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호나
엠 러셀 밸라드 회장: 복음을 나누는 일에 헌신하다
엠 러셀 밸라드 회장을 기리며


“엠 러셀 밸라드 회장: 복음을 나누는 일에 헌신하다”, 『리아호나』, 2024년 1월호.

추도문

엠 러셀 밸라드 회장: 복음을 나누는 일에 헌신하다

“온 인류의 구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제 간증입니다. 그분은 오늘날 이 교회의 일들을 인도하십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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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서 글을 쓰고 있는 밸라드 회장

러셀 밸라드는 아론 신권 소유자였던 어린 청남 시절에 친구와 솔트레이크 태버내클에서 열린 신권 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경험을 후에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단상 쪽에 있는 계단 옆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조지 앨버트 스미스[1870~1951] 회장님은 친절하게도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시고는 우리에게 단상 계단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앉아 모임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볼 당시만 해도 제가 이 연단에서 그렇게 가까이 있을 기회가 다시 오리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태버내클을 떠날 때 제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총관리 역원이 되면 좋겠다. 그러면 연단에 있는 저 의자들 중 하나에 앉을 수가 있잖아.’

… 저는 그때 … 제 생애에 감독, 선교부 회장, 칠십인, 그리고 … 사도로서 봉사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바를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직 해야 할 일은 미리 준비하고 주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그 일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2

엠 러셀 밸라드 회장은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일을 준비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선교 사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닌 그는 모범과 간증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모든 이에게 “일어나 필요한 자격을 갖추고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온전히 준비”하라고 독려했다.3

근면과 지도력

멜빈 러셀 밸라드 이세는 1928년 10월 8일에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멜빈 러셀 밸라드 일세와 제럴딘 스미스 밸라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난 러셀은 어려서부터 여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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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 러셀 밸라드의 어린 시절

엠 러셀 밸라드의 유아 시절.

현명한 사업가였던 그의 부친은 Ballard Motor Company[밸라드 모터 컴퍼니]라는 자동차 영업소를 운영했다. 러셀이 어렸을 때 부친이 교회에서 활동적인 회원은 아니셨지만, 러셀은 다음과 같이 부친의 영향력을 깨닫고 있었다. “아버지는 제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셨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4

그의 부친이 아들에게 보여 준 근면의 모범은 사업 활동 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러셀의 부친은 유타주 홀라데이에서 작은 복숭아 과수원을 가꾸면서 복숭아꽃의 수분을 위해 벌을 쳤다. “아버지는 그 순한 꿀벌들을 좋아하셨[습니다.] … 아버지는 벌집을 다루는 일에 저를 늘 끌어들이려 하셨지만,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분이 벌들을 직접 돌보시게 해 드렸습니다.”5

부친이 남긴 근면에 대한 교훈은 러셀 밸라드의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러셀의 누이인 앤 케딩턴은 “러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해야 할 일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처음으로 했던 일은 잔디를 깎고 뜰을 손질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토요일과 방과 후에 부친의 자동차 영업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6

러셀은 솔트레이크시티 이스트 고등학교에서 학생회 활동을 했으며,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는 이스트 고등학교 세미나리의 회장을 맡는 등, 여러 활동을 통해 지도력에 필요한 자질을 키울 수 있었다.7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유타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시그마 치[Sigma Chi]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신앙 생활에 충실한 그의 모습을 본 동아리 친구들은 그를 “감독”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8

선교 사업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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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성인 시절의 엠 러셀 밸라드

엠 러셀 밸라드의 젊은 선교사 시절 사진.

1948년에 영국 선교부에서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러셀은 선교부 회장단 보좌로 지명되어 두 명의 선교부 회장을 보필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선교사로 봉사했는데, 훗날에 그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에 몰몬들은 ‘조롱거리와 비방거리’였으며(제3니파이 16:9), 선교사들은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에게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침을 뱉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9 그는 그런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은 그는, “영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는 일이 좋았”다고 회고했다.10

선교사로 봉사하면서 러셀이 얻은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확고한 간증이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선교사로 봉사한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실제로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되었다는 흔들림 없는 간증을 얻었습니다. 저는 하이드파크를 비롯한 영국의 여러 거리에 서서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복음이 온전히 회복되었으며, 인류를 축복할 신권과 권세가 다시 한 번 지상에 주어졌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런 간증을 전할수록 그 간증은 저의 일부가 되었습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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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광장에서 설교하고 있는 엠 러셀 밸라드

1949년에 영국 노팅엄의 시장 광장에서 설교하고 있는 밸라드 장로.

실제로 선교 사업은 그가 향후에 받게 될 여러 부름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밸라드 회장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부름받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교회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받았던 모든 훈련 중에서, 열아홉 살의 나이로 영국에서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면서 받은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돌이켜 보면, 제 삶에서 받았던 훈련 중에 전임 선교사로서 받은 훈련보다 현재 제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에 더 중대한 영향을 끼친 훈련은 없었습니다.”12

가정생활에 헌신하며

선교 사업을 마친 러셀은 유타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귀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신학기 무도회”에 참석했다. 그는 그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친구는 저에게 바버라 보웬이란 아름다운 2학년 학생을 꼭 만나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여학생을 데려와서 저에게 소개해 주었고, 우리는 곧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때 시작된 춤은 소위 ‘톡톡 춤’이라 불리던 것으로, 언제든 다른 남학생이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 파트너인 여학생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바버라는 발랄하고 인기가 많았기에 춤을 추기 시작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다른 남학생이 저를 옆으로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선교 사업 동안 후속 확인의 중요성을 배웠던 저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바로 다음 날 전화로 데이트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학업과 다른 활동으로 바빴습니다. 감사하게도, 선교 사업 동안 저는 낙심할 만한 상황에서도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에, 결국에는 그녀와의 데이트를 성사시켰습니다. 첫 만남은 다음 만남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데이트를 하는 동안 저는 어떻게든 그녀가 저를 유일하고 참된 살아 있는 귀환 선교사로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최소한 그녀 눈에는 그렇게 보이도록 말입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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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 러셀 밸라드와 아내 바버라의 결혼식 사진

러셀과 바버라는 1951년 8월 28일에 결혼했다.

러셀의 끈기와 헌신은 끝내 결실을 거두어, 러셀과 바버라는 1951년 8월 28일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슬하에 클락, 홀리, 멜리아, 테마라, 스테이시, 브린, 크레이그까지 모두 일곱 자녀를 두었다.

밸라드 회장은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배웠던 젊은 아버지 시절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나눈 바 있다. “저는 10년 동안 감독 보좌와 감독으로 봉사했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는 일곱 자녀 중 여섯 자녀를 얻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일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아내는 종종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내는 성찬식에서 우리 어린 자녀들과 함께 뒷줄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그 후, 해임되던 날이 왔습니다. 10년 동안 단상에만 앉다가 이제 가족과 함께 뒷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와드의 어머니 합창단이 음악을 선사하고 있었고 저는 혼자서 여섯 자녀와 함께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제 평생 그렇게 바빴던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양손에 손가락 인형을 끼고 있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과자를] 쏟는 바람에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색칠하기도 별로 즐거워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모임 내내 아이들과 씨름을 하다가 아내를 쳐다보았을 때 아내는 저를 지켜보며 웃음을 보였습니다. 저는 … 사랑하는 어머니 여러분이 매우 훌륭하고 성실하게 일한다는 것에 더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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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라드 가족

2008년 10월 80세 생일을 맞아 가족과 함께한 밸라드 장로.

그의 아내도 그가 가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를 기억했다. “[남편은] 매우 헌신적인 가장이었고, 언제나 가족이 먼저였다. 오랫동안 감독으로 봉사했고 수많은 교회 일을 했지만, 그런 책임 때문에 가정에 소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있을 때 남편은 그 시간을 아주 의미 있게 보냈다.”15

시간이 흘러 밸라드 회장 부부는 자녀와 손주, 그리고 증손주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자녀들과 손주들은 팔마이라, 커틀랜드, 나부 등 교회 유적지를 방문하고, 1998년에 영국 프레스턴 성전 헌납식에 참석하며, 성지를 여행하고, 개척자의 길 일부를 도보로 여행하는 등 가족 휴가에 대한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밸라드 회장은 2018년 10월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이렇게 말했다. “제 사랑하는 아내 바버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우리가 가족과 다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16

신앙의 유산으로 강화되어

러셀 밸라드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형인 하이럼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개척자 조상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조부와 외조부, 외증조부는 모두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했다. 자신도 그 직분에 부름을 받게 되자 밸라드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조셉과 하이럼의 가계를 대표하게 된 것을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외증조부이신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님과 외조부이신 하이럼 맥 스미스 장로님, 그리고 조부이신 멜빈 제이 밸라드 장로님의 뒤를 이어 십이사도 평의회의 일원이 된 저는 여러분 앞에 큰 영광과 책임을 느낍니다. 저는 이 생득권에 걸맞은 종이 되고자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십이사도 형제님들께서는 휘장 저편의 평의회에 계신 제 조상들이 휘장 이편의 제일회장단 및 십이사도 정원회와 더불어 제 부름을 지지하심을 분명히 느꼈다고 수차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17

밸라드 회장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면 조부인 멜빈 제이 밸라드가 보았던,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구주와 포옹을 나눈 시현과18, 이생에서 조부가 남긴 마지막 말이 기록된 명판에서 힘을 얻었다. 그의 사무실 벽에 걸린 이 명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형제들이여, 무엇보다 우리는 똑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밸라드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무실에 들어설 때면 저는 항상 이 명판을 바라봅니다. 이 글에서 저는 큰 힘을 얻습니다.”19 실제로 밸라드 회장은 “똑바로 생각하라[think straight]”라는 간결한 두 마디를 가훈으로 삼고, 가족들에게 똑바로 생각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복음의 간결함을 기억하라고 격려했다.20

밸라드 회장은 가족들이 신앙의 유산에 의지하며 그것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훌륭한 모범으로 보여 주었다. 그에게는 교회 역사와 초기 성도들의 신앙이 자신의 가족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특히 우리의 청소년은 교회사를 이해함으로써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21 그리고 비록 많은 성도의 신앙이 19세기 몰몬 개척자 여정을 통해 시험을 받았지만 “우리는 각자의 ‘여정이 일생 동안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든 발자취[에] 신앙이’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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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을 던지는 엠 러셀 밸라드

밸라드 장로가 2009년 8월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다.

사진: 로리 셰플러 / AP

사업의 성공과 실패

러셀 밸라드는 직업 생활로 자동차 업계와 부동산 및 투자 산업에 종사했다. 그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중요한 삶의 교훈을 얻었는데, 영적인 일이든 현세적인 일이든 모두 부친의 조언과 영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배우게 되었다.

그 일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포드 자동차는 새로 출시한 신차를 판매할 영업자를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포드 임원들은 굉장한 인기를 끌 차종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신차 시연에 제 부친과 저를 초대했습니다. 차들을 보고 난 후에, 업계에서 35년간의 경험을 쌓은 부친께서는 제가 그 차의 판매 영업자가 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으셨습니다.”

밸라드 회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 문제로 고심하는 동안, 저는 주님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도를 구했습니다. 저는 큰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많은 자금이 들어가고, 제게는 큰 책임이 따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차들을 본 순간, 저는 영업소에서 그 차종을 판매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아주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포드 영업 담당자는 매우 설득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에드셀이란 차종의 첫 번째이자 사실상 마지막 판매 영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에드셀이란 차종을 모른다면, 할아버지께 여쭈어보십시오. 그분들이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에셀은 엄청난 실패작이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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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에드셀 자동차

러셀 밸라드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자신의 자동차 영업소에서 판매한 포드 에드셀.

사진: Getty Images

밸라드 회장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일찍이 들었던 영의 속삭임을 흘려듣고 말았습니다. 저는 교리와 성약 9편의 권고를 따르면서도 주님께서 주신 느낌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일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웠다. “여러분이 기꺼이 귀 기울이고 배우려 할 때,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몇몇 가르침들은 여러분들을 앞서간 분들에게서 나옵니다. … 여러분이 그분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응한다면, 그분들은 여러분이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될 선택을 하도록 이끌 것이며 여러분을 파멸시킬 수 있는 결정들을 피해 가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23

그것 외에는 사업에서 꽤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러셀은 이 실패를 학습 경험으로 삼아 실패로 이끄는 그와 같은 결정에 대해 “똑바로 생각”하게 되었다.24

주님에 대한 봉사

러셀 밸라드는 두 차례에 걸쳐 감독으로 봉사한 뒤, 고등 평의원과 제사 정원회 고문으로도 봉사했으며, 1974년 7월에는 캐나다 토론토 선교부를 감리하도록 부름받았다. 결과적으로 이 부름은 그가 장차 교회에서 종신직으로 봉사하기 위한 귀중한 준비 과정이 되었다. 2년 뒤인 1976년 4월 3일, 그는 칠십인 제일정원회 일원으로 부름받았으며, 1980년 2월 21일에는 이 정원회의 회장단으로 부름받았다. 그리고 그가 57세였던 1985년 10월 6일에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 부름받게 되었다. 그는 1985년 10월 10일에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에 의해 이 부름에 성임되었는데, 그것은 킴볼 회장이 별세하기 전에 했던 마지막 신권 성임이었다.

2018년 1월 14일, 토마스 에스 몬슨(1927~2018) 회장의 서거에 이어 러셀 엠 넬슨 회장이 제17대 교회 회장으로 성별된 후, 밸라드 회장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 대리로 성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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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라드 회장과 넬슨 회장

2019년 3월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을 배경으로 러셀 엠 넬슨 회장과 밸라드 회장.

밸라드 회장은 총관리 역원으로서 다방면에서 주님의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선교사부의 집행 책임자로 봉사했고 교과 과정부 및 협의부를 이끌었으며, 교회 홍보 위원회를 감독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1980년에 그는 나이지리아에 첫 예배당을 건립하도록 승인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후에 그는 교회 전체의 특별 금식을 통해 걷은 기금의 분배 방식을 결정하기 위해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기근에 허덕이는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다. 밸라드 장로는 당시 교회 복지 서비스부의 관리 책임자였던 글렌 엘 페이스와 함께 에티오피아에 있는 유일한 교회 회원이었던 멜기세덱 신권 소유자를 만났다. 밸라드 회장은 이 만남에서 에티오피아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했다. 페이스 형제의 회고에 따르면, 밸라드 장로는 “거룩한 멜기세덱 신권의 권세와 권능으로 자연을 향해 한데 모여서 그 땅에 비를 내리며, 그리하여 여러 해 동안 고난을 겪었던 이들이 이제부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셨다. 당시 에티오피아에는 1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상태였고, 밸라드 장로님이 그 기도를 하시던 일요일 아침도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맑은 날이었다.”

페이스 형제는 그날 오후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일지를 적는데 천둥소리가 들렸다. 테라스로 나가 보니 마침 바로 그때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나는 복도를 지나 밸라드 장로님이 계시던 방의 문을 두드렸다. 장로님이 문을 열었을 때, 장로님도 [나만큼이나] 놀라신 모습이었다. 우리는 감사 기도를 드린 뒤 각자 방으로 돌아가 생각에 잠겼다. 그날부터 우리가 가는 곳마다 비가 내렸다.”25 이 일은 밸라드 회장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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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서 밸라드 장로

밸라드 장로는 1985년 기근으로 인해 교회 회원들이 특별 금식 기간에 기부한 600만 달러가 넘는 기부금을 가장 잘 활용할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에디오피아를 방문했다.

1988년의 어느 주말에 페루의 리마에서 일곱 개의 스테이크를 새로 조직한 일 역시 밸라드 회장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 밸라드 장로의 조부인 멜빈 제이 밸라드 장로는 1925년에 복음 전파를 위해 남미를 헌납하면서 그곳에서 교회가 눈부시게 성장할 것임을 예견했다. 밸라드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을 하면서]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조부님의 놀라운 예언을 부분적으로 성취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그분의 영향력을 매우 강하게 느꼈습니다.”26

가르침

밸라드 회장은 모든 가르침 중에서도 회복된 복음에 관한 간증을 얻고 그 메시지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회복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꺼이 가르치지 못한다면, 그 일을 과연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27 그는 종종 회원들에게 날짜를 정해서 그 기한까지 복음을 나눌 사람을 찾으라고 권고했으며, 그런 후에는 그 권고를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후속 메시지도 전했다.

그는 가정과 교회에서 여성이 하는 중요한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평의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특히 한 동료 사도가 그의 이름에 있는 “M”이 선교사[missionary]를 뜻하는 글자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전임 선교 사업과 회원 선교 사업을 매우 강조했다.28

그는 선교 사업을 긍정적으로 내다보며 전 세계의 선교사와 회원들을 격려했다. 그는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수많은 귀환 선교사와 예비 선교사가 모인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교회의 성장은 … 참으로 여러분과 저, 그리고 교회 활동 회원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영혼에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때를 언급하며 이렇게 전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신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회원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에 전념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며, 복음은 그런 일이 왕성하게 일어남으로써 지상에 퍼져나가야 합니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이 굴러 나가도록 방법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북돋아 주시며, 영감을 주셔서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기와 올바른 판단력을 갖고 개인적으로 수양하며 준비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지상 도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든 모든 방면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갖춰지도록 여러분과 저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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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에서 밸라드 회장과 다른 사람들

2021년 10월에 스코틀랜드에서 정부 지도자들을 만나기로 한 밸라드 회장은 그의 증조부모가 다니던 교회 경내에 있는 묘지를 방문했으며, 그곳에 그의 증조부모도 안장되어 있었다.

회복된 복음에 대한 간증

어린 시절에 그의 가슴에 심어져서 선교 사업 동안 굳건해지고 일평생 봉사하며 강화된 그의 간증은 단순한 복음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저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거룩한 계시를 통해, 이 경륜의 시대를 열고 지상에 참된 예수 그리스도 교회를 회복한 것을 어떤 조건이나 의심 없이 알고 있음을 온 세상에 제 목소리를 높여서 간증합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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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성전 방문자 센터에 함께한 교회 지도자들

2019년에 이탈리아 로마 성전 헌납식에 함께 모인 제일회장단 및 십이사도 정원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 그분의 속죄, 그리고 이 마지막 날 지상에 회복된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

이생에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하늘에서 말씀하셨고, 선지자와 사도들을 부르시어 다시 한번 지상에 영원한 복음의 충만함을 가르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31

확실히 그는 평생을 주님의 사업을 서두르는 일에 봉사하고 헌신함으로써 주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저는 복음을 이해함으로써 어떤 아버지가 되고, 이제 어떤 할아버지가 되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얻은 간증이 있었기에, 저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라는 이 과분한 부름을 포함하여 교회에서 주어진 모든 부름에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 영국의 거리를 다니며 얻은 제 간증이 말씀에 말씀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자라난 끝에,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증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서서 우리 구주께서 살아 계시며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간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된 복음 진리에 닻을 내리고부터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32

  1. 엠 러셀 밸라드, “속죄와 한 영혼의 가치”, 『리아호나』, 2004년 5월호, 86쪽.

  2. 엠 러셀 밸라드, “순결은 큰 힘을 발휘함”, 『성도의 벗』, 1991년 1월호, 40쪽.

  3. 엠 러셀 밸라드, “가장 위대한 선교사 세대”, 『리아호나』, 2002년 11월호, 47쪽.

  4. Kathleen Lubeck, “Elder M. Russell Ballard: True to the Faith,Ensign, Mar. 1986, 6.

  5. 엠 러셀 밸라드, “열심히 노력하여”, 『리아호나』, 2012년 11월호, 29쪽.

  6. See Lubeck, “Elder M. Russell Ballard,” 6; Carolyn Hyde, On the Lord’s Errand: A Biography of Elder M. Russell Ballard of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2007), 35–36.

  7. See Hyde, On the Lord’s Errand, 32.

  8. See Lubeck, “Elder M. Russell Ballard,” 6; Hyde, On the Lord’s Errand, 36.

  9. 엠 러셀 밸라드, “주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리아호나』, 2015년 9월호, 17쪽.

  10. M. Russell Ballard, “Sharing the Gospel Using the Internet,Ensign, July 2008, 62.

  11. M. Russell Ballard, “Anchor to the Soul”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Sept. 6, 1992), 5–6, speeches.byu.edu.

  12. 엠 러셀 밸라드, “봉사하기 위한 준비”, 『성도의 벗』, 1985년 7월호, 47쪽.

  13. 엠 러셀 밸라드, “확인하기”, 『리아호나』, 2014년 5월호, 78쪽.

  14. 엠 러셀 밸라드, “하나님의 딸”, 『리아호나』, 2008년 5월호, 108쪽.

  15. Barbara B. Ballard, in Lubeck, “Elder M. Russell Ballard,” 9.

  16. 엠 러셀 밸라드, “죽은 자의 구속에 관한 시현”, 『리아호나』, 2018년 11월호, 73~74쪽.

  17. M. Russell Ballard, “Choose to Serve”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Jan. 5, 1986), 2, speeches.byu.edu.

  18. 예를 들어, 밸라드 장로가 감독 시절에 와드에서 건축 기금을 모았던 경험을 참조한다.(“희생의 축복”, 『성도의 벗』, 1992년 7월호, 75~76쪽)

  19. M. Russell Ballard, “Let Us Think Straight”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Nov. 29, 1983), 2, speeches.byu.edu.

  20. See Hyde, On the Lord’s Errand, 21–22.

  21. 엠 러셀 밸라드, “하이럼 스미스: ‘하늘의 기둥처럼 굳건함’”, 『성도의 벗』, 1996년 1월호, 6쪽.

  22. 엠 러셀 밸라드, “여정은 계속됩니다!”, 『리아호나』, 2017년 11월호, 105쪽)

  23. 엠 러셀 밸라드, “과거에서 교훈을 배움”,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31쪽.; M. Russell Ballard, “Let Us Think Straight,” 6.

  24. See Hyde, On the Lord’s Errand, 49.

  25. Glenn L. Pace, in Hyde, On the Lord’s Errand, 260–61.

  26. M. Russell Ballard, “Reflections on the Life of Melvin J. Ballard” (address given at Cache Valley Heritage: Mormon Religious Leaders and Their Origins, May 4, 1991), in Hyde, On the Lord’s Errand, 409–10.

  27. 엠 러셀 밸라드, “지금이 바로 회개할 때라”, 『리아호나』, 2001년 1월호, 88쪽

  28. See Hyde, On the Lord’s Errand, 203.

  29. M. Russell Ballard, “Future Challenges for an International Church” (Brigham Young University devotional, Nov. 8, 1984), speeches.byu.edu.

  30. 엠 러셀 밸라드, “주님의 놀라운 계시”, 『성도의 벗』, 1998년 7월호, 31쪽.

  31. M. Russell Ballard, “Anchor to the Soul,” 2.

  32. M. Russell Ballard, “Anchor to the Soul,”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