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2009
투덜거림을 조심하라
2001년 10월


투덜거림을 조심하라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주님의 축복을 깨닫는 데 필수적입니다.”

젊은 선교사들로서, 저와 동반자는 함께 오늘날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간증했습니다. 한 남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당신네 예언자가 이번 주에는 뭐라고 합디까?” 교회 잡지인 임프르브먼트 이라의 최신호에 실린 예언자의 메시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면서 저는 살아 계신 예언자의 가르침을 알고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특별한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살아계신 예언자들을 따르라고 설득하고, 그 분들을 따르지 못하게 하려고 사탄이 고안해 낸 속임수에 대해 경고해 드리고자 합니다. 경전에서는 그 속임수를 “투덜거림”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투덜거림”을 통해 불순종에 이르는 위험한 길을 경고하시면서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 비유에는 지극히 좋은 땅을 가진 귀족이 등장합니다. 그는 종들에게 감람나무 열두 그루를 심고 감람원을 살펴볼 수 있는 망대를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망대를 세우는 목적은 그 위에 파수꾼이 올라가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감람원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망대를 짓지 않았습니다. 적이 와서 감람나무들을 꺾어 버렸습니다. 종들의 불순종이 감람원에 큰 재앙을 불러왔습니다.(교리와 성약 101:43~62 참조)

어째서 종들은 망대를 짓지 않았을까요? 재앙의 씨앗은 투덜거림에 의해 심어졌습니다.

주님의 비유에 따르면, 투덜거림은 세 단계로 이뤄져 있는데, 불순종의 길에서 각 단계는 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첫째, 종들은 의혹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내린 지시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평화로운 때니 이 망대가 주인에게 무슨 필요가 있을꼬?”(교리와 성약 101:48) 그들은 마음속으로 먼저 의혹을 품고,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의혹을 심었습니다. 이렇게 의혹을 품는 일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주인이 지시한 것을 행하는 데 있어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이 돈을 돈 바꾸는 자들에게 줌이 어떠한고, 이러한 일을 할 필요가 없음이니라.”(교리와 성약 101:49) 따라서, 그들은 불손종을 위한 핑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셋째 단계는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데 게을러집니다. 비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은 심히 게을러져서 주인의 명령을 다 이행하지 아니하였더니”(교리와 성약 101:50) 그와 같이 재앙이 찾아올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그분의 길 안에서 가르치고 영생을 위해 준비시키고자 그들에게 예언자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이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5:8) 계명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주님의 축복을 깨닫는 데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적들은, 순종에서 나오는 그 힘을 없애고자 투덜거리라고 속삭입니다. 투덜거림의 패턴은 이스라엘 자녀들에 관한 다음 기록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물려받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애굽기 33:1~2 참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지경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나라 안으로 첩자들을 보냈고, 그들은 돌아와 가나안의 군대가 강하다고 보고하며, 가나안이 이스라엘보다 강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후 투덜거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예언자 모세를 통해 주어진 계명에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혹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퍼뜨렸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이 스스로를 메뚜기에 비유하면서 어떻게 가나안의 거인들을 무찌를 수가 있겠습니까?(민수기 13:31~33 참조)

그 의혹은 합리화와 핑계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두려워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외쳤습니다.(민수기 14:2~3)

그 투덜거림은 불순종으로 바뀌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다시 애굽으로 이끌어 갈 지휘관을 세우려 하였습니다.(민수기 14:4 참조)

그들은 살아 계신 예언자를 따르기를 완전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불평에 대해 주님은 가나안 족속을 멸망시키고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던 약속된 축복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내보내 40년 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불평의 패턴을 리하이의 가족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 리하이가 놋쇠판을 가져오도록 아들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냈을 때, 그들은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먼저, 레이맨은 놋쇠판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레이밴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리하이의 아들들이 금과 은으로 판의 대금을 치르겠다고 제의하자, 레이밴은 그들의 목숨을 앗으려 하고 재물을 몰수했습니다. 형제들은 바위 틈에 숨어 상황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레이맨과 레뮤엘이 투덜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의혹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레이밴을 우리들 손에 맡기시겠다 함이 어찌 가하랴?”(니파이일서 3:31)

다음은 핑계입니다. “보라, 그는 힘이 센 사내요, 오십을 거느리는 자라. 오십을 죽일 수도 있겠거늘 어찌하여 우리인들 죽이지 못하랴?”(니파이일서 3:31)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태해졌습니다. 격노와 분개와 변명으로 가득한 채, 레이맨과 레뮤엘은 충실한 니파이가 주님의 사업을 완수하는 동안 예루살렘 성 밖에서 기다렸습니다.(니파이일서 4:3~5)

주님은 우리 시대에도 이 태도를 경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명령을 받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마음에 의심이 가득하여 명령을 받아 마지못해 이를 준행하는 자는 정죄를 받느니라.”(교리와 성약 58:29)

우리는 손을 높이 들어 살아 계신 예언자들을 지지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살아 계신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분들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살아계신 예언자들의 말씀을 정확하게 따릅니까? 아니면 투덜댑니까?

모세나 니파이 시대보다 우리 시대에 살아계신 예언자를 따르는 것이 쉽습니까? 모세나 니파이에게 투덜댔던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투덜대지 않겠습니까? 같은 질문을 뒤집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투덜대는 사람들은 레이맨과 레뮤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그 당시의 예언자들에게도 투덜거렸을 것이며 똑같은 불행의 결과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매우 단순한 지시에서도 투덜대는 경향은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참석했던 한 모임에서,감리 역원은 참석한 회원들에게 앞 자리로 옮겨 앉으라고 권고했습니다. 약간은 자리를 옮겼지만, 대부분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자리에는 분명히 내가 왜 이 안락한 자리를 떠나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 내가 옮겨야 하지?”라는 의문은 의심할 여지없이, 곧바로, 자리를 옮기든 옮기지 않든 문제될 것이 없다는 합리화 및 핑계대기로 이어집니다. 감리 역원이 그러한 요청을 한 것에 짜증을 낸 몇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나태한 반응이었습니다. 거의 아무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작은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다 깊고 심오한 문제, 즉 순종심의 부족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불순종의 영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최근에 저는 서 아프리카의 한 교회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한 신권 지도자가 형제들에게 예배당 앞쪽으로 나와 맨 앞의 세 줄에 앉으라고 권유했을 때 모든 사람이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나와 앉았습니다. 작은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꺼이 순종하려는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예언자들이 주신 계명 가운데 여러분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 계명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닌지 의문이 생기십니까? 지금 그 계명에 따를 수 없는 준비된 핑계가 있으십니까? 그 계명을 상기함으로써 좌절감이나 불편한 느낌을 갖습니까? 그 계명을 지키는 일에 나태하십니까? 사탄의 기만을 주의하십시오. 투덜대기를 주의하십시오.

행복한 부모는 자녀가 기꺼이 순종하는 데서 특별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하나님도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주님께서 그의 종이 투덜대지 않고 순종할 때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것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사랑하는 아내와 저는 한 모임에 참석하여 우리의 임무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어느 곳에서 봉사하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적으로 서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도록 부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임무에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지만, 거의 39년 동안 함께 지내 온 동반자는 어떻게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 임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는 아내가 동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아내는 한번도 주님에게서 온 부름을 거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마음속 느낌은 어떨까?

함께 앉아 있을 때, 아내는 제 눈을 통해 제가 우리의 임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어디에요?” 저는 짤막하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기쁜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멋지지 않아요?” 그 순간 제 마음도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우리가 기꺼운 마음으로 살아 계신 예언자를 따를 때 우리의 아버지께서도 똑같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저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간증합니다. 그분은 오늘날 예언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불평 없이 예언자를 따를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