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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넓은 건물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데니스 시 건트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 방식이 더 낫다고 말할 때, 용기를 내어 그에 맞서며 복음 진리에 따라 살길 바란다.

애비는 졸업 무도회에 갈 생각으로 들떴으나 새로 산 드레스가 친구들이 입을 옷과 조금 더 비슷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애비는 친구들이 민소매 드레스를 입어 더 매력적이고 세련되어 보일 것에 반해, 자신의 옷은 수수해서 혼자서만 두드러져 보이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 저녁에 네이트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데 한 친구가 맥주를 가져와 돌렸다. 네이트가 처음에 “난 못 마셔.” 하며 거절하자 친구들이 비웃으며 놀려댔다. 네이트는 친구들이 자신을 따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싫어서 비웃음에서 벗어나려고 맥주를 몇 모금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들이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가? 애비와 네이트처럼 우리도 인생에서 여러 선택이 가로 놓인 갈림길에 도달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처럼 어렵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에, 우리는 때로 자신이 믿는 것을 옹호하기를 두려워한다. 혼자만 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애비와 네이트는 리하이의 생명 나무 시현에 묘사된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그 시현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협착하고 좁은 길에서 벗어나게 된 두 가지 주요 원인은 그들이 유혹으로 눈이 멀었거나(니파이전서 8:23;12:17 참조) 크고 넓은 건물에 있는 사람들의 조롱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니파이전서 8:26~28 참조) 리하이의 시현에 나오는 이 두 부분을 살펴보며 이것 이외에 무엇을 더 이해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옳은 것을 옹호할 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힘을 찾아보자.

이 길을 따라 걸으라.

세상적인 유혹의 문제점은 그 유혹이 너무 강하다는 데 있다. 그렇지 않은가?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누가 죄를 재미없다고 했습니까? …… 죄는 매혹적이며 멋집니다. …… 죄는 쉽고, 그 안에는 재미있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다른 길에 있는 많은 것이 종종 멋져 보일 때가 있다. 어떤 길은 신 나는 쪽으로 급속히 틀어지는 반면에, 어떤 길은 너무도 교묘히 휘어져 나가 한동안은 복음의 길과 평행으로 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붉은 양탄자와 박수갈채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길은 금과 보석으로 포장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의 자녀들]은 타락에서 구속되었으므로 선악을 분별하며 영원히 자유롭게 되었나니, …… 스스로 행하며 행함을 받지 아니하게 되었느니라”(니파이후서 2:26)

크고 넓은 건물 그 자체의 매력 또한 매우 흡사하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강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처럼 행동하고, 차려 입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들은 종종 복음의 길에 머물려는 우리보다 훨씬 더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친구 애비와 마찬가지로 크고 넓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을수록 우리는 더욱 시기하거나 좌절하고 심지어 화가 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명 나무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이토록 애쓰는데, 그들은 좋은 것을 그렇게 많이 누리는 게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다.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아주 좋은 방법은 복음의 길을 계속 나아가는 것이 너무 어렵거나 지겹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발상으로 믿게 만드는 것임을 사탄은 안다. 사탄은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길이 복음의 길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그 열매의 맛은 어땠어?”

크고 넓은 건물에서 즐겨 하는 일은 충실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일부 유명인사와 ……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그리고 때때로 우리 교회에 대해 조롱하는 경향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간증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그런 비판에 영향을 받아 우리가 믿는 믿음을 의심하거나 결심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어느 곳을 가든지, 실생활에서나 온라인 상에서나 우리 주변에 있는 크고 넓은 건물에서는 누군가 창문을 열고 손가락질하며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비웃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조롱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런 경험은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 누구도 조롱받거나 마음속 깊이 간직한 믿음이 경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네이트가 그랬듯이 때로 우리도 “난 몰몬이라서 못해.”라고 말하여 사람들의 더 큰 비웃음을 듣기도 한다.

“난 못해 …….”

조롱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못한다는 말에 주시한다는 것을 눈치챘는가? 예를 들면, “왜 저걸 못 마시는데?” “일요일에 쇼핑을 왜 못 하는데?” 혹은 “혼전 성관계가 왜 안 되는데?”처럼 말이다.

못한다는 말에 쏟아붓는 그들의 조롱에 자신을 무력한 존재로 느낄 수도 있다. 약하고 용기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비정한 하나님이 우리가 아무런 재미도 즐기지 못하도록 가둬 두는 바람에 자신이 힘없는 희생자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전술은 아주, 아주 오래된 것이다. 사실 사탄은 태초부터 이 전술을 써왔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 두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모세서 3:16) “각종 나무”라는 말이 구속하는 제약처럼 들리는가?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 일어날 구체적인 결과들을 말씀하셨지만, 물리적으로 그들을 막지는 않으셨다. 그들은 에덴 동산을 차지했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스스로 택할 수 있나니, 이는 그 일이 네게 주어졌음임이니라”(모세서 3:17) 내게 그 말은 자유를 뜻한다!

할 수 없다하지 말라라는 말보다는 하지 않겠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할 수 없다 대신 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 말의 초점이 달라지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권한이 있음을 보여 주게 된다.

사탄이 나중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셨느냐?” (모세서 4:7) 사실 사탄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저 나무 열매를 먹으면 왜 안 되는데?” 크고 넓은 건물의 창가에 서서 비웃는 자들과 똑같은 어조로 말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필연적인 결과를 맞게 하신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는 마치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가신 것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 대신 자신을 따르도록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거짓말을 더해 교묘히 바꾸었다. 궁극적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구원의 계획에 속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자녀가 성장하여 본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구주를 마련해 주셨다.

“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난 몰몬이라서 못해.”라고 말할 때, 과연 그 말 속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할 수 있으면 좋겠어. 몰몬이 아니었다면 정말 했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게는 ‘내가 교회 회원만 아니었어도 다 해봤을 텐데.’라고 항상 농담을 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문제는 그 친구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다하지 말라라는 말보다는 하지 않겠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난 몰몬이니까 하지 않을 거야.”처럼 말이다. 할 수 없다 대신 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 말의 초점이 달라지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때 우리는 “나는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제약을 받아서가 아니라, 책임감 있게 선택의지를 행사하여 옳은 것을 하고 싶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즉 나는 스스로 행하며 행함을 받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니파이후서 2:14, 26 참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난 할 수 없어.” 대신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대단히 용기있는 행위이다. 각양각색인 세상 길로 향하는 무리를 따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진리를 수호한다는 것은 진정한 신앙을 표출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선택의지를 행사하고 있으며, 주관이 있음을 나타내는 일이다. 크고 넓은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름 없는 무리, 얼굴 없는 폭도로 불린다. 따라서 그들의 말은 공허하며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의 선택의지를 충실하게 행사한다면, 리하이와 그의 용감하고도 충실한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용감하게 “우리는 ……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니파이전서 8:33)라고 말할 수 있다.

날로 사악해져 가는 세상에서 그에 맞서 복음의 길을 걸어 가는 이들은 정말로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이렇게 권유하셨다. “우리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언제나 준비되고 용감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홀로 서야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곁에 설 때는 결코 혼자가 아닐 것임을 아는 지식으로 힘을 얻어 용감하게 나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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