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린 에이치 옥스

십이사도 정원회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

옥스 장로는 어려운 문제들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댈린 옥스와 가족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옥스 장로 (맨 위 왼쪽)와 어머니와 두 형제. 옥스 장로는 “비범한 어머니”를 모신 축복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의 좌우명은 “먼저 일하고 나중에 논다.” 이다. 하지만 옥스 장로의 가족은 “먼저 일하고 절대 놀지 않는다”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옥스 장로는 이에 동의한다. 그는 이에 대해 단순히 재미를 위해 어떤 일을 하기 보다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즐긴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계속해서 일함

옥스 장로는 1921년 8월 12일 유타 주 프로보에서 태어났다. 옥스 장로가 여덟 살이 될 무렵 아버지 로이드 이 옥스 박사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젊은 미망인이 된 스텔라 옥스는 세 명의 자녀 즉 장남인 댈린, 지금은 해임된 총관리 역원이며 은퇴한 안과 의사인 메릴, 프로보에 거주하는 라이만 무디 여사로 불리는 에블린을 혼자 키워야 했다. 댈린은  혼자 되신 어머니를 돕기위해 일을 하며 성장했다.

“저는 비범한 어머니를 모실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분명히 후일에 사셨던 많은 고귀한 여성 중 한 분이셨습니다.”라고 옥스 장로는 회상한다. 1980년 사망 전까지 스텔라 옥스는 교회든 공공 봉사든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분으로 프로보에서 유명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많은 책임과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제게 일을 하도록 독려하셨죠.”라고 옥스 장로는 설명한다. 그는 보수를 받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인 “11~12살 무렵”부터 계속해서 일을 해 왔다.

배움을 갈망함

그의 첫 번째 직업은 라디오 수리점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는 청소하며 바닥에 떨어진 진공관이 아직 쓸만한 것인지를 시험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서 라디오에 대해 점차 흥미를 갖게 되었다.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해 연구에 몰두했던 옥스 장로는 16세가 되기 전 민영 라디오 방송국 송신기를 작동할 수 있는 1급 무선 통신 자격증을 취득해 라디오 쪽 직업을 갖게 되었다. 방송국장들은 “1인 2역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 즉 아나운서로서도 활동할 수 있는 엔지니어를 원했지만 “제 목소리가 변성기를 거치지 않았었지요”라고 옥스 장로는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변성기는 자연스럽게 지나갔고, 그는 정규 아나운서 겸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옥스 장로는 대학교 신입생 시절 고등학교 농구 경기 중계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준 딕슨을 만났다. 그들은 1952년 6월 24일 결혼해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다.

 

 

결혼식 당일 댈린과 준 옥스 부부

결혼식 날 웨딩 케이크를 함께 먹고 있는 옥스 장로와 그의 부인 준 딕슨. 준 옥스 자매는 1998년 사망했다.

옥스 가족

가족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 옥스 장로와 그의 가족.

교육과 경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유타 주 프로보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회계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시카고 대학교 법대에 진학했다.

댈린 옥스는 그 근면함과 학식으로 졸업 후 미국 대법원 대법원장 서기로 재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일 년 뒤 서기직을 마치고는 시카고로 다시 돌아가 변호사 개업을 했다.

1961년 시카고 대학교 법대 교수 자리를 제의받았을 때 그는 그 직에 따르는 어려움에 도전해 보고자 그 직을 수락했다.

1963년에는 시카고 남 스테이크 회장단 제2보좌로 부름받았다. 라이슬 알 카훈 회장과 존 소넨버그 제1보좌와 더불어 당시 함께 봉사하던 회장단 세 명 모두 훗날 지역 대표로 봉사했다.

그 당시 옥스 회장은 많은 업무들에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는데 그 중 하나는 시카고 대학교 징계 위원회 의장직이었다. 이 때 그는 1969년 2월 시카고 대학교 본관에서 열린 17일 간의 연좌 농성에 연루된 학생들에 대한 고발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징계 조치를 다루는 그의 능력과 또 그가 보인 공정함은 많은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은 물론 전 지역 사회의 존경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시카고 대학교 법대의 교수로 재직한 10년 동안 1964년 여름 일리노이 주 쿡 카운티 보조 주검사로 활동한 것을 포함, 시카고 대학교 법대 부학장 및 학과장 대리, 1968년 여름 미시간 대학교 법대 초빙 교수를 비롯해 여러 활동을 통해 1970년 무렵 까지 옥스 장로는 법조계에서 명성을 쌓았다. 1970년 일리노이 주 헌법 제정 회의에서 권리장전 위원회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1970년과 1971년에는 전미 변호사 재단의 상임 이사로 활동했다.

소넨버그 형제가 1970년 시카고 남 스테이크 회장으로 부름 받고 그와 함께 할 제1보좌로 댈린 옥스를 선택했다.  1년 뒤 댈린 옥스는 브리검 영 대학교 총장에 부임하도록 요청 받았다. 거기서 그는 9년을 봉사했고 그 후 유타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옥스 장로는 그 직을 다른 어떤 관직보다 선호했다. “저는 항소심 판사가 아닌 다른 공직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옥스 장로는 20년 동안 대법원 판사로 재직한 뒤 은퇴해 선교 사업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들은 3년 반 후 1984년 4월에 그가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름 받으면서 바뀌었다. 그는 유타 대법원에서 사퇴하고 사도로서의 의무에 헌신했다.

“그것은 남은 생의 모든 시간을 그분을 위한 봉사에 쏟고, 그분의 계획과 권세, 속죄 및 부활에 대해 간증하며, 부름 받은 대로 교회 지도자로서 참여하는, 눈에 띄는 부름입니다.”라고 옥스 장로는 설명한다.

댈린 옥스와 크리스틴 옥스 부부

옥스 장로와 그의 부인 크리스틴 맥메인 옥스는 2000년에 결혼했다.

위안을 가져다 주는 신앙과 신뢰

준 옥스 자매는 1998년 7월에 암으로 사망했다. 구주를 믿는 신앙과 그분에 대한 신뢰는 옥스 장로가 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저는 제가 아내의 회복을 위해 수년 동안 드린 기도에 왜 ‘안 된다’는 응답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증거를 제게 주셨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2000년 8월 25일 옥스 장로는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크리스틴 매러디스 맥메인과 결혼하였고 2002년에서 2004년까지 필리핀에서 지역 회장으로 봉사했다.

옥스 장로는 종교적 자유와 전통 가족을 수호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독신 대학생들에게 목적없이 어울려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데이트를 시작하라고 말씀하며, 종교적 자유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다루며, 외설물의 해악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는 등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가장 커다란 소망은 그저 주님께서 그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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