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교육원
경전 읽기


“경전 읽기,” 세미나리를 가르침: 예비 독서 자료 (2004), 53–54

“경전 읽기,” 세미나리를 가르침, 53–54

경전 읽기

Conference Report, October 1979, 91–93; 또는 성도의 벗, 1980년 3월호, 94~96쪽에서

우리가 경전을 읽고 연구하라는 지도자의 권고를 따를 때, 여러 가지 유익과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공부가 됩니다. 구약전서 및 신약전서로 알려져 있는 경전의 일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과학적 논문, 철학적 이론,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우리가 이 경전과 기타 경전의 참된 목적을 이해한다면, 그러한 책이 참으로 기본적인 종교 문학서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경전

경전에는 하나님과 그 자녀들에 관한 기본적인 말씀과 그들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책은 각기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들에 대한 신앙을 가지라고 호소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는 외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경전에는 하나님께서 몸소 계시하신 기록이 들어 있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 주고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시켜 주는 경전을 읽는 것보다 더 유용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시간은 바쁜 인간에게는 항상 귀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별로 가치도 없는 조잡스러운 것을 읽거나 보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면,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도둑맞는 것과 같습니다.

독서하는 습관은 매우 다양합니다. 책을 빨리 읽는 사람과 느리게 읽는 사람도 있고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조금씩 읽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다 읽을 때까지 쉬지 않고 단번에 읽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해하려면 그냥 읽어 보거나 정독하는 것으로 끝나기보다는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루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읽고 며칠씩 쉬는 사람보다 매일 경전을 연구하는 사람이 훨씬 더 앞서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연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규칙적인 시간을 별도로 정해야 합니다.

기도

경전에 대한 이해의 문을 열려면 기도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추구하는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누가복음 11:9)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열심히 받아들이고자 준비하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해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임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체계적인 연구 계획

연구하는 데 가장 좋은 시간으로는 밤 동안의 휴식을 통해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을 씻어버린 아침 시간을 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걱정거리를 한옆으로 치워 놓은 한밤의 조용한 시간에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경전과 대화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하루 일을 마치게 됩니다.

하루 중 어느 시간을 정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공부할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해 놓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아주 이상적이겠습니다만, 매일 30분만 규칙적으로 시간을 낸다 해도 상당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15분은 비교적 짧은 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시간으로도 어떤 주제에 대해 매우 의미 있는 지식과 깨달음을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경전을 공부하는 동안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연구하기를 즐기기도 하지만, 여럿이 함께 연구하면 더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현명한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녀들을 곁에 불러 모으고, 함께 경전을 한 페이지씩 읽어 나가며,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도록 훌륭한 이야기와 생각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한다면 가족이 모두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흔히 청소년과 어린이들도 기본적인 종교 서적을 놀라울 정도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마구 읽어 나갈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연구해 나가야 합니다. 매일 또는 매주 일정한 수의 페이지나 몇 장을 계획하여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읽는 사람이 즐겁게 읽어 나가기만 한다면 재미있게 잘 해나갈 수도 있지만, 그다지 의미 있는 연구를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매일 일정한 장수를 정해서 읽기보다는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경전 연구를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때로는 단 한 구절을 연구하는 데 그 시간을 다 소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숙고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과 가르침은 쉽게 읽어 나갈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야기는 단순히 전개되어 갑니다. 구주께서는 단어를 별로 많이 사용하여 가르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씀의 뜻이 너무 간결하므로, 함께 합쳐지면 그것은 독자들에게 명백한 의미를 전달해 줍니다. 그러나, 몇 마디의 단순한 낱말에 표현된 깊은 의미를 생각하는 데 여러 시간이 걸리 때도 있습니다.

구주의 생애에는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각기 말한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은 마가가 단 두 절과 뒤이어 나오는 절에서 네 마디 단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여러분께 읽어 드리겠습니다.

야이로의 이야기

“[그리고 보라,]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마가복음 5:22~24)

이 이야기를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초 밖에 안 됩니다. 그것은 단순하고 짧습니다. 그림을 보듯이 분명하며 어린 아이라도 무리 없이 되풀이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면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론에는 병을 앓는 어린 소녀와 예수께서 그녀에게 안수하셨다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보라” 보라는 단어는 경전에서 다양한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갑작스런 일 또는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이 갈릴리 바다를 다시 건너가시자, 가버나움 바닷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라[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당시 규모가 큰 회당은 여러 장로들이 한 사람의 회당장의 지시를 받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존경하면서 우러러 본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회당장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마가는 “야이로라 하는 이”라는 말로 그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 외에는 경전의 어디를 보아도 이 사람이나 그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그가 예수님과 잠시 만남으로 해서 그에 대한 기억은 역사에 길이 남아 있습니다. 구주의 손길이 닿아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고 새롭고 더욱 훌륭한 삶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많은 사람들의 삶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회당장이라는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아래, 즉 병 고치는 은사를 갖고 있다는 선생의 발 아래에 엎드린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학식 있고 지체가 높은 다른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보았으나 그분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문은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여야 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 장벽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야이로가]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이 말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절대적인 필요로 인해서 인간이 그리스도에게로 올 때 흔히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구주 앞에서 무릎 꿇은 이 지체 높은 사람을 생각해본다면 내 어린 딸”이라고 말하는 야이로의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 영혼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어 신앙에 대한 큰 인식이 뒤따릅니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이것은 비통에 젖은 아버지의 신앙에서 나온 말일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손을 얹으시는 것은 무엇이나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결혼 생활에 손을 얹으시면, 그것은 곧 새로운 삶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족에게 손을 얹으시면, 가족은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라는 말이 따릅니다. 이 사건이 그날의 일정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주께서는 다시 바다를 건너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군중들이 기다리고 있던 바닷가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라”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예수님은 한 아버지의 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 청을 무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분은 야이로에게 내일 그의 딸을 보러 가겠노라고 말씀할 수도 있었으나, “이에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우리가 구주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너무 바빠서 이웃 사람의 필요 사항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야기의 뒷부분은 읽어 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자, 예수님은 어린 소녀의 손을 잡아 죽음에서 살려 내셨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구주에게 손을 내미는 모든 사람을 새롭고 더 나은 삶으로 들어 올리시고 살려 내십니다.

경전은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지식을 준다

저는 경전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지식을 알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된 성경 외에도,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 주신 경전으로, 그리스도의 또 다른 증거가 되는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는 이 모든 경전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압니다. 이 경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임을 증거합니다.

주께서 연구하고 의롭게 그분을 찾으려 추구하는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