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1924~2015)

위대한 교사에게 작별을 고함


1970년부터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했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이 2015년 7월 3일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도나 스미스 패커 자매가 있다.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인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이 별세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원들은 단순히 헌신적인 지도자 한 사람을 잃은 것만이 아니었다. 회원들은 가장 복잡한 주제라 할지라도 명확한 가르침을 주었던 위대한 교사를 잃은 것이었다.

패커 회장은 하나님 아버지께 봉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 삶을 바쳤다. 자신의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세미나리에서 계속 가르치고, 그 후에는 총관리 역원으로서 전 세계에서 성역을 베풀었던 것이다. 그는 가르치는 일에서 구주를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다. 1975년에 저술한 Teach Ye Diligently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 것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은 자라야 하느니라.’(제3니파이 27:27) …

저는 그분이 가르치셨던대로 가르치기를 원한다고 주저 없이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겠지만, 그렇더라도 그분은 저의 이상적인 모범이십니다. …

… 우리 중에 누구라도 그분과 같이 되려고 소망하는 것은 온당한 일입니다.”1

패커 회장은 젊었을 때 하나님께 평생 완전하고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2 그는 그 맹세에 따라 살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제자들에게 영적인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유산을 남겼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보이드 케이 패커가 했던 모든 공헌을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그의 업적은 그들에게 영감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알려졌다.


초년 시절

보이드 케네스 패커는 1924년 9월 10일에 아이라 와이트 패커와 에머 젠슨 패커 사이에서 열한 자녀 중 열 번째로 태어났다. 패커 가족은 복음 원리에 순종하고 근면하게 생활한 가족이었다. 아버지 아이라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유타 주 브리검시티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는 숙련된 정비공이었다. 아이라의 양친은 농장 출신이었다. 에머는 성장하면서 자연과 야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런 사랑은 아들 보이드의 삶에 그대로 전해졌다. 야외, 자연, 그리고 동물에 대한 사랑은 그가 제작한 다수의 작품에 표현되었는데, 특히 세밀하고 정교한 새 조각에 잘 나타나 있다.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이 나무로 조각한 작품인 “노르웨이 단풍나무 잎사귀에 앉은 푸른색 수컷 어치”는 유타 주 프로보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 몬트 엘 빈 생명 과학 박물관에서 상시 전시된다. 사진: 제이슨 스웬슨, Deseret News

그의 조상들은 개척자들이었는데, 아버지 쪽은 영국 혈통이고 어머니 쪽은 스칸디나비아 혈통이었다. 패커 회장의 집 정문과 그의 손자 손녀들의 집 문에는 문을 두드리는 데 사용하는 놋쇠로 만든 장치가 달려 있는데, 이는 그가 조각한 멍에를 멘 황소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패커의 가족들에게는 그 장치가 두 가지 중요한 것을 상징한다. 첫째는 개척자 조상들이고, 둘째는 구주의 멍에를 메려는 신앙과 자발성이다.(마태복음 11:29~30 참조)3

패커 장로는 이전에 간략하게 작성한 일대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자라면서 우리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에겐 그저 돈이 없었을 뿐이었다. 우리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는 늘 부자였다.”4

보이드는 다섯 살 소년이었을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그 당시에는 폐렴으로 진단을 받았는데, 크게 눈에 띄는 후유증 없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소아마비는 인생 후반에 재발되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어린 시절의 보이드 케이 패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그는 선교사로 나가지 못했다. 1943년에 미육군 항공대에 입대해서 1944년에 조종사로 졸업했다. 그는 폭격기를 조종하는 훈련을 받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 거의 일 년간 일본에 주둔했다. 조종사로 복무하는 동안 통증으로 고생한 그는 엑스레이를 찍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앓았던 소아마비로 인해 무릎과 엉덩이 뼈가 기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년에 그 소아마비의 영향으로 휠체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는 군에 있는 동안 복음을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되었으며, 몰몬경을 여러 번 읽었다. 그는 몰몬경을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책”5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에서 지내던 어느 날 밤에 고립된 벙커에서 복음이 참되다는 개인적인 증거를 얻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려줬다. 그는 벙커에서 나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믿음과 소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제 분명하고 확실해진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알았다.6

그는 또한 선교사가 되는 길을 찾았다. 보이드 케이 패커는 1940년대 중반에 복음을 일본에 다시 소개하는 데 기여한 후기 성도 군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다츠이 사토를 교회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었는데, 나중에 사토 형제의 번역으로 인하여 수많은 일본인 회원들이 경전과 성전 의식을 그들의 모국어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왼쪽부터: 보이드 케이 패커, 노먼 닉슨, 다츠이 사토, 시 엘리엇 리차즈, 그리고 아들 야스오와 함께한 치요 사토 군인들은 사토 가족이 개종하도록 도왔는데, 이들은 종전 후 일본에서 처음으로 침례받은 사람들 중에 포함되었다. 사진: 시 엘리엇 리차즈.


결혼과 가족

집으로 돌아온 보이드는 유타 주 옥든에 있는 웨버 칼리지(현 웨버 주립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도나 스미스를 만나 1947년 7월 27일에 로건 성전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부모가 되어 열 자녀를 키웠다. 자녀들의 이름은 각각 앨런, 케네스, 데이비드, 로렐, 러셀, 스펜서, 게일, 캐슬린, 로렌스, 엘던이다.

패커 회장은 가정 생활의 성공에 대한 공을 항상 아내에게 돌렸다. 그는 아내를 활력이 넘치는 여성이며 “훌륭하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7이라고 묘사했다.

그녀가 패커 회장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오랜 친구이자 칠십인 제일정원회의 회원이었던 에이 디어도어 터틀 장로(1919~1986)가 잘 설명해 주었다. 그는 패커 회장과 함께 교회 교육 기구에서 교사와 교육감으로 일했다.

패커 회장의 여러 저서 중 한 책의 서문에서 그의 친구 디어도어는 이렇게 적었다. “패커 장로가 다른 누구에게도 얻을 수 없는 영감의 원천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나이다. … 열 자녀를 낳은 사람도, 그리고 패커 장로가 ‘특별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음에 따라 그들을 양육하는 책임을 더 많이 맡게 된 사람도 그녀이다. 그녀는 그의 연인이며, 친구이자 조용한 내조자이다.”8

도나 스미스와 보이드 케이 패커는 1947년 7월 27일에 결혼했다.

패커 회장 부부는 훌륭한 화합의 본보기였다. 아들 앨런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를 보면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를 보면 아버지가 보입니다. 두 분은 언제나 함께하고, 하나로 단합합니다. 두 분은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물론 가정에서 특히 그랬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그에게 항상 최우선 순위였기 때문에 그는 자녀를 위한 시간을 마련했다. 그가 나무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 자녀들이 같이 하길 원하면, 그는 그렇게 하도록 해 주었다. 아들 앨런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시다가 멈추고 우리에게 붓과 물감을 주시며 우리도 그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흥미를 잃고 나면, … 그림을 수정하셨죠. 물감이 덧칠해진 부분은 우리가 저질러 놓은 것입니다.”9

1965년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이 뉴잉글랜드 선교부 회장으로 부름받고 유타를 떠나기 전에 가족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Deseret Morning News 자료실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과 부인 도나 에스 패커 자매가 일곱 아들 및 세 딸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앞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로렌스, 데이비드, 도나, 패커 회장, 앨런, 스펜서. 뒷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엘던, 로렐, 캐슬린, 게일, 케네스, 러셀. 사진: 클린턴 멜란더, 2012 판권 소유.

보이드는 젊은 아버지로서 어린 아이들을 한창 키우던 시절에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여러 교회 부름을 받아 봉사했으며, 또한 브리검시티 시의회 의원이 되어 지역 사회에서도 봉사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교회 교육 기구에서 일했다. 그는 웨버 칼리지에서 준학사 학위를 받고(1948년) 유타 주립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1949년) 그 후 유타 주립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1953년)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1962년)

그는 1955년에 교회 세미나리 및 종교 교육원 교육감보로 지명받았다. 그는 자신의 37세 생일이 막 지난 1961년 10월에 십이사도 보조로 부름받을 때까지 그 직책에서 봉사했다. 십이사도 보조로 봉사하는 동안 뉴잉글랜드 선교부 회장으로도 봉사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성실함과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교회를 위해 많은 사회 및 기업 지도자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부름에 따른 막중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패커 회장은 계속 가족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아들 앨런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가족이 영원한 조직이라는 것을 늘 아셨기 때문에 가족에게 우선을 두셨습니다. 우리가 사무실로 전화를 걸면, 언제라도 또는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 있던지 간에 항상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비서에게 지시를 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단지 안부 인사를 할 경우라도 언제나 통화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선임 사도들과 모임을 하는 중에 전화를 걸어 방해를 했다는 것을 알고서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항상 통화를 할 수 있게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지시였습니다.”10


십이사도 정원회로 부름받음

1970년에 그는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의 별세로 인해 십이사도 정원회로 부름받았다. 그 정원회에서의 봉사는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이 교회의 새로운 회장으로 지지받으면서 시작되었다. 패커 장로가 나중에 그 정원회를 감리하도록 부름받은 것도 새로운 교회 회장이 지지받은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1994년 6월 하워드 더블유 헌터 회장이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을 제일회장단의 제2보좌로 유임시키자, 그다음 선임 사도였던 패커 장로가 회장 대리가 되었다. 2008년 2월 몬슨 회장이 교회 회장이 되자 그는 그 정원회의 회장으로 성별되었다.

1970년에 패커 장로가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름받은 것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그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설계했는지에 관해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수년 전에 저는 제 인생에서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몇 가지 기본 목표를 정했습니다. 첫째, 저는 좋은 아버지가 되길 원했습니다. … 생계 수단, 취미, 그리고 사교적인 기회마저도 그런 목표에 부합되는지를 따져 보아야 했습니다. 저는 곧 좋은 아버지가 되는 완벽한 계획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가정은 복음과 제 인생의 중심입니다. …

제가 세운 두 번째 목표는 … 무언가를 위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주로 저는 지상의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 모두에게 훌륭한 아들이 되길 원했습니다. 제 자신이 훌륭한 자녀가 되지 않으면서 훌륭한 자녀를 갖게 되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우리 자신이 합당한 사람이 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기여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꺼이 희생하지 않은 것을 얻는다면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패커 장로는 우리가 이와 같은 목표를 추구할 때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했다. “교회에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위대한 힘이 있는데, 주님의 방법으로 하면 훨씬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힘을 얻지 못한다고 여겨집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상의 아버지가 곁에 계신 것처럼 그렇게 자주 말씀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11

보이드 케이 패커 장로가 1977년 4월 연차 대회에서 말씀하고 있다.

패커 회장은 수년 동안 교회 본부 역원으로 봉사하면서 주님의 인도에 따라 가르침을 주었다. 그의 성역은 여러 세대와 여러 대륙에까지 미쳤다.

한 여성은 십대였던 1960년대에 자신이 살던 아이다호 주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의 개척자 천막에서 패커 장로가 했던 말씀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회상했다. 패커 장로는 회중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집에 돌아가 부모님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라고 요청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그녀의 집이나 또래 친구들의 집에선 드문 일이었다. 패커 장로의 말씀을 들은 그녀는 조그만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대가족을 키우기 위해 부모님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자제했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개척자 조상들과 영적인 유산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새로이 갖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에 패커 회장 부부는 독일에서 교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뮌헨에서 베를린까지 밤새 기차 여행을 해야 했다. 두 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그들을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기차가 역을 출발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장로가 기차 창을 통해 패커 장로에게 독일 돈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패커 장로가 없다고 하자 그 선교사는 달리는 기차를 따라 오면서 20마르크 지폐를 건네 주었다.

몇 시간 후 그 20마르크 지폐는 그들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돈 덕분에 동독 군인의 마음이 바뀌게 되었는데, 그 동독 군인은 패커 자매가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구형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기차에서 내리게 해서 체포할 수도 있었다.

방문한 사도에게 20마르크 지폐를 건네 준 젊은 선교사는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였으며, 그는 약 30년 후에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패커 회장과 함께 봉사하게 된다. 패커 회장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봉사할 때 그분의 손길이 임할 것이므로 우리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요점이라고 말했다.12 보이드 케이 패커의 성역을 따랐던 사람들은 그에게 주님의 손길이 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후기 성도들에 대해 지녔던 사랑은 그들 가운데서 성역을 베풀 때 느낄 수가 있었다. 과테말라 모모스테난고 스테이크 지역 내에, 마야 산지의 좁고 언덕진 장소에는 패커 장로가 1980년대 중반에 헌납했던 작은 집회소가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회원들은 패커 장로가 전한 간증의 힘이 어떻게 자신들의 영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회상하며, 주님의 사도가 자신들과 함께 걸었을 때 느낀 사랑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사 및 증인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보이드 케이 패커와 함께 봉사했던 사도들은 복음 원리를 가르치는 그의 능력과 그 원리를 따르려는 그의 굳건함을 알게 되었다. 제일회장단에서 보좌로 봉사했던 제임스 이 파우스트 회장(1920~2007)은 이렇게 언급했다. “패커 장로는 진실로 교사입니다. 십이사도는 모두 교사이지만 그는 십이사도 내에서 교사입니다.” 패커 장로가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보여준 경전에 대한 사랑과 사용은 교회 전체의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고 파우스트 회장은 말했다.13

1987년 6월 6일에 보이드 케이 패커 장로(가운데)가 제임스 이 파우스트 장로(왼쪽) 및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오른쪽)와 만나고 있다. 사진: Deseret Morning News 자료실

십이사도 정원회가 어떤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패커 장로가 몰몬경에서 관련 가르침을 찾아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적이 자주 있었다고 러셀 엠 넬슨 장로는 말했다. “몰몬경이 없다면 패커 장로는 현재와 같은 선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선견자입니다.” 경전을 인용하는 그의 가르침은 “깊이 있는 이해력”이 특징이라고 넬슨 장로는 말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의 깊이를 알지 못했습니다.”14

한 번은 패커 장로가, 강한 지성에 폭넓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열두 사람이 교회의 일을 지시하는 데 있어서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십이사도들은 지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그들 개개인이 지닌 위대한 힘과 능력을 다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늘에서 주신 거룩한 영감에 만장일치로 자신의 뜻을 굽힙니다. 우리는 모두 개인적이고, 우리는 모두 단호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15

말년에 그는 사도로서 증언하는 것이 좀 더 긴급하고 좀 더 분명한 일이라고 여겼다. 패커 회장이 전하는 간증의 음성은 교회에서 신뢰할 수 있고 일관성을 지닌, 결코 흔들림 없는 증언이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면 보이드 케이 패커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1999년의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

2008년 4월 연차 대회에서 몬슨 회장이 지지받은 후, 패커 회장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교회 부름에 대한 경외와 그 신성한 기원에 대한 확실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염려나, 머뭇거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성한 모임에서, 토마스 스펜서 몬슨은 십이사도 정원회에 의해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되었습니다.” 그 과정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패커 회장은 설명했다. “주님 자신이 이러한 관리 형식을 시작하셨습니다.” 16

2010년에 패커 회장은 자신의 옛 초등학교 부지에 세워질 유타 브리검시티 성전 기공식을 위해 고향 브리검시티로 갔다. 2년 후 그는 그 성전 헌납식을 감리했다.

헌납식 과정에서 그는 그의 특징인 겸손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브리검시티에 성전을 세워 달라고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그 제안을 했습니다. 저는 단지 반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헌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감리자로 지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헌납하도록 지명받아서 기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17

2012년 9월 23일에 보이드 케이 패커 회장이 아내 도나와 칠십인인 장남 앨런 에프 패커 장로와 함께 유타 브리검시티 성전의 정초식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 게리 아반트, Church News


항상 발전하려고 노력함

패커 회장은 평생 동안 항상 발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살아 있는 사도들이, 왜 자신들이 이 거룩한 직분에 부름을 받아야 하는지 의아해 할 만큼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저는 자질이 많이 부족합니다. 저의 봉사에는 부족한 점이 아주 많습니다. 왜 나같은 사람이라는 질문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자질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 이후에 성임된 모든 사람들처럼 저는 간증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압니다. 그분께서는 조셉 스미스에게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선언합니다. 저는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 그분께서는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증인입니다.”18

1976년의 보이드 케이 패커 장로.

수년 전 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에서 개인적인 간증을 얻은 그는 무언가를 돌려주길 원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신의 결심을 구체화하길 원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저와 주님 사이에서 이런 의도를 확고히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선택의지를 어느 방향으로 행사했는지 그분이 아신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저는 그분 앞에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중립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제 동의가 필요하시면 언제나 동의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무엇을 하시든 상관없으며, 제게서 어떤 것도 가져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 제 존재 전부를 주님께 바치기 때문입니다.’”19

  1. Boyd K. Packer, Teach Ye Diligently (1975), 18, 19.
  2. Lucile C. Tate, Boyd K. Packer: A Watchman on the Tower (1995), 62 참조.
  3. Don L. Searle, “Elder Boyd K. Packer: Disciple of the Master Teacher,” Ensign, June 1986, 8 참조.
  4. Boyd K. Packer, in Searle, “Elder Boyd K. Packer,” 9.
  5. Boyd K. Packer, in Searle, “Elder Boyd K. Packer,” 10.
  6. Tate, Boyd K. Packer, 60 참조.
  7. Boyd K. Packer, in Searle, “Elder Boyd K. Packer,” 11.
  8. A. Theodore Tuttle, foreword to Teach Ye Diligently, by Boyd K. Packer, viii–ix.
  9. Interview with Allan Packer, May 1, 2015.
  10. Interview with Allan Packer, May 1, 2015.
  11. Boyd K. Packer, in Jay M. Todd, “Boyd K. Packer of the Council of the Twelve,” Improvement Era, May 1970, 4, 5.
  12. 보이드 케이 패커, “20마르크 지폐”, 리아호나, 2009년 6월호, 23쪽; New Era, June 2009, 2-4 참조.
  13. James E. Faust, in Searle, “Elder Boyd K. Packer,” 13.
  14. Russell M. Nelson, in Searle, “Elder Boyd K. Packer,” 13.
  15. Boyd K. Packer, in Searle, “Elder Boyd K. Packer,” 13.
  16. 보이드 케이 패커, “십이사도”,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83~87쪽.
  17. Boyd K. Packer, in Gerry Avant, “Rooted in Heritage of Brigham City’s Pioneers,” Church News, Sept. 2, 2012, 3.
  18. 보이드 케이 패커, “십이사도”, 86~87쪽.
  19. Boyd K. Packer, In Tate, Boyd K. Packer,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