마지막으로 행한 대중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는 세상의 온갖 폐악을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평화를 희망하며, 현실적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회복된 복음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어느 누가 하고 있는 일이라도 복음을 전파하고 지상에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2

교회의 대관장으로 이년 반 동안 봉사한 후에, 조셉 필딩 스미스 대관장은 그의 딸 집에서 95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평생을 담대하게 주님께 봉사했다.

해롤드 비 리 대관장

조셉 필딩 스미스 대관장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날, 십이사도 정원회의 선임 회원인 해롤드 비 리 회장의 가족은 가정의 밤 시간을 가졌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 그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되겠는지 물었다. “참되게 신앙을 지켜라.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친 대로 복음에 따라 살거라.”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 메시지는 모든 교회 회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교회 대관장으로서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이러한 험난한 시대에 개인과 나라의 구원은 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3

해롤드 비 리 장로는 1972년 7월 7일에 73세의 나이로 교회의 대관장이 됨으로써 히버 제이 그랜트 대관장 이후 최연소로 대관장이 된 사도가 되었다. 그는 교회 복지 프로그램(109쪽 참조)을 지도하라는 부름을 받은 1935년 이래로 교회의 행정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그는 또한 교회 프로그램의 단일화와 상호 관련화를 유도한 교회의 프로그램과 교과 과정 검토 작업에서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하늘로부터 받은 영감에 신속히 대응하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다.

리 대관장과 그의 보좌들은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두 번째 지역 대회를 관장했다. 이 대회에 모인 교회 회원들은 말일성도들 가운데 새로운 대관장단을 가장 먼저 지지한 성도들이 되었다. 리 대관장은 모임이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것은 “교회를 놀랍게 성장시키는 데 도구가 되어온… 많은 사람들의 훌륭한 노고를 인식하고 치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에 사는 성도들에게 멕시코시티에서 지역 대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느 자매는 집집마다 다니며 빨래를 해주겠다고 했다. 다섯달 동안 그녀는 이웃의 옷을 빨아 주고 돈을 모아 대회장에 갈 수 있었으며 모든 모임에 참석했다. 많은 성도들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저축했으나 음식을 살 돈이 없어 대회 기간 동안 기꺼이 금식을 하기도 했다. 그처럼 희생을 치룬 성도들은 거대한 영적인 힘을 보상으로 받았다. 어느 회원은 대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했다.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대회 기간 동안에 느꼈던 사랑을 잊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4

리 대관장은 재임 기간 중에 성지(팔레스타인 지역)를 방문했는데, 이 경륜의 시대에 교회 대관장 자격으로 그 곳을 방문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또한 비교적 소규모의 성전들이 곧 건립될 것이며 장차 온 세상에 성전들이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73년의 성탄절 다음날, 리 대관장은 교회 대관장으로서 18개월 정도밖에 봉사하지 못하고 별세했다. 영적인 거인이 그의 영원한 처소로 돌아간 것이다.

스펜서 더블류 킴볼 대관장

리 대관장이 서거한 후에 십이사도 선임 회원이었으며,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익히 알고 있던 스펜서 더블류 킴볼 장로가 교회의 대관장으로 지지 받았다. 그의 성대는 암으로 인해 대부분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나지막하면서도 쉰 음성으로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음성을 좋아했다. 겸손과 헌신, 업무 추진 능력 및 “행하라”라는 자신의 슬로건으로 잘 알려진, 킴볼 대관장은 전력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다.

스펜서 더블류 킴볼 대관장은 대관장으로서의 첫 말씀을 교회의 지역 대표들에게 했는데, 참석한 모든 이의 가슴에 깊이 각인될 만한 말씀이었다. 그 모임의 한 참석자는 말씀이 시작된 직후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영적인 임재하심에 놀랐습니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강력하고, 다른 차원의 것을 듣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그것은 마치 그분이 전능자의 목적을 가리운 장막을 거두어 내는 것 같았으며 그분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복음의 운명과 성역의 시현을 보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킴볼 대관장은 지도자들에게 “[교회 회원들이]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만큼 충실하게 생활해 오지 못했으나, 어떤 면에서 우리는 처해진 상황에 만족해 하며 자족감을 느껴왔다”는 점을 지적한 뒤, 바로 그런 때에 지금은 유명한 슬로건이 된 ‘걸음의 폭을 넓히십시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는 청중들에게 지상의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도록 권고했다. 그는 또한 각자 자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선교사들의 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 부대관장은 설교를 마치면서, “참으로, 여기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계십니다”라고 선언했다.5

킴볼 대관장의 적극적인 지도력 하에서, 더 많은 회원들이 복음 선교사로 봉사했으며, 교회는 온 세상을 향해 함차게 뻗어 나갔다. 1977년 8월에 킴볼 대관장은 바르샤바로 여행을 하던 중에 폴란드 땅을 헌납하고 주님의 사업이 전진해 나갈 수 있도록 그 백성들을 축복했다. 선교사 훈련원이 브라질과 칠레, 멕시코, 뉴질랜드 및 일본에 세워졌다. 1978년 6월에 그는 전세계적으로 선교 사업에 크게 힘써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표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아프리카인의 후예들에게는 신권이 거부되었으나, 이제 신권과 성전 축복은 모든 합당한 남성 회원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 계시는 전세계의 모든 충실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라온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첫 흑인인 윌리엄 폴 대니얼스는 1913년 초에 교회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유타로 여행하여, 조셉 에프 스미스 대관장으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았다. 스미스 대관장은 충실하게 생활한다면, 이 생에서나 다음 생에서 신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 대니얼스 형제는 충실한 교회 회원으로 생활하다가 1936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978년에 신권에 관한 계시가 있고 난 후 그의 딸이 아버지를 위해 성전 의식을 받았다.6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서적이나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복음이 참되다는 간증을 키워나갔으나, 복음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는 없었다.

1978년 6월 계시가 있기 전 여러 달 동안, 킴볼 대관장은 그의 보좌들과 십이 사도들과 아프리카인의 후예들에게 신권의 권능이 거부되는 것에 관해 논의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의 온전한 축복이 합당한 교회 회원들에게 부여될 수 없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 선교부를 개설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킴볼 대관장은 이렇게 말씀했다. “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극히 중요한 어떤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합당해야 하고, 그러한 계시를 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계시를 받으면 훌륭하게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매일같이 저는 혼자서 참으로 순연한 마음으로 성전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제 온 영혼을 다하여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그 문제를 기도드렸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그 문제를 말씀드리고 ‘주님, 저는 옳은 일만을 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7

킴볼 대관장은 그의 보좌 및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들과 함께 성전에서 특별 모임을 갖고, 흑인 남자들에게 신권을 부여하는 것에 관해 기탄없이 의견을 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제단 주위에 무릎을 꿇고 킴볼 대관장이 소리내어 기도드렸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브르스 알 맥콩키 장로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때에, 끊임없는 간구와 깊은 신앙으로, 때가 되고 시간이 이르렀으므로, 주님은 그 누구도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기이한 방법으로 대관장단과 십이사도에게 성신을 부으셨습니다.”8 모든 합당한 남자는 신권의 충만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되었음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밝혀지게 된 것이다.

대관장단은 1978년 6월 8일자로 신권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 “교회의 합당한 모든 남자 회원은 인종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신권에 성임될 수 있다”고 계시하셨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1978년 9월 30일에, 연차 대회에 모인 성도들은 지도자들이 취한 조치를 만장 일치로 지지했다. 이 서한은 교리와 성약에 선언문 2로 나와 있다.

이러한 발표가 있은 이후로, 수많은 이프리카인 후예들이 교회로 들어 왔다. 아프리카에서 어느 개종자가 경험한 것은 주님이 이 백성들을 얼마나 축복하시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고 있던 그 형제는 첨탑인듯도 싶고 탑인 듯도 싶은 것이 달린 큰 건물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후에 그는 여행을 하다가, 말일성도 예배당을 보고는 이 교회가 그의 꿈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느껴, 그 교회의 일요 예배에 참석했다. 모임이 끝난 후에, 선교부장의 부인이 그에게 소책자를 보여 주었다. 그것을 펼쳐본 그는 솔트레이크 성전 사진을 보았는데, 그 성전은 바로 꿈에서 본 건물이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자신이 모든 구속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전부터 자주 다니던 곳에 간 기분이었습니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9

킴볼 대관장의 재임 기간 동안, 칠십인 제일 정원회가 재조직되었으며, 세 시간으로 통합된 일요일 모임 일정이 시행되었고, 성전이 빠른 속도로 건립되었다. 1982년 당시, 전세계적으로 22곳의 성전이 설계 또는 착공 단계에 있었는데, 그때까지의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수였다. 또한 킴볼 대관장은 쉴 새 없는 여행 계획을 세워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지역 대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모임에서,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돌보지 않은 채 가능한 한 빠짐없이 각 지역의 성도들을 만나 힘을 북돋워 주고 축복해 주는 기회를 가졌다.

많은 나라의 교회 회원들이 성전에서 베풀어지는 성스런 구원의 의식을 받기를 열망했다. 그중에는 여러 선교부에서 봉사하고 선교부장으로 일한 바 있는 스웨덴 출신의 한 말일성도도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스웨덴 성전 기금에 헌납했는데, 그것은 교회에서 그 나라에 성전에 건립되리라는 것을 발표하기 오래 전의 일이었다. 킴볼 대관장이 성전 건립을 발표했을 때, 그가 헌납한 기금에 이자가 발생하여 상당한 액수가 되었다. 성전이 헌납된 직후, 생전에 엔다우먼트를 받았던 이 충실한 형제는 돈을 바쳐서 성전 건립에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성전에서 그의 부모에게 인봉되었다.

싱가포르의 어느 부부는 가족을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인봉을 받고 성전 축복을 받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끝에, 성전에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예전에 그들을 가르쳐 주었던 선교사의 집에 머물렀다. 식품점에 들른 동안 그 자매는 남편과 선교사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샴푸병 하나를 들고 울고 있었다. 그녀는 성전에 가기 위해 무려 7년 간을 샴푸 한번 써보지 못한 희생까지 한 것이 슬퍼서 울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주님의 집에서 의식을 받음으로써 가족이 함께 영원히 결합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지금, 자신의 희생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리 크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킴볼 대관장의 재임 기간 동안인 1979년에도 또 하나의 큰 발전이 있었다. 교회가 새로운 영어판 흠정역 성경을 발행한 것이다. 본문은 변함이 없었으나, 성경을 공부할 때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를 전후 참조할 수 있도록 각주가 추가되었다. 대형 주제별 색인과 성경 사전이 현대의 경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되었다. 이 판에는 각 장마다 새로운 머리말이 들어갔으며 흠정역에 대한 요셉 스미스의 영감역에서 발췌한 것이 포함되었다.

1981년에는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를 새롭게 합본한 경전이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체계를 갖춘 각주와 장과 편에 대한 새로운 머리말, 지도 및 색인이 포함되었다. 이때 쯤 해서, 교회는 또한 다른 여러 나라 말로 말일의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킴볼 대관장은 몸소 모범을 보이고 또한 가르침으로써 교회 회원들에게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브리감 영 대학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는 “나는 이 대학과 교회 교육 기구에서 드라마, 문학, 조각, 미술, 과학 및 모든 학문 분야에서 눈부신 스타들이 나오게 되기를 소망하며 바랍니다.”10 하고 치사했다. 그는 또한 말일성도 화가들이 회복된 복음의 이야기를 강력하고도 설득력 있게 들려주기를 소망함을 피력한 적도 있었다.

킴볼 대관장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그는 남북 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폴리네시아 제도의 주민들에게 각별한 정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을 돕기 위한 각종 사업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조지 앨버트 스미스 대관장으로부터 그들을 돌보라는 가르침을 받은 일도 있었으므로, 교회의 대관장으로서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들에게 복음 전도를 위해 중남미의 여러 나라를 헌납 또는 재헌납하는 일을 맡겼다. 그 이후로 중남미 지역에서 수십만의 백성들이 복음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인품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혼잡한 비행장에서 날씨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던 한 젊은 아기 어머니가 두 살 난 딸과 함께 줄 뒤 쪽에 서서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 두 달째라 어린 아이를 안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딸을 바닥에 내려 놓고 있었는데, 이 아이는 배고픔에 지쳐 울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선뜻 이들을 도와 주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이를 울게 내버려 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어떤 신사분이 우리에게 와서 친절한 어조로,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제의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차가운 공항 바닥에서 울고 있는 어린 딸아이를 안아 올려 포근히 감싸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습니다. 그는 딸 아이에게 껌을 씹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딸아이가 진정하자, 그는 아이를 그대로 안고서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제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동의를 하는 듯이 보였으며, 그는 다시 앞에 있는 비행기표 확인대로 가서 직원에게 자초 지종을 설명하고 곧 떠나게 되어 있는 비행기 좌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는 저를 의자로 데리고 가 제가 완전히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저는 스펜서 더블류 킴볼 사도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가 바로 비행장에서 처음 보았던 그 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11

킴볼 대관장은 운명하기 전 몇 달 동안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고통을 받았으나, 그는 고통속에서도 항상 인내와 오래 참음과 근면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교회의 대관장으로 12년 동안 봉사하고 1985년 11월 5일에 별세했다.

참조 보이기

    주석

  1.   1.

    조셉 필딩 스미스, 대회 보고, 1930년 4월, 91쪽

  2.   2.

    조셉 필딩 스미스, 대회 보고, 1972년 4월, 13쪽; 또는 엔사인, 1972년 7월호, 27쪽

  3.   3.

    프랜시스 엠 기븐스, 해롤드 비 리(1993년), 459쪽

  4.   4.

    제이 엠 토드, “놀라운 멕시코시티 지역 대회”, 엔사인, 1972년 11월, 89, 93, 95쪽

  5.   5.

    더블류 그랜트 뱅거터, 대회 보고, 1977년 10월, 38~39쪽; 또는 엔사인, 1977년 11월호, 26~27쪽

  6.   6.

    이 데일 르배런, “검은 아프리카”, 몰몬 유산, 1994년 3/4월호, 20쪽.

  7.   7.

    스펜서 더블류 킴볼의 가르침, 에드워드 엘 킴볼(1982년), 451쪽

  8.   8.

    브르스 알 맥콩키, “만인은 하나님에게 똑같습니다”, 종교 교육자의 책임, 2판 (1981년), 153쪽

  9.   9.

    이 데일 르배런, “검은 아프리카”, 24쪽

  10.   10.

    스펜서 더블류 킴볼, “브리감 영 대학의 제2세기”, 1975년 올해의 말씀, (1976년), 247쪽

  11.   11.

    스펜서 더블류 킴볼, 에드워드 엘 킴볼 편, 앤드류 이 킴볼 이세, (1977년), 3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