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들의 가르침
에즈라 태프트 벤슨의 생애와 성역


에즈라 태프트 벤슨의 생애와 성역

유타 주 로건과 아이다호 주 휘트니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를 달리던 여행자들은 1994년 6월 4일, 평소와는 다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쭉 뻗은 39킬로미터가량의 도로 구간을 따라 수많은 인파가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들은 장례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그날은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장례식을 마친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의 시신이 그의 고향까지 운구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헤일즈 장로는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이다호 휘트니까지 가는 운구 행렬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바치는 가슴 뭉클한 헌사였습니다.

교회 회원들은 간선도로에 줄지어 서서 그곳을 지나는 운구 행렬에 애도를 표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였음에도 일요일에 입는 정장을 하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존경의 표시로 차를 잠시 세우고 경건하게 서서 선지자의 차량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농부들도 들에 서서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조의를 표했습니다. 아마도 가장 가슴뭉클한 것은 야구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며 경의를 표한 어린 소년들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지나가자 깃발마저도 바람에 휘날리며 작별을 고했습니다. ’우리는 벤슨 회장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푯말도 보였고, “몰몬경을 읽으십시오”라고 적힌 푯말도 있었습니다.”1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애정의 표시는 참으로 고인에게 바치는 조의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한 선지자의 권고를 따름으로써 그들의 삶이 변화했음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였다. 간선도로를 따라 모인 인파는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휘트니에서 태어나서 그곳에 묻힐 때까지,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주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서 봉사하고 세상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도록 도왔다.

가족 농장에서 배운 교훈

1899년 8월 4일, 사라 덩클리 벤슨과 조지 태프트 벤슨 이세는 첫 자녀를 기쁘게 맞이했다. 부부는 아기의 이름을 아기의 증조부이자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기도 했던 에즈라 티 벤슨의 이름을 따라 에즈라 태프트 벤슨으로 지었다.

에즈라는 자신이 태어나기 1년 전에 아버지가 직접 지은 방 두 칸짜리 농가에서 태어났다. 출산 과정이 워낙 길고 난산이었기에, 의사는 5.3킬로그램인 이 아기가 살아남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아기의 할머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납작한 냄비 두 개를 가져다가 한쪽에는 미지근한 물을, 다른 한쪽에는 찬 물을 채워서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갓 태어난 손자를 양쪽 냄비에 번갈아가며 담갔다 뺐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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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ra Taft Benson at three months old.

아기 때의 에즈라 태프트 벤슨, 1900년

가족과 친구들에게 “티(T)”라고 불렸던 어린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자기가 태어난 집을 둘러싼 농장에서 충실하면서도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벤슨 회장과 함께 거의 33년 동안 십이사도 정원회와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했던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어린 에즈라가 배웠던 교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헐렁한 작업복 차림을 하고, 어린 나이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는 수확의 법칙을 배웠으며, 햇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을 한 말 그대로의 시골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흉작 때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무성한 잡초만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확을 하려면 쉴새 없이 계속 일해야만 했습니다. 가을에도 봄에도 쟁기질을 했고 튼튼한 말들 뒤에서 온종일 고랑 사이를 걸어다니며 땀 흘려 일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손 쟁기를 사용했는데, 날카로운 쟁기 끝이 땅을 간 뒤에 흙이 그 위를 뒤덮으면 손잡이가 비틀리고 흔들리기 때문에 계속 굳게 붙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루가 끝나면 소년은 기진맥진해서 그대로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침은 또 금세 밝아 왔습니다.

말을 이끌고 나가 써레로 밭을 고르고 흙덩어리를 부수고 못자리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파종은 몹시 힘든 일이었고 등이 뻐근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물을 대야 했습니다. 벤슨 농장은 땅이 건조해서 관개수로를 통해 물을 댔습니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계속 물이 잘 흐르는지 지켜야 했습니다. 전등이나 가스등도 없었습니다. 약하고 희미한 노란 불빛을 내는 등유 등뿐이었습니다. 그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이랑 끝까지 물이 충분히 가게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잊지 못할 교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어린 소년이 어깨에 삽을 메고 도랑과 밭을 걸으며 바싹 마른 흙에 생명을 불어넣을 물을 끌어다 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곧이어 그 넓은 밭에 김을 매야 할 시기가 다가옵니다. 여러 마리의 소에 풀 베는 기계를 달아 소년이 낡은 철 좌석에 올라앉으면, 소들은 풀을 베는 기계를 끌고, 기계는 앞뒤로 움직이며, 1.5미터 정도 되는 구획들을 하나씩 풀을 베어 나갑니다. 파리와 모기에 시달리면서, 먼지와 뜨거운 열기를 뒤집어쓰며 일하는 것은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건초를 갈퀴로 긁어 모으고, 손 갈퀴로 건초 더미 형태로 펼쳐 말려야 했습니다. 여기서는 시간 조절이 중요했습니다. 적절한 때가 되면 건초 작업대로 쓰는 널따란 마차에 건초를 쌓아 올려야 했습니다. 야적장에서 말이 끌어 올리는 기중기 같은 것으로 마차에서 건초를 들어 올려 엄청난 높이까지 쌓아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다발을 만들거나 적재하는 기계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근육과 쇠스랑뿐이었습니다.

…… 당연히 소년은 골격이 커지고 신체가 강건해졌습니다. 훗날 그분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분의 손목 굵기에 대해 자주 말했습니다. 소년 시절에 기초를 튼튼히 다져 놓은 건강 상태는 그분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은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제외하고는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래로 내내 그분은 대통령과 왕들과 걸을 때에도 농장에서 보낸 소년 시절에 얻었던 것들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일하는 능력을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그 의지를 결코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년 시절에, 그분은 엄청난 일을 해내는 습관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을 집에서 배웠습니다. 흙에는 분명히 어떤 힘이 존재했습니다.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아담과 이브가 받은 좌우명을 그분은 늘 기억했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세기 3:19) 흙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립의 정신이 몸에 뱁니다. 당시에는 정부의 농업 프로그램도 없었고, 어떤 종류의 보조금도 없었습니다. 계절의 변덕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험도 없는 상태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된서리와 때아닌 폭풍우, 바람, 가뭄 같은 것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궁핍해질 시기를 대비해서 비축을 해야 했습니다. 생명이 위험할 때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기도, 즉 영원하고 사랑 충많으신 우주의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다호 휘트니에 있는 그 작은 집에서는 기도를 많이 드렸습니다. 그분은 아침과 저녁에 가족 기도를 드리면서 어려움과 기회가 공존하는 생활에 대해 감사드리고, 하루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간구했습니다. 그분은 기도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기억했으며, 가족이 기도를 마치고 일어날 때, 와드 상호부조회 회장이었던 어머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할 음식을 마차에 싣고 마차를 모는 일을 장남에게 부탁했습니다. 결코 잊히지 않을 가르침들이었습니다.”2

충실한 부모님에게서 배운 교훈

근면과 가족의 단합, 봉사, 복음 생활 등에 대한 이런 가르침은 에즈라가 열두 살 때, 부모님이 교회 모임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고 돌아오신 그날부터 더욱더 확장되기 시작했다. 벤슨 회장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마차를 모는 아버지 옆에서 어머니는 우편물을 열어 보셨는데, 그것은 솔트레이크시티의 박스 비(Box B)에서 온 선교사 부름장이었고, 두 분은 무척 놀라워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준비가 되어 있는지, 기꺼이 갈 용의가 있는지, 갈 수 있는지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감독님은 알고 계셨을 텐데, 조지 티 벤슨 감독님은 바로 아버지의 아버지이신 제 할아버지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당으로 마차를 몰고 들어오시면서 울고 계셨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형제자매는 일곱 명이었는데, 저희 모두는 마차 주위로 모여들어 무슨 일인지 여쭈었습니다.

부모님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데 왜 우세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거실로 들어오너라, 설명을 해 주마.’

우리는 거실의 낡은 소파 주변에 모였습니다. 아버지는 선교사 부름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선교사로 나가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받은 것이 기쁘단다. 우리가 조금 울었던 건 선교 사업이 우리가 2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야. 너희도 알겠지만, 아버지와 나는 결혼한 이후로 이틀 밤 이상을 떨어져 지내 본 적이 없단다. 이틀 밤을 떨어져서 보낸 것은 아버지가 통나무와 기둥, 장작을 구하려고 계곡에 가셨을 때뿐이었지.’”3

부친이 선교 사업을 나가자 가족 농장을 이끌기 위해 에즈라가 많은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어른이 하는 일을 했[는데]”, 여동생인 마가렛은 훗날 “오빠는 거의 2년 동안 아버지 역할을 해 주었어요.”4 하고 말했다. 어머니의 인도 아래 에즈라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75년 뒤에 벤슨 회장은 부친이 선교사로 봉사함으로써 가족이 받게 된 축복을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제 부친이 그런 부름을 받아들이신 것을 두고 이는 진실로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일곱 자녀와 임신 중인 아내를 집에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어떻게 참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아버지는 더 심오한 관점으로 사랑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는 것을 아셨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임을 아셨습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그 몇 년 동안 아버지가 몹시 그립기도 하고, 또 우리 가족에게 많은 시련이 닥쳐 왔지만, 그 부름을 받아들인 것은 사랑의 선물이었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일곱 자녀와 함께 집에 두고 선교 사업을 나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임지에 도착한 지 4개월이 지났을 때 여덟 번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저희 집에는 선교 사업의 영이 깃들었고, 그 영은 결코 저희 집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희생을 하지 않고서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선교사 기금을 대기 위해 우리의 오래되고 건조한 농장을 파셔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부부가 저희 집에 머물면서 농작물 일부를 돌보게 해야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여러 아들과 아내에게 건초밭과 목축지, 몇 마리 안 되는 소들을 맡기고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는 정말로 저희 가족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어린 저희들은 그 편지가 지구 반대편에서 오는 것만 같았지만, 사실 편지는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와 시카고 및 아이오아 주 시다래피즈와 마샬타운에서 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선교 사업을 하신 결과 저희 집에는 선교 사업의 영이 들어왔으며, 그 영은 결코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희 가족은 7남 4녀로, 즉 아이가 열한 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일곱 아들은 모두 선교 사업을 완수했으며, 그중 몇 사람은 선교 사업을 두 번 또는 세 번을 했습니다. 나중에 두 딸은 남편과 함께 전임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다른 두 딸은 모두 남편을 여의었으며, 각각 자녀가 여덟 명, 열 명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동반자가 되어 선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이러한 유산은 삼사 대에 걸쳐 벤슨 가족을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5

교회에서 봉사하던 청년 시절

부모의 모범에서 영감을 받았기에, 또한 지상에 주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도우려는 본인의 뜻에 따라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봉사 부름을 의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열아홉 살이 되자, 감독이었던 그의 조부는 와드에 있는 24명의 청남을 위한 성인 지도자로 봉사할 것을 그에게 요청했다. 그 청남들은 미국 보이 스카우트에 참여했고, 에즈라는 스카우트 단장 보조로 봉사했다.

이 부름에서 에즈라가 맡은 많은 책임 가운데 하나는 청남들이 합창단에서 노래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의 지도 아래 청남들은 스테이크 내의 다른 와드 합창단들과 경합한 합창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지역 경연대회에까지 나가게 되었다. 청남들이 연습하고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에즈라는 청남들이 지역 경연대회에서 이기면 산맥 너머 호수까지 56킬로미터가 넘는 하이킹을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휘트니에서 온 그 청남들은 결국 우승을 거머쥐었고, 그 계획은 실행되었다.

벤슨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하이킹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열두 살 소년이 손을 들더니 아주 그럴싸하게 ‘……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좋습니다, 어떤 거죠?’ 하고 묻자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이번 여행에 귀찮게 머리 빗이나 브러쉬를 갖고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머리를 짧게 자르면 좋겠습니다.’”

결국, 모든 청남이 하이킹을 가기 전에 머리를 짧게 자르는 데 동의했다. 한 청남이 스카우트 단장들도 같이 머리를 자르자고 제안하자 청남들은 더 환호했다. 벤슨 회장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발사는 이발기를 들고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스카우트 단장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아주 기분 좋게 잘랐습니다. 일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이발사가 ‘두 분이 머리를 완전히 미신다면, 공짜로 해 드리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머리를 짧게 깎은 소년 24명과 완전히 머리를 민 스카우트 단장 두 명은 하이킹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와드에서 청남들과 했던 경험을 뒤돌아보면서 벤슨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소년들과 함께 일할 때 느끼는 기쁨 중 하나는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어떤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그들과 함께하면, 여러분이 매일 지도력을 행사한 결과가 어떠한지 알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강건한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도전과 책임을 어떻게 열심히 받아들이는지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족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살 수 없는 것으로, 오로지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년들이 어른으로, 진정한 어른으로 발전하도록 돕는 일에서 작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6

벤슨 회장은 그 청남들을 언제까지나 기억했으며, 계속 연락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56킬로미터에 달하는 하이킹을 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 되어 휘트니 와드를 방문했고, 그 청남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24명의 소년 중 22명이 교회에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과는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벤슨 회장은 결국 그 두 사람을 찾아 냈고, 교회로 다시 돌아와 활동화되도록 도와주었으며, 그들의 성전 인봉을 집행했다.7

플로라의 사랑을 얻기 위해

1920년 가을, 에즈라는 휘트니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유타 로건으로 가서 유타 농과 대학(지금의 유타 주립 대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한 숙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낙농장 근처에 있을 때, 작은 차를 몰고 우유를 사러 낙농장으로 가는 아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한 여성이 보였습니다. 남자들이 손을 흔들자 그녀도 손을 흔들었습니다. 제가 ‘저 아가씨는 누구지?’ 하고 묻자, 친구들은 ‘플로라 아무센이야.’ 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난 말이야, 저 여자와 결혼할 거라는 느낌을 방금 받았어.’”

친구들은 그 말에 이렇게 말했다. ”플로라는 시골 소년을 만나기엔 인기가 너무 많아.”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그렇다면 더 기대되는걸.”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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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a Smith Amussen at college graduation Mrs. Ezra Taft Benson

플로라 아무센, 에즈라 태프트 벤슨과 결혼하기 전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플로라와 에즈라는 휘트니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된다. 플로라는 에즈라의 사촌 중 한 사람의 초대로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곧이어 에즈라는 그녀를 댄스 파티에 초대했다. 그녀는 초대를 받아들였고, 데이트를 더 하면서 나중에는 그들이 “멋진 연애 시절”이라 이름 붙인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에즈라가 영국 선교부에서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으면서 그들의 구애는 중단되었는데,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끈끈하게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즈라가 선교 사업을 준비할 때, 두 사람은 그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우정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에즈라가 헌신적인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플로라와 저는 한 달에 한 번만 [편지를]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편지에 격려와 자신감, 소식만 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8

두 선교사

영국 선교부는 초기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많은 결실을 얻은 텃밭이 되어 주었으나 벤슨 장로와 그의 동반자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목사들을 비롯하여 영국 전역에서 적대적인 사람들이 후기 성도들을 향해 광범위한 증오심을 부추기며 몰몬에 반대하는 기사와 소설을 쓰고, 연극, 영화를 만들었다. 회복된 복음을 향한 이런 신랄한 감정들에 벤슨 장로는 분명히 슬펐겠지만, 그런 시련으로 신앙이 약해지도록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는 일지에 자신과 동반자들에게 “몰몬들아!” 하고 소리치며 약을 올리는 그곳 청소년에 관해 기록했는데, 그럴 때 그는 소리 없이 이렇게 답했다. “주님, 제가 몰몬이어서 감사합니다.”9

교회 회원이 아닌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것 외에도 벤슨 장로는 영국의 후기 성도들 사이에서 신권 지도자와 서기로 봉사했다. 이런 다양한 봉사는 그가 자주 부딪혀야 했던 어려움과는 확연하게 대조되는 행복한 경험으로 이어졌다. 벤슨 장로는 몇몇 사람에게 침례와 확인 의식을 베풀었으며, 많은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이 오도록 도와주었다. 그 예로, 벤슨 장로는 충실한 회원들이 준비한 특별 모임에서 영의 인도에 따라 말씀을 전함으로써 회원의 친구들이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간증을 얻도록 도왔다.10 또한 동반자와 함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한 여성에게 신권 축복을 주었는데, 약 10분 뒤에 그 여성이 회복되었다고도 기록했다.11 서기로 봉사했던 그는 교회 기록에 이름은 있지만 현지 지도자들이 찾지 못했던 성도들을 찾았을 때, 기쁨을 느꼈다.12 그는 선교부 회장이자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었던 올슨 에프 휘트니 장로와 데이비드 오 맥케이 장로의 지도 아래 봉사하면서 귀중한 지도력 훈련을 받았다.

벤슨 장로는 복음을 전파할 때 주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신 것에 감사해했다. 어느 날 밤, 난폭한 남자들이 그와 동반자를 에워싸며 강물에 던져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그는 조용히 도움을 간구했다. 그때, “한 우람한 낯선 사람이 폭도 사이를 뚫고 제 옆으로 왔습니다. 그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우렁차고 분명한 목소리로 ‘젊은 양반, 나는 당신이 오늘 밤에 한 말을 믿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하자 저를 둘러쌌던 사람들이 물러섰습니다. 제게 이것은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습니다. 그 뒤에 영국 경찰관이 나타났습니다.”13

사람들을 위한 활동적인 봉사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몰몬경을, 특히 모사이야 아들들의 선교사 경험을 몰입해서 계속 공부해 나갔다.”14 또한 집에서 오는 편지를 통해 위안과 격려를 받았으며,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고 그는 말했다. 선교 사업을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 주셨고, 청년이었던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플로라의 [편지도] 격려와 영적인 내용으로 가득했고, 감상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보다도 그녀에 대한 제 사랑과 고마움을 키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15

벤슨 장로는 1923년 11월 2일에 전임 선교사 봉사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는 영국에 있는 “사랑하는 훌륭한 성도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은 “[그의] 선교 사업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말하며 떠나고 싶지 않았다.16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는 행복했고, 또 플로라가 보고 싶었다.

플로라 역시 에즈라가 그리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긴 안목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진정으로 앞날을, 즉 그의 미래와 잠재력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십 대 시절부터 “농부와 결혼하고”17 싶다는 소망을 간직해 왔으며, 에즈라가 아이다호 휘트니에 있는 가족 농장에 정착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는 것에 행복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학업을 먼저 마쳐야 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이 이웃에게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도록 제가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알기 위해 주님께 기도하고 금식했습니다. 감독님이 제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를 선교사로 부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에즈라는 교회를 우선시하는 사람이기에 그것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8

에즈라와 플로라의 연애가 다시 시작된 뒤에 그녀가 하와이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수락했다고 말하자 에즈라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1924년 8월 25일에 성별을 받고 다음 날 떠났다. 그녀가 떠난 직후에 에즈라는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 두 사람은 우리 앞에 많은 미래가 남아 있고, 이렇게 떨어져 있는 시간이 나중에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행복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희망이 깨지는 것을 보는 것은 힘들다. 그 문제로 우리는 울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은 더 큰 것을 위한 것이라는, 주님께서 주시는 확신도 받았다.”19

그것은 정말 모두가 잘 되는 길이었다. 플로라의 선교부 회장은 그녀가 “아주 훌륭하고 열정이 넘치는 선교사[였으며]”20 “주님의 사업을 위해 마음과 영혼, 시간과 재능을”21을 다 바쳤다고 말했다. 플로라는 임지에서 초등회 조직을 이끌기도 하고,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성전에서 봉사하고, 현지의 후기 성도들을 강화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또한 그녀의 어머니 바바라 아무센이 남편과 사별하고 단기 선교사로 부름을 받자 어머니와 동반자가 되어 봉사하기도 했다. 함께 동반자가 된 두 사람은 플로라의 아버지인 칼 아무센의 노력으로 미국에서 오래 전에 교회에 들어왔던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이 개종자는 교회에서 멀어져 있는 상태였으나, 플로라와 어머니는 그와 우정을 나누며 그를 도와주었고, 결국 그는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22

플로라가 선교 사업을 간 뒤에 에즈라는 계속 바쁘게 지냈다. 그와 동생인 오벌은 가족 농장을 구매했고 두 사람 다 학업을 계속했다. 에즈라가 유타 프로보의 브리검 영 대학교에 다닐 동안 오벌은 휘트니에 남아 농장을 돌봤다. 에즈라가 학업을 끝내면 농장으로 돌아오고, 오벌은 선교 사업을 나간 후 귀환하여 학업을 마치자는 계획이었다. 브리검 영 대학교를 조기 졸업하기로 마음 먹은 에즈라는 야심에 찬 수강 일정을 추진했다. 또 그러면서도 대학교에서 춤과 파티, 극작품 같은 사교 활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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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Ezra Taft Benson in cap and gown, graduation

에즈라 태프트 벤슨, 1926년 브리검 영 대학교 졸업 당시

4학년 때 에즈라는 “브리검 영 대학교 최고 인기 남학생”으로 뽑히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플로라에게 준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플로라가 1926년 6월에 선교 사업을 마쳤을 때, 에즈라는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훗날 고백했다.23 그는 플로라가 귀환하기 몇 달 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했다.

함께 삶을 시작하며

플로라가 귀환하고 한 달 뒤에 두 사람은 약혼을 발표했다. 어떤 사람들은 플로라의 판단에 계속 의문을 제기했다. 재능이 많고 부유한데다 인기도 많은 그녀가 왜 농촌 총각에 만족해하는지를 다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늘 농부와 결혼하고 싶었다”24고 답했다. 그녀는 에즈라를 “현실적이고 현명하며 견실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또 “에즈라는 부모님에게 효를 다하는 사람인데, 부모님을 그렇게 존중한다면, 나에게도 그렇게 해 줄 것”25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에즈라가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라는 것을 알아보았으며 “이 작은 고장은 물론이고, 온 세상이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고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26고 말했다.

플로라와 에즈라는 1926년 9월 10일에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십이사도 정원회의 올슨 에프 휘트니 장로를 통해 인봉되었다. 결혼 후에 있었던 축하연은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아침 식사를 든 것이 전부였다. 아침 식사 후에 신혼 부부는 곧바로 포드사에서 만든 티형 소형 트럭을 타고 아이오와 주 에임즈를 향해 떠났다. 그곳에서 에즈라는 아이오와 농업 및 기계 주립대학(현 아이오와 과학기술 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사 학위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행 대부분은 울퉁불퉁한 흙길을 헤치며, 인적이 드문 시골 지역을 지나야 했다. 여행 중에 두 사람은 구멍이 난 천막에서 8일 밤을 보냈다. 에임즈에 도착한 후, 대학 교정에서 한 구역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빌렸다. 작은 아파트에서 둘은 우글거리는 바퀴벌레들과 함께 살았지만, 에즈라는 그 집이 “금세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주 아늑한 작은 별장같이 보이기 시작했다.”27고 말했다. 에즈라는 다시 교육을 받는 데 전념했다. 공부를 하고 강의를 듣고 논문을 쓰면서 많은 시간을 학업에 전념한 결과, 그는 1년도 안 되어 석사 학위를 획득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첫 출산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무렵에 이 부부는 휘트니에 있는 벤슨 농장으로 돌아왔다.

일과 교회 부름 사이에서의 균형 잡힌 생활

휘트니로 돌아온 다음부터 에즈라는 우유를 짜고, 돼지와 닭을 키우고, 사탕무와 곡식, 알팔파와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 등 농장 운영에 하루하루를 다 바쳤다. 오벌은 덴마크에서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지방 정부 지도자들은 에즈라에게 카운티 농업 지도원 자리를 제안했다. 농장을 떠나 인근의 프레스턴으로 이사해야 했지만, 에즈라는 플로라의 격려 속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오벌이 돌아올 때까지 농장을 맡아 줄 인근의 농부를 고용했다.

벤슨 회장의 새로운 책임에는 현지 농부들에게 생산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상담해 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농부들에게 더 나은 마케팅 기법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것은 대공황이 시작된 이후로 점차 중요성이 더해 가고 있던 부분으로, 그는 농업경제학을 공부한데다 그런 정보를 제공할 만한 직책에 있기도 했다. 벤슨 회장은 농부들에게 생산 비용을 낮추고 노동력 투자 대비 높은 수입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협동조합 참여를 장려했다.28

그가 농업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보이자 그에게 다른 직책들이 제안되기 시작했다. 1930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아이다호 주의 주도인 보이시의 아이다호 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농업 경제학자이자 전문가로 재직했다. 하지만 1936년 8월부터 1937년 6월까지는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하면서 그 직책을 잠시 그만두었다.

직장과 가정에서 밀려드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에즈라와 플로라는 시간을 내어 교회에서 봉사했다. 휘트니와 프레스턴 보이시에서 두 사람은 청소년을 가르치고 이끌도록 부름받았다.29 그들은 “청소년이 곧 우리의 미래”30라는 믿음으로 그 부름을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에즈라는 또한 현지의 선교 사업을 도왔다.31 보이시에서 에즈라는 스테이크 회장단 보좌로 부름을 받았으며, 가족과 캘리포니아에 사는 동안에도 계속 그 직책을 유지했다. 보이시 스테이크는 급성장을 했고, 1938년 11월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멜빈 제이 밸라드 장로가 스테이크를 세 곳으로 분리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은 그중 한 스테이크의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1939년 1월, 에즈라는 워싱턴디시에 있는 농업 협동조합 전국 협의회의 사무국장 직책을 제의받게 된다. 그는 이 문제를 플로라와 상의했다. 두 달 전에 스테이크 회장으로 성별되었기에 그는 제일회장단에게도 연락해서 조언을 구했다. 제일회장단은 직책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고, 1939년 3월, 그는 보이시에 있는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가족과 함께 워싱턴디시에서 가까운 메릴랜드 베데스다로 이사했다. 1940년 6월에 그는 다시 스테이크 회장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워싱턴디시에 새로 조직된 워싱턴 스테이크였다.

사랑으로 단합된 가족

에즈라와 플로라 벤슨은 배우자로서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자녀들, 연로한 부모님, 형제자매들과 맺는 관계의 영원한 중요성을 늘 기억했다. 가족의 단합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한 것은 의무감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이생과 영원한 세상에서도 함께하고 싶었다.

교회 부름과 직장에서 맡은 많은 책임으로 에즈라는 자주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종종 어린 자녀들은 그러한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어, 어느 일요일에 그가 교회 모임 때문에 집을 나서려 할 때 딸 바바라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안녕히 가세요, 아빠. 다음에 또 오세요.”32 남편이 자주 집을 비우는 동안 플로라는 혼자 여섯 자녀를 키우기가 쉽지 않았고, “외롭고 또 조금은 낙담할” 때도 가끔 있었다.33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견뎌 냈고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남편이 주님과 가족에게 헌신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뻐했다. 에즈라에게 보낸 편지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늘 그렇듯 당신이 떠난 뒤에 보낸 그 며칠은 마치 몇 달 같았어요. ……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종교를 사랑하고 그에 따라 생활한다면, 슬픔과 고통은 거의 없을 거예요. …… 당신은 언제나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잖아요.”34

에즈라는 집에 있을 때 언제나 그런 헌신을 보여 주었다. 그는 시간을 내어 여섯 자녀들과 웃고, 함께 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듣고, 복음을 가르치고, 집안에서 가사일을 돕고, 각 자녀와 개별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단합된 사랑 속에서 위안과 힘을 얻었다. (에즈라 태프트 벤슨에게는 가족이 매우 중요했기에 본 교재는 가족에 대한 벤슨 회장의 가르침을 두 장에 걸쳐 다루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과 가족”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성스러운 부름”이라는 부분에는 벤슨 부부의 자녀들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다정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도로 부름받다

1943년 여름, 에즈라는 아들 리드를 데리고 메릴랜드를 떠나 농업 협동조합 전국 협의회에서 맡은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여러 농업 협동조합 순방에 나섰다. 또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고 아아다호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할 계획도 세웠다.

출장 업무를 다 마친 7월 26일, 그들은 고향으로 가기 전에 솔트레이크시티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을 만난 지 채 2주도 지나지 않았지만, 맥케이 회장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에즈라는 맥케이 회장에게 전화했고, 맥케이 회장은 당시 교회 회장인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에즈라와 리드는 솔트레이크시티 시내에서 몇 분 거리에 있는 그랜트 회장의 여름 주택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에즈라는 즉시 그랜트 회장의 침실로 찾아갔다. 연로한 선지자는 그곳에서 쉬고 있었다. 회장의 지시로 에즈라는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랜트 회장은 그의 두 손으로 에즈라의 오른손을 잡고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벤슨 형제님, 온 마음을 다해 나는 형제님을 축하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형제님과 함께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형제님은 십이사도 평의회에 최연소로 부름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35

일지에 에즈라는 그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회장님의 말씀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고, 나는 완전히 당황했다. …… 몇 분 동안 [나는] 이 말만 되풀이했다. ‘아, 그랜트 회장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충분히 깨달을 만큼 마음이 차분해지기까지 나는 그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 우리가 함께 눈물을 흘리는 동안 그분은 내 손을 잡고 계셨다. …… 한 시간 정도 우리는 둘만 있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따뜻하게 손을 맞잡고 있었다. [비록 그분은] 연약하셨으나 정신은 맑고 분명했으며, 나는 그분이 내 영혼을 꿰뚫는 것처럼 바라보실 때 그 따뜻하고 친절하며 겸손한 영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너무나 연약하고 합당하지 않았기에 그분의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이 정말 감사했다. 그분이 하신 다른 어떤 말씀보다도 이 말씀이 힘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지도자 자리에 부름받은 사람들이 그 일을 잘 수행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연약하기는 하지만 교회를 사랑해 왔다고 말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도 그것을 압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사람을 원하십니다.’”36

이렇게 접견을 끝내고 에즈라와 리드는 맥케이 회장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갔다. 가는 길에 에즈라는 그랜트 회장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고, 리드도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맥케이 회장 집에 도착하자 맥케이 회장은 직접 리드에게 이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이 끝난 후, 에즈라와 리드는 서로를 껴안았다.

에즈라와 리드는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고, 에즈라는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그는 플로라에게 전화해서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는 무척 기뻐하면서 제가 잘 해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내와 이야기를 하니 안심이 조금 되었습니다. 아내는 늘 저 자신보다도 저에 대해 더 많은 믿음을 보여 주는 사람이었습니다.”37

그 후 몇 주에 걸쳐서 에즈라와 플로라는 유타 주로 이사할 준비를 했고, 에즈라는 농업 협동조합 전국 협의회 업무를 후임자에게 원만하게 인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43년 10월 1일, 그는 스펜서 더블유 킴볼과 더불어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원으로 지지를 받았으며, 10월 7일에는 사도에 성임되었는데, 킴볼 장로가 먼저 성임되었다.

이렇게 하여 “온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의 특별한 증인”(교리와 성약 107:23)의 한 사람으로서 에즈라 태프트 벤슨의 성역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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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rum of the Twelve ca. 1950 [Back Row Left to Right: Delbert L. Stapley, Henry D. Moyle, Matthew Cowley, Mark E. Petersen, Harold B. Lee, Ezra Taft Benson, Spencer W. Kimball; Front Row Left to Right: John A. Widtsoe, Stephen L. Richards, David O. McKay, Joseph Fielding Smith, Joseph F. Merrill, A.E. Bowen.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들(1950년 10월부터 1951년 4월 사이의 어느 시점). 뒷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델버트 엘 스테이플리, 헨리 디 모일, 매튜 카울리, 마크 이 피터슨, 해롤드 비 리, 에즈라 태프트 벤슨, 스펜서 더블유 킴볼. 앞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존 에이 윗소, 스티븐 엘 리차즈, 데이비드 오 맥케이(십이사도 정원회 회장), 조셉 필딩 스미스(회장 대리), 조셉 에프 메릴, 앨버트 이 보웬.

전후 유럽에 식품과 의류, 희망을 전하다

1945년 12월 22일, 당시 교회 회장인 조지 앨버트 스미스 회장은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특별 합동 모임을 소집했다. 스미스 회장은 제일회장단이 한 사도를 보내 유럽 선교부를 감리하고 그곳의 교회 활동을 감독하게 해야 한다는 영감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고, 많은 유럽 국가들이 전쟁으로 입은 엄청난 파괴에 대해 복구 작업을 막 시작한 때였다. 제일회장단은 그 일을 할 적임자는 에즈라 태프트 벤슨 장로라고 느꼈다.

이 소식은 이제 갓 정원회에 들어온데다 최연소 회원이기까지 한 벤슨 장로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34년 전, 아버지의 선교사 부름처럼 이 임무를 맡으면, 아직 자녀들이 어린데도 가정을 떠나 있어야 했다. 제일회장단은 기한을 확정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자녀들이 그를 지지해 줄 것이라고 확언했으며 흔쾌히 봉사하겠다고 대답했다.38 그는 그 임무를 받아들였던 상황을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부담감이 엄청났습니다. 그분들[제일회장단]은 네 가지 목표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유럽에서 교회의 영적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가용 식품, 의류, 침구를 유럽 각지에서 고통받는 우리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유럽의 여러 선교부를 다시 조직하는 일을 지휘하는 것이었고, 넷째는 각국에 선교사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39 스미스 회장은 그에게 위로가 될 약속을 주었다. “형제님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형제님이 스스로를 잘 보살피면, 세상 어느 곳에서보다도 안전히 지낼 것이며,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40

벤슨 장로는 아내와 가족에게 이 소식을 전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내와 행복하고 감동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눈물로 정화된 플로라는 애정어린 감사를 표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지를 보내며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은 깜짝 놀라고 흥미로워하면서 완전한 지지를 보여 주었습니다.”41

유럽에 도착한 벤슨 장로와 그의 동반자 프레데릭 더블유 바벨은 도처에 널린 질병과 빈곤, 폐허에 슬픔을 느꼈다. 그 예로, 벤슨 장로는 플로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누와 바늘, 실, 오렌지를 선물로 받고 고마워하는 어머니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오랫동안 그런 물건을 구경도 못해 온 터였다. 벤슨 장로는 그들이 그때까지 배급 받은 형편없는 비상 식량으로 “아사 지경에서도 진정한 모성애로 자녀를 더 먹이려 하는 것”42을 보았다. 그는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에서” “칠흑 같이 어두운 상태로” 진행된 교회 모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43 또한 “가난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영혼들, …… 예전의 행복했던 집을 잃고 정처없이 쫓겨난” 난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44 그리고 그는 전쟁의 참혹한 결과 속에서 피어난 기적에 대해 말했다.

그 기적은 유럽 전역의 후기 성도들의 생활로 입증되었다. 유럽으로 가는 길에 벤슨 장로는 성도들이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비통함으로 가득할까? 증오하지는 않을까? 교회로부터 등을 돌렸을까?”하지만 그가 본 광경은 오히려 그에게 힘을 주었다.

“성도들의 얼굴은 야위고, 창백하고, 말랐으며, 많은 사람이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맨발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위대한 후기의 사업의 신성함에 대해 간증하고, 주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를 표할 때, 저는 그들의 눈에서 신앙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우리는 성도들이 기적적으로 생활을 이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강했고, 헌신이 더 커졌고, 충실성은 더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설령 괴로움이나 절망이 있다 해도 아주 작았습니다. 한 선교부에서 다른 선교부로 동료애와 형제애가 확대되었고, 길을 떠나는 저희에게 성도들은 다른 나라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며 부탁했습니다. 비록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 교전을 벌이던 나라였음에도 말입니다.” 난민들마저도 “열렬하게 시온의 노래를 불렀으며” 아침저녁으로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고 복음의 축복에 대해 …… 간증했습니다.”45

교회 복지 프로그램의 힘을 통해서도 또 다른 기적들이 일어났다. 10여 년 전에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유럽에서 많은 후기 성도들의 목숨을 구했다. 복지 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도들은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식품과 의류와 다른 필요한 것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며 돕고,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 뜰에서 작물을 키우기도 했다. 또한 세상의 다른 곳에 있는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약 2,000톤이나 되는 구호물자를 기증하면서 그들은 축복을 받게 되었다. 벤슨 장로는 현지 회원들에게 나눠 줄 기초 식품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교회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와,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받은 옷을 입은 사람이 80퍼센트에 달했던 어느 회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46 집으로 돌아온 후 연차 대회 말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그것이 영감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에 대해 어떤 증거가 더 필요하십니까? …… 하나님께서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계심을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영감받은 프로그램입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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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ra Taft Benson in Bergen, Norway. Caption: "Inspecting welfare supplies with Pres. Petersen in mission office basement." Collection Summary: Black-and-white views taken during Benson's February-December 1946 mission to postwar Europe to meet with Latter-day Saints, direct distribution of welfare supplies, and arrange for resumption of missionary work.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복지 물자를 살펴보는 벤슨 장로(오른쪽)

벤슨 장로와 바벨 형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들을 다닐 때 주님께서 문을 열어 주셨던 기적을 여러 번 경험했다. 벤슨 장로는 군 관계자들에게 특정 지역에 들어가서 성도들을 직접 만나 물품을 전달할 수 있도록 승인해 줄 것을 수 차례에 걸쳐 요청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관계자들에게서 “여기가 전장이었다는 것을 모릅니까? 민간인 출입은 불가합니다.”라는 한결같은 대답만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군 관계자들의 눈을 바라보며 이 일의 목적을 설명한 결과, 벤슨 장로와 바벨 형제는 출입 허가를 받아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시며 명하신 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48

약 11개월 후에 벤슨 장로는 십이사도 보조인 앨마 손 장로와 임무를 교대했으며, 손 장로는 아내 레오나와 함께 유럽에서 봉사했다. 바벨 형제는 계속 남아 손 장로 부부를 도왔다. 1946년 1월 29일에 솔트레이크시티를 떠나 1946년 12월 13일에 돌아올 때까지 벤슨 장로는 총 98,550킬로미터를 여행했다. 벤슨 장로는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느꼈지만,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한 노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그 근원을 저는 압니다. 전능하신 이의 인도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취할 수 없었다는 생각을 저와 동료들은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49 이 임무의 성공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교회의 힘이 새롭게 조직되고 확대되는 결과를 보게 되었다. 여러 해 뒤에 독일 츠비카우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을 찾아온 한 남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성공은 또한 성도들 개개인의 삶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몬슨 회장을 찾아가 자신의 안부를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분이 저를 살렸어요. 저에게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주셨지요. 희망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축복하시길 바랍니다!”50

미국 정부에서 보여 준 애국심, 정치력, 헌신

집과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벤슨 장로는 청소년 시절부터 소중히 간직해 온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것은 미국의 시민정신이었다. 아버지인 조지 태프트 벤슨 이세에게서 그는 조국과 국가의 토대가 되는 원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미국 법률을 규정하는 문서, 즉 미 헌법은 영감에 따라 작성되었다고 배웠다. 그는 투표권을 소중히 여겼으며, 선거가 끝난 후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늘 기억했다. 조지가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적이 있는데, 그는 가족 기도 때에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그 후보가 선거에서 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에즈라는 아버지가 당선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에즈라는 지지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위해 왜 기도하는지 그 이유를 여쭈었고,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아, 내가 지지한 후보보다도 당선된 그 사람에게 내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한단다.”51

1948년 4월, 벤슨 장로는 미국에 주어진 “예언적 사명” 및 자유의 중요성을 주제로 여러 차례 연차 대회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날이 처음으로 그 주제를 다룬 날이었다. 그는 주님께서 “자유의 요람으로서” 미국을 준비하셨기에 그곳에서 복음이 회복될 수 있었음을 간증했다.52 말씀 말미에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평강의 왕을 따르는 우리는 진리와 의로움을 전파하고 자유를 보존하는 데 우리의 삶을 다시 헌납해야 합니다.”53 그 뒤 여러 설교를 통해 그는 “이 후기에” 미국이 “주님의 운영 기지”54로 쓰인다고 말했다.

벤슨 장로는 미국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위협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했다. “영원한 원리와는 반대로” 운영되는 “인간이 만든 강압적인 [정부] 체제”55에 대해 자주 강력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또한 부도덕한 오락과 안식일에 대한 존중심 부족, 현실 안주, 그릇된 가르침을 비롯하여 자유를 위협하는 기타 영향력에 대해 경고했다.56 그는 세계 곳곳의 후기 성도에게 그들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지혜롭고 좋은 사람들이 공직에 선출되도록 힘쓸 것을 장려했다.57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는 자유의 분위기 안에서만 번성할 수 있습니다. 네, 우리는 모두 자유를 말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보호하고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58

1952년 11월 24일, 벤슨 장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제의를 받게 되면서 그 동안 애국과 관련해서 전했던 그의 강력한 발언들을 증명해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에 선출된 드와이트 디 아이젠하워의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벤슨 장로를 그의 내각에서 전국 농업 업무를 담당하는 장관으로 지명하여 자신의 최측근에서 일하도록 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벤슨 장로는 그런 관심을 기쁘게 여겼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 직책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 제 생각에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이런 시기에 농무부 장관 자리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 자리가 서로 인신 공격을 퍼붓고, 엄청난 압력과 복잡한 문제들이 따른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제가 염려한 것은 그런 문제와 압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겪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미국인처럼 저도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가 싫었습니다. 저 역시 이상이 높고 성품이 훌륭한 사람들이 선출되고 임명되어 정부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제가 전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

무엇보다도 저는 십이사도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이미 하고 있는 일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 어떤 변화를 원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었습니다.”59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러 가기 전에 벤슨 장로는 당시 교회 회장인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에 맥케이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벤슨 형제님, 이 일에 대한 제 생각은 분명합니다. 올바른 의도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면, 형제님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60 이런 직접적인 조언은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위해 효과적으로 싸우고” 싶다는 벤슨 장로의 근본적인 소망과 합쳐져 그가 “내적인 갈등”이라 이름 붙인 상황을 야기했다.61

벤슨 장로를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농무부 장관 직책을 제의했다. 벤슨 장로가 자신이 그 직책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들을 즉시 댔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될 때, 저도 대통령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은 미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우리 팀에서 일하기를 바라며, 당신은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62

벤슨 장로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말이 맞았습니다. 맥케이 회장님이 조언했던 조건들이 다 충족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는 정부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영예를 이미 교회에서 받은 상태였고, 그런 의견을 당선자에게 말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2년간은, 대통령이 그렇게 오래 저를 둘지는 모르겠지만, 농무부 장관으로서 봉사할 책임을 받아들였습니다.”63

직책을 받아들인 즉시 벤슨 장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 기자 회견에 나갔고, 그의 임명 소식이 전국에 알려졌다. 회견이 끝나자마자 그는 호텔로 돌아와 플로라에게 전화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으며, 이를 받아들였다고 알렸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제의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수락할 것도 알았죠.”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건 정말 막중한 책임이요. 우리 두 사람에게 큰 문제가 많이 생길 것이요.”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알아요,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아요.”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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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Ezra Taft Benson being sworn in as the Secretary of Agriculture

드와이트 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바라보는 가운데 프레드 엠 빈슨 대법원장 앞에서 미국 농무부 장관으로서 선서하는 벤슨 장로

벤슨 장로가 예상했듯이, 농무부 장관의 업무는 그와 그 가족에게는 떠들썩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기 경연 대회에서 이기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저 “농업을 위해, 또 미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으며]”65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소신대로 행했다. “좋은 전략이란, 인기가 없더라도 옳은 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인기가 없는 때일수록 나는 그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66 그가 인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신념을 흔들림 없이 지켜 나가는 동안 정치인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그의 지지도는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사람들이 그가 농무부 장관직에서 쫓겨나길 바랄 때도 있었고67 그를 미국 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올 때도 있었다.68

정부 지도자로 일하면서도 벤슨 장로는 자신의 기독교적인 이상과 회복된 복음에 대한 간증,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농무부에서 직원들과 회의를 할 때마다 기도로 시작했다.69 그는 미국의 운명에 대해 몰몬경에 예언되어 있는 구절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훗날 대통령은 “큰 관심을 갖고” 그 구절을 읽어 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70 그는 몰몬경을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에게 전달했다.71 1954년,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뉴스 기자인 에드워드 알 머로우는 벤슨 장로에게 “퍼슨 투 퍼슨(Person to Person)”이라는 금요일 저녁 프로그램에 가족과 함께 출연할 것을 제의했다. 벤슨 장로와 자매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것이 좋은 선교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아들 리드의 의견에 따라 출연에 동의했다. 1954년 9월 24일, 온 국민이 벤슨 가정에서 예행 연습 없이 진행된 가정의 밤을 생방송으로 시청했다. 그 방송 이후, 머로우 기자는 시청자들로부터 다른 때보다 더 많은 팬 레터를 받게 되었다. 전국에서 종교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벤슨 가족의 빛나는 모범에 대해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72

벤슨 장로는 8년간의 아이젠아하워 대통령 정부 집권 기간 내내 농무부 장관으로서 봉사했다. 맥케이 회장은 벤슨 장로의 업적이 “교회와 국가에 미친 공적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73 벤슨 장로는 국가적으로 관심을 받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위대한 땅을 사랑합니다. 봉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74 또 이렇게 언급했다. “다시 그 일을 해야 한다면, 같은 길을 따를 것입니다.”75 사도로서 앞으로 펼쳐질 성역을 내다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농업보다 제가 유일하게 더 좋아하는 일에 제 여생을 바치겠습니다.”76

비록 정부에서 봉사한 기간은 1961년에 끝이 났지만, 나라와 자유의 원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 연차 대회에서 여러 차례 연단에 서서 그는 이런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미국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땅”77이라고 칭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든 곳에서 애국심과 나라 사랑을 소중히 여깁니다.”78 그는 모든 후기 성도에게 조국을 사랑하도록 권하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애국심은 국기를 흔들고 용감한 발언을 하는 것 이상을 뜻합니다. 그것은 공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정말 참된 의미의 애국자로서 우리 자신을 다시 헌신합시다.”79 “정치적 기회주의자와 달리 참된 정치인은 인기보다 원리를 소중히 여기며, 지혜롭고 의로운 정치 원리가 인기를 끌도록 일합니다.”80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특별한 증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에즈라 태프트 벤슨 장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는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문을 열[라]”(교리와 성약 107:35)는 명령에 순종했다. 그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봉사하면서 선교부를 방문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는 후기 성도들과 만나는 특권을 소중히 여겼다. 연차 대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테이크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 종종 아내에게 했던 말이 있는데, 저는 천국이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전 세계에 있는 시온의 스테이크와 와드, 선교부의 지도자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느낀 즐거움과 기쁨 만한 것을 그곳에서도 바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81 또 다른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는 형제애와 동료애의 참된 정신이 있습니다.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것은 형체가 있지는 않지만, 진실로 실재합니다. 저의 동료들이 그렇듯, 우리는 세계 곳곳에 있는 시온의 스테이크와 와드, 선교부를 두루 다니면서 그러한 것을 느낍니다. …… 언제나 그런 동료애와 형제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회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혜택 중 하나입니다.”82

벤슨 장로는 또한 종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주에 대한 간증을 나누는 기회를 사랑했다. 예를 들어, 1959년에 그는 벤슨 자매와 미국 농무부 직원 네 사람을 대동하고서 소련을 비롯한 7개국을 순방했다. 농무부 장관 자격으로 간 것이었지만, 사도로서 그가 가진 간증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모스크바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저는 …… 안내자에게 러시아에서 교회를 둘러볼 기회가 없어 아쉽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운전 기사에게 몇 마디 했고, 운전 기사는 도로 한복판에서 차를 돌려 붉은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어둡고 좁은 거리에 있는, 조약돌이 깔려 있고 회반죽으로 칠한 낡은 건물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중앙 침례 교회였습니다.

비가 내리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쌀쌀한 10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들어가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복도와 입구, 심지어는 거리에도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마다 이 정도의 군중이 교회에 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중년 내지 그 이상이었지만 젊은이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다섯 명 중 네 명 정도는 여성이었는데, 대부분이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연단 옆자리로 안내되었습니다. ……

목사님이 몇 마디 말을 한 다음에 오르간이 한두 음절을 연주하더니 온 회중이 하나가 되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천 명 또는 천오백 명 정도가 소리 높여 찬송을 했고, 그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경험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들은 언어의 차이, 정부와 역사의 차이를 뛰어넘는 환영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감동에 휩싸인 가운데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고 있을 무렵, 목사님이 그 옆에 있던 통역자를 통해 저에게 잠시 한 말씀 해 달라며 부탁해 왔습니다.

그러겠다고 하는데,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사를 나눌 기회를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미국과 전 세계 곳곳의 교회 성도들의 안부를 전합니다.’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잘 알려진 가장 성스러운 진리를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멀리 계시지 않고,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저는 그분이 살아 계심을 압니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며,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지시하실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면,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회중을 위해 제 말 한 문장 한 문장이 통역되는 동안, 저는 손수건을 들고 흔드는 부인들을 보았는데, 일행 중 한 명은 그 부인들이 ‘외아들을 아주 떠나보내며 작별 인사를 하는 어머니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부인들은 야, 야, 야!(ja, ja, ja!-‘예, 예, 예’라는 뜻) 하고 소리를 내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습니다. 그때 저는 자리가 꽉 차서 많은 사람이 벽에 기대 서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했습니다. 저는 제 앞쪽에서 머리에 평범한 낡은 스카프를 쓰고, 어깨에 숄을 걸치고 있는, 깊은 주름이 있지만 신앙심이 엿보이는 기품있는 얼굴을 한 연로한 여성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저는 그녀를 향해 직접 말했습니다.

‘이 생은 영원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나님의 영의 자녀로서 살았습니다. 이 생을 떠난 후에도 우리는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속박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할 것입니다.

저는 기도를 굳게 믿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어려운 때에 힘이 되고 강력한 닻 역할을 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를 수 있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말에 그녀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주름이 지고 늙고 연약했지만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날 전한 제 말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제 이야기에 몰두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가슴 벅찼던 느낌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신앙을 정말 흔들림 없이 증명해 보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말로 끝냈습니다. ‘오랜 세월 봉사해 온 교회의 종으로서 저는 진리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임을 증거합니다. 시간은 진리의 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여생에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지켜 주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더는 전할 말이 없었기에, 저는 예기치 않았던 그 자리에서의 말씀을 이렇게 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온 회중이 제가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찬송가인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우리가 복도 쪽으로 걸어갈 때, 사람들은 손수건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는데, 1,500명 모두가 떠나는 우리에게 손수건을 흔드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의 여러 곳에서 많은 교회에 들러 말씀하는 특권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남긴 영향은 실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저는 그날 저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느낌과, 자유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인간의 갈망을 그처럼 예리하게 느껴 본 순간은 결코 없었습니다. ……

자유의 정신, 형제애, 종교 정신을 파괴하려는 온갖 시도 속에서도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살아 숨쉬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이 이야기를 저는 사람들에게 자주 들려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83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

1973년 12월 26일, 벤슨 장로는 교회 회장인 해롤드 비 리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예기치 않은 소식을 듣게 된다. 리 회장의 서거에 따라 제일회장단 보좌들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나흘 뒤, 스펜서 더블유 킴볼이 교회 회장으로, 에즈라 태프트 벤슨이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 성별되었다. 이 책임을 맡게 되면서 벤슨 회장은 관리 임무들이 더 추가되었다. 그는 정원회 주례 모임과 스테이크 대회를 감리하고, 선교부를 방문하며, 스테이크 축복사를 부르는 임무 지명을 포함한 사도들의 일을 협의 조정했다. 또한 다른 총관리 역원들을 감독하는 몇몇 책임들도 맡게 되었다. 그와 다른 사도들이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사무 업무는 행정 담당 직원이 맡게 되었다.84

십이사도 정원회 모임에서 벤슨 회장은 회장으로 봉사하는 것과 관련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커다란 책임에 대해 아주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 이 사업에서 실패란 있을 수 없기에 두렵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지해 주실 것을 알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증인인 여러분과 같은 형제들을 이끄는 지도자 직분에 부름받는 것은 제게 큰 걱정을 안겨 줍니다.”85

벤슨 회장은 이런 겸손한 마음에 특유의 담대함과 꾸준하게 열심히 일하는 기질을 잘 조합시켰다. 그는 종종 책임을 위임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자신에게서도 그러하듯, 그가 이끄는 사람들에게서도 최선의 것을 기대했다. 또한 그는 바쁜 와중에서도 친절함을 보였다. 다른 사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정원회 모임에서 열린 토론을 장려했다. 벤슨 회장이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던 시절에 정원회에서 후임 사도로서 봉사했던 보이드 케이 패커, 러셀 엠 넬슨,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 등은 그들이 생각이 다를 때에도 의견을 개진할 것을 늘 장려받았다고 말했다.86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들은 벤슨 회장의 지도력이 불변하는 원리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그는 “형제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사업에서 중요한 것은 영입니다.”87라고 말했다. 그는 정원회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에 적용하는 기준이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왕국을 위해 무엇이 최선입니까?” 그와 함께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했던 마크 이 피터슨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생애 내내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님이 겪었던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 되었습니다.”88

교회 회장

1985년 11월 5일, 오랜 투병 끝에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교회의 지도력은 이제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이 회장이자 선임 회원으로 있는 십이사도 정원회로 넘어왔다. 닷새 뒤,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열린 엄숙하고 경건한 모임에서 벤슨 회장은 교회 회장으로 성별되었다. 그는 영감에 따라 고든 비 힝클리 회장에게 제일회장단 제1보좌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에게 제2보좌로 봉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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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President Ezra Taft Benson, President Gordon B. Hinckley, and President Thomas S. Monson

제일회장단 보좌들과 함께 한 벤슨 회장: 고든 비 힝클리 회장(왼쪽)과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오른쪽)

킴볼 회장의 건강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던 벤슨 회장은 친구의 건강이 쾌차하기만을 바랐었다. 벤슨 회장은 교회 회장으로 성별된 직후에 마련된 기자 회견에서 “이날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 플로라와 저는 킴볼 회장님이 이 세상에서 더 봉사할 수 있도록 다른 기적이 일어나기를 계속해서 기도해 왔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인도에 따라 지상에서 이 사업을 발전시키고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89

교회 회장으로서 처음 맞은 연차 대회에서 벤슨 회장은 주님의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주안점을 둘 부분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계시를 통해 몰몬경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셨습니다.”90

십이사도 정원회에 있을 때 벤슨 회장은 몰몬경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가르쳤다.91 교회 회장으로서 그는 이 주제에 더욱더 주목했다. 그는 후기 성도들이 몰몬경을 충분히 공부하지 않거나 그 가르침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온 교회가 정죄”받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몰몬경은 우리 개인 학습, 가정에서의 가르침, 복음 전파, 선교 사업에서 중심이 되지 못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92 그는 사람들이 “다른 어떤 책보다 이 책의 교훈대로 생활한다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선언을 자주 인용했으며93 그 약속을 이렇게 풀어 설명했다. “그 책 속에는 그 책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생활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는 힘이 있습니다.”94 그는 후기 성도들에게 “몰몬경으로 온 세상을 덮고 [그들]의 삶을 가득 채우[자고]”95 촉구했다.

세계 곳곳에서 후기 성도들은 선지자의 이런 권고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후기 성도들은 개인적으로도, 전체적으로도 더 큰 힘을 얻게 되었다.96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포함하여, 어떤 세대가 에즈라 태프트 벤슨 회장님이 이끌었던 시기를 돌아볼 때, 어찌 곧바로 몰몬경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선지자 조셉 스미스 이래로, 벤슨 회장님만큼 몰몬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교회의 전 회원이 매일 몰몬경을 공부하게 하고, 몰몬경으로 ‘세상이 차고 넘치게’ 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 회장은 없을 것입니다.”97

몰몬경에 대한 벤슨 회장의 간증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많은 사람이 “구주의 신성을” 거부했을 때 그는 “거룩하게 영감받은 이 책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종석입니다.”98라고 확언했다. 1943년에 사도 직분에 성임된 이후로 벤슨 회장은 구주께서 살아 계시다는 진실의 증인으로서 부지런히 봉사했다. 교회 회장으로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에 대해 더욱더 활력있게, 또한 절박하게 간증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통솔을 받[고] …… 그리스도 안에서 불타게 [되고]”99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을”100 할 것을 권고했다. 구주에 대해 말씀할 때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101

벤슨 회장은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긴박하고 힘 있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교만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또한 가족의 영원한 중요성에 대해서도 간증했다. 그는 신앙과 회개의 원리를 가르쳤고 헌신적인 선교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미국과 관련해서는 성역 초기만큼 자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1987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미국 헌법 서명 200주년을 맞아 그 주제에 대해 말씀을 전했다. 또한 세계 도처의 자유와 참된 애국심에 대한 사랑도 지속되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사람들이 더 큰 자유를 누리게 되고 그들 정부가 종교 예배에 더 많은 자유를 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102

벤슨 회장은 교회의 특정 그룹을 대상으로 연달아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1986년 4월부터 시작해서 그는 청남, 청녀, 어머니, 가정 복음 교사, 아버지, 독신 성인 형제, 독신 성인 자매, 어린이, 연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할 설교를 차례로 준비했다.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염려했습니다. 교회 자매와 형제들에게도 말씀을 전했습니다. 연로한 사람들에게도 말씀했습니다. 독신들과 청소년들에게도 말씀했고, 교회 어린이들을 위해 말씀하는 것도 좋아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교회 회원의 개인적인 상황을 뛰어넘어 그들 모두에게 훌륭하고 특화된 권고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설교들을 앞으로도 계속 상고해 본다면, 계속해서 힘과 인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103

벤슨 회장은 그런 말씀으로 영향을 받은 한 가족에게서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 젊은 아버지가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으로 연차 대회를 시청하고 있었다. 세 살배기 아들은 대회 말씀이 나오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가까운 방에서 놀고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전하는 벤슨 회장의 말씀을 들은 후, 이 부모는 아들이 놀고 있는 방으로 갔다. 그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린 사내아이는 “흥분해서 ‘라디오에서 그랬는데, 우리가 실수할 때도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신대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 간단한 말씀이 저희 어린 아들에게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벤슨 회장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똑같은 힘찬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 아들은 하늘에 친절하고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계신다는 지식에서 위로를 얻습니다.”104

1988년 10월 연차 대회 직후에 벤슨 회장은 뇌졸증을 겪게 되면서 그 영향으로 공개 연설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은 연차 대회와 다른 공개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1989년 연차 대회에서는 그가 준비한 설교를 보좌들이 읽었다. 1990년부터는 보좌들이 성도들을 향한 벤슨 회장의 사랑을 전하면서 그의 과거 설교를 인용했다. 1991년 4월 대회는 그가 참석한 마지막 대회였다. 그 후로는 텔레비전을 통해 대회 진행을 시청하는 것 이상으로는 신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105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분의 몸은 노환으로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걸었던 것처럼 걸을 수 없었습니다. 전처럼 얘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점진적으로 쇠약해졌지만 살아 있는 한 그분은 여전히 주님의 택함받은 선지자였습니다.”106 벤슨 회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힝클리 회장과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교회를 이끌었지만, 교회는 벤슨 회장이 알고 승인하지 않는 한 새로운 계획들을 결코 추진하지 않았다.107

벤슨 회장이 쇠약해지면서 플로라도 건강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1992년 8월 14일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94년 5월 30일에 벤슨 회장도 아내의 뒤를 따랐으며, 사랑하는 휘트니에서 아내 곁에 묻혔다. 벤슨 회장의 장례식에서 몬슨 회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전에 회장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몬슨 형제님, 기억하십시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저는 아이다호 휘트니에 묻히고 싶습니다.’ 벤슨 회장님, 우리는 오늘 당신의 소원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몸은 이제 고향 휘트니로 가지만, 그분의 영원한 영은 본향에 계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가족과 친구들, 사랑하는 플로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 시골 청년이 본향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추억을 축복해 주십니다.”108

  1. Robert D. Hales, “A Testimony of Prophets,” June 5, 1994, speeches.byu.edu; 또한 Twila Van Leer, “Church Leader Buried beside Wife, Cache Pays Tribute as Cortege Passes,”Deseret News, June 5, 1994 참조.

  2. Gordon B. Hinckley, “Farewell to a Prophet,”Ensign, July 1994, 37-38.

  3. 에즈라 태프트 벤슨,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성도의 벗, 1987년 1월호, 59~60쪽.

  4. Margaret Benson Keller, Sheri L. Dew,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987), 34.

  5. 에즈라 태프트 벤슨,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 62~63쪽.

  6. Ezra Taft Benson, “Scouting Builds Men,”New Era, Feb. 1975, 15-16.

  7.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44 참조.

  8. “After 60 Years ‘Still in Love,’” Church News, Sept. 14, 1986, 4, 10 참조.

  9.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58.

  10.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55 참조; 또한 본 교재 제7장 참조.

  11.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59 참조.

  12.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59 참조.

  13.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62.

  14. Sheri L. Dew,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59.

  15.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53.

  16.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63.

  17. Flora Amussen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75.

  18. Flora Amussen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79.

  19.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79.

  20. Eugene J. Neff,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84.

  21. Eugene J. Neff,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87.

  22.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87 참조.

  23.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87 참조.

  24. Flora Amussen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96.

  25. Flora Amussen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88.

  26. Flora Amussen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89.

  27.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92.

  28. Francis M. Gibbons, Ezra Taft Benson: Statesman, Patriot, Prophet of God (1996), 85-89.

  29.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99–100, 101, 115 참조.

  30.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15.

  31.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00 참조.

  32. Barbara Benson Walker,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30.

  33. Flora Amussen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21.

  34. Flora Amussen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21.

  35. Sheri L. Dew,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74; Ezra Taft Benson, personal journal, July 26, 1943에 있는 인용 포함.

  36. Ezra Taft Benson, personal journal, July 26, 1943;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74-75에서 인용함; 철자법은 표준에 맞춤.

  37.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176.

  38. Ezra Taft Benson, A Labor of Love: The 1946 European Mission of Ezra Taft Benson (1989), 7 참조.

  39.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7, 152-53.

  40. George Albert Smith, A Labor of Love, 7.

  41. Ezra Taft Benson, A Labor of Love, 7-8.

  42. Ezra Taft Benson, A Labor of Love, 120.

  43.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7, 154.

  44.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7, 155.

  45.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7, 153-55.

  46.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7, 155-56 참조.

  47.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7, 156.

  48. Frederick W. Babbel, On Wings of Faith (1972), 28–33, 46–47, 106–8, 111–12, 122, 131–34, 136, 154 참조.

  49.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7, 152.

  50. Thomas S. Monson, “President Ezra Taft Benson—A Giant among Men,”Ensign, July 1994, 36.

  51.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37 참조.

  52.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8, 83 참조.

  53.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8, 86.

  54.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62, 104.

  55.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48, 85 참조.

  56.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62, 104-5 참조.

  57.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Oct. 1954, 121 참조.

  58.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Oct. 1962, 19.

  59. Ezra Taft Benson, Cross Fire: The Eight Years with Eisenhower (1962), 3-4.

  60. David O. McKay, Cross Fire, 5.

  61. Ezra Taft Benson, Cross Fire, 10.

  62. Dwight D. Eisenhower, Cross Fire, 12.

  63. Ezra Taft Benson, Cross Fire, 12.

  64. Ezra Taft Benson, Cross Fire, 13.

  65.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355.

  66. Ezra Taft Benson, Sheri Dew, “President Ezra Taft Benson: Confidence in the Lord,”New Era, Aug. 1989, 36.

  67.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313, 345 참조.

  68.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331 참조.

  69. 본 교재 제2장 참조.

  70. Dwight D. Eisenhower,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292.

  71.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292 참조.

  72.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297-99 참조.

  73. David O. McKay, Cross Fire, 519.

  74.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61, 113.

  75.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358.

  76.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355.

  77. Ezra Taft Benson, “A Witness and a Warning,”Ensign, Nov. 1979, 31.

  78. Ezra Taft Benson, “The Constitution—A Glorious Standard, Ensign, May 1976, 91.

  79.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Apr. 1960, 99.

  80.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Oct. 1968, 17.

  81.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Oct. 1948, 98.

  82. Ezra Taft Benson, Conference Report, Oct. 1950, 143-44.

  83. Ezra Taft Benson, Cross Fire, 485-88.

  84. Francis M. Gibbons, Statesman, Patriot, Prophet of God, 270-71 참조.

  85. Ezra Taft Benson,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430-31.

  86.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429-30 참조.

  87. 에즈라 태프트 벤슨, 토마스 에스 몬슨, “선견지명이 있는 계획—귀중한 약속”, 성도의 벗, 1986년 7월호, 66쪽.

  88. Mark E. Petersen, “President Ezra Taft Benson,”Ensign, Jan. 1986, 2-3.

  89. Ezra Taft Benson, Church News, Nov. 17, 1985, 3.

  90. 에즈라 태프트 벤슨, “거룩한 책임”, 성도의 벗, 1986년 7월호, 86쪽.

  91.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 몰몬경”, 성도의 벗, 1975년 8월호, 40~42쪽; “그리스도의 새 증인”, 성도의 벗, 1985년 1월호, 6~8쪽 참조. 또한 Ezra Taft Benson: A Biography, 491-93 참조.

  92. 에즈라 태프트 벤슨, “그릇의 안을 깨끗이 함”, 성도의 벗, 1986년 7월호, 5쪽.

  93. 조셉 스미스, 몰몬경 소개에서 인용.

  94. 에즈라 태프트 벤슨, “몰몬경—우리 종교의 종석”, 성도의 벗, 1987년 1월호, 6쪽.

  95. 에즈라 태프트 벤슨, “교만을 조심하십시오”, 성도의 벗, 1989년 7월호, 4쪽.

  96. 본 교재 제10장 참조.

  97. Howard W. Hunter, “A Strong and Mighty Man,”Ensign, July 1994, 42.

  98. 에즈라 태프트 벤슨, “몰몬경—우리 종교의 종석”, 5쪽.

  99. 에즈라 태프트 벤슨, “하나님께로 태어남”, 성도의 벗, 1989년 10월호, 6쪽.

  100. 에즈라 태프트 벤슨,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성도의 벗, 1988년 1월호, 92쪽.

  101. 에즈라 태프트 벤슨,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이시며 구속주”, 성도의 벗, 1990년 12월호, 8쪽.

  102. 러셀 엠 넬슨, “유럽 무대에 올려진 드라마”, 성도의 벗, 1992년 5월호, 22쪽 참조.

  103. Howard W. Hunter, “A Strong and Mighty Man,” 42.

  104. 토마스 에스 몬슨,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성도의 벗, 1992년 1월호, 102쪽.

  105. Francis M. Gibbons, Statesman, Patriot, Prophet of God, 315 참조.

  106. Gordon B. Hinckley, “Farewell to a Prophet,” 40.

  107. Francis M. Gibbons, Statesman, Patriot, Prophet of God, 317-18 참조.

  108. Thomas S. Monson, “President Ezra Taft Benson—A Giant among Men,”Ensign, July 1994,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